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 문명은 왜 야만에 압도당하였는가
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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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마제국 멸망 원인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지대하였다. 서양사상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제국이 그렇게 어이없이 일개 게르만족에게 무너진 사실에 대해 반응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에드워드 기본은 유명한 저작을 통해 로마의 멸망은 내생적 결함의 누적에 근본적 원인이 있고 외생적 충격은 방아쇠 역할을 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통설로 굳어졌다.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저자 역시 기본에 동조한다.
 
피터 히더는 당대 로마사 연구의 권위자다. 그는 반론을 편다. 로마제국은 내부적 한계를 내포하였지만 그럼에도 멸망 직전까지도 어느정도는 안정된 사회적 기반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무수히 반복된 게르만족들의 연타에 의하여 제국이 회복될 기회를 놓치고 쇠약해져 멸망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 성과를 유력한 증거로 뒷받침하고 있다.
 
"서로마제국은 분명 수많은 외부 집단들이 제국의 영토에 정착하고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 멸망한 것이었다."(P.617)
 
"서로마제국은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게르만 사회가 로마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제국의 힘에 대응하고 나섰기 때문에 몰락한 것이다." (P.648)
 
3세기 중반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사산조 페르시아에 의해 로마가 큰 곤욕을 치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페르시아는 일시적으로 결지된 적대 세력이 아니라 로마처럼 강대한 문명국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를 상대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야 했고 서부전선 방어가 취약해졌다. 더욱이 강화된 군비와 과도한 징세 등으로 인한 수탈로 로마제국의 경제 사회적 토대는 급격히 취약해졌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즉 그런 어려움에도 로마 농촌의 경제력은 향상되었고 인구도 증가하였다.
 
"결론적으로 과중한 세금에도 불구하고 제정 후기 로마의 농촌지역은 대체로 번영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다." (P.170)
 
그래서 저자는 "제정 후기 로마는 기본적으로 성공한 국가였다"(P.206)고 평한다. 정치적, 경제적 문제와 국가시스템의 한계에도 "4세기의 로마제국이 붕괴할 조짐은 어디서도 나타나지 않았다"(P.206)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로마제국에 대한 예찬론자로 볼 수는 없다. 다음 구절을 보자.
 
"로마제국은 영토만 넓었지 관료체계의 한계로 지주들이 중앙에 세금을 내고 정부군의 보호를 받는, 무력과 정치 담합이 얽히고설키는 지방자치체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았다" (P.352)
 
이 얼마나 혹독한 비판인가.
 
여기서 몇 가지 단편적인 사안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다.

먼저 저자가 강조한 만족 상위집단의 개념이다. 기본적으로 게르만족은 단합된 정치체제를 형성하지 못한 채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부족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가 훈족의 침입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몇몇 유력한 상위집단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즉 준국가단계로 접어들었다는 말이다. 알라리크의 고트족과 가이세리크의 반달족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양사에서 비수한 사례를 살펴보면 칭기즈칸의 몽골족과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그러하다. 로마제국은 고립된 부족들에 대한 통제는 성공했지만 강력한 상위집단들의 만족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은 이미 상실하였다.
 
스틸리코에 대한 평가는 양분된다. 그럼에도 스틸리코의 실각 이후 로마사는 그의 능력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반증이 된다. 고트족의 로마 약탈을 상기하자. 이렇게 보면 그는 이미 로마제국 역량의 한계를 인지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게르만족과 공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선각적 지도자였다.
 
로마제국 붕괴의 도화선이 된 훈족에 대해 저자는 흉노족과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수백 년의 시차를 두고 유라시아 초원의 양단을 횡단한다는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하지만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제국의 운명이 뒤바뀌었음은 인정한다. "훈족의 간접적인 영향은 아틸라가 입힌 직접적인 피해보다 제국에 한층 더 치명적이었다."(P.492). 더욱이 훈족 제국의 멸망은 "5세기 중반까지 서로제국의 기반이 되어준 힘의 균형을 깨뜨렸다"(P.519). 훈족의 지배하에 숨죽였던 게르만족들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고 로마에 대한 괴롭힘을 재개하였다. 즉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는 멸망에 이르는 길을 걷기 시작했지만 역설적으로 훈족의 퇴장으로 그 속도는 가속화되었다.
 
여기서 서로마가 최후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안정된 동로마는 왜 두 손을 놓고 있느냐는 불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는 무지의 소치임을 저자는 웅변한다. 과거에도 동로마는 서로마의 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468년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제거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동 원정에 동로마는 거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곡창지대인 아프리카만 회복하면 서로마는 다시금 부활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 후 동로마의 재정도 위태로워졌고 반달족과 타협을 하는 외에 다른 방안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저자의 입장을 정리하자면, 로마는 내적인 한계를 지닌 체제였지만 온갖 위기를 넘기면서도 성공적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훈족과 그 침입이 야기한 후의 게르만족들과의 대치 과정에서 국력을 상실하고 끝내 이를 회복하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동조할 지 여부는 독자에게 달려 있다. 그럼에도 파국을 극복할 기회가 결코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측면을 중시하면 역시 내적인 붕괴론을 쉽게 배척하지 못한다.
 
이 책의 가치는 풍부하다. 서로마제국 후기와 멸망에 관한 최신 연구성과를 반영한 풍성한 읽을거리가 가득하며, 더구나 훈족과 게르만족들에 대한 미지의 사실을 획득하는 좋은 게기가 된다. 파란만장한 로마제국에 대한 관심이 큰 독자라면 일독할 가치는 매우 높다. <로마인이야기>에만 만족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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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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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리안의 유럽 침략
존 배그넬 베리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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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단 유념할 사항이 있다. 이 책이 출판된 시기는 1928년이다. 지금부터 무려 80여 년 전이다. 저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기에 활약했던 소위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저자의 의견이나 史實 가운데 일부는 현시점에서 보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동안 어떤 역사학의 진보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구심이 완독 후에 내게 생겼다.
 
흔히 세계사 시간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는 항목으로 배우는 그 시기를 바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아시아에서 훈족이 서진하자 이를 피하여 게르만족이 대대적으로 로마제국으로 밀고 들어와 마침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말았다는 일대 격변의 시기라고 하겠다. 동양사에서 비교하자면 5호16국 시대 정도라고 할까.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얄팍하며 잘못된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깨우치고 있다. 하기사 이 책은 저자가 행한 일련의 강의록을 편집한 것이므로 나 같은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보다 용이한 장점이 있다.
 
여기서 '바바리안'이라는 용어는 멸시적 의미가 아니라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 야만족과 비기독교도를 동시에 일컫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유력한 분파인 고트족(서고트족과 동고트족), 프랑크족, 반달족 등이 유럽 역사를 헤집어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게르만족의 대서사시인 <니벨룽겐의 반지>가 조상의 터전인 북구의 신화 및 전설과 많은 유사성을 내포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서기 375년에서 575년까지의 2백년 동안 유럽에 파고를 미쳤던 종족의 이름을 언급해 보자. 훈족(아시아계 유목민), 동고트족, 서고트족, 롬바르드족, 프랑크족, 반달족, 앵글족, 색슨족, 수에비족 등. 이 모든 종족이 단지 흉포한 훈족의 침입에 겁을 먹어서 대대적인 부족 이동을 감행했을까? 침입자의 세력에 비하면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무력 면에서도 힘을 합치면 충분히 대결해 볼만할 텐데 말이다. 훈족의 서진 이전에 이미 바바리안들은 오늘의 독일과 동유럽 방면에서 서진을 감행할 충분한 동기가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사실상 훈족은 이러한 추이를 앞당기는 방아쇠 구실을 하였을 따름이다. 훈족이 로마제국 해체 과정에서 촉진제와 지연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는 저자의 의견은 충분히 음미할 만하다.
 
사실 역사를 참조하면 불가항력적인 순수한 외침에 의하여 국가가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체를 둘러싼 환경에는 언제나 건강에 적대적인 병인이 돌아다니고 있다. 인체가 튼튼하면 가벼운 감기에 그치지만 허약해지면 바로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거대한 로마제국이 이민족과 국경을 맞댄 것이 한두 해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초기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을 성공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로마제국 자체가 내부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역량을 상실하였기에 국경을 넘나드는 바바리안을 실체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오히려 바바리안에 제국의 운명을 맡기게끔 되고 말았다. 하필이면 동로마는 멀쩡한데 서로마만 문을 닫은 이유를 저자는 군사편제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서로마에서는 군권이 총사령관 일인에게 집중되어 총사령관이 황제마저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휘두르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반면 동로마에서는 다섯명의 군사령관에게 군권이 배분되어 있어 상호견제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권위와 권한이 상당 부분 장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P.46).

반달족이 서로마의 곡창지대인 아프리카를 접수한 과정을 보면 결국 제국의 배분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서로마가 아프리카를 상실하지 않았다면 바바리안에게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달왕국이 서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함으로써 로마는 연명에 급급하였고 갈리아와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도 급속도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P.182-183). 이것이 세계사에서 반달족과 왕 가이세리크가 수행한 가장 큰 과업이다.
 
역사는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켰다고 가르친다. 저자는 이를 반박한다. 그는 '서로마제국'이라는 표현이 부적당함을 지적한다. 이는 로마제국 서부를 지칭하는 인습적인 표현이며 당시 로마인들은 오직 하나의 제국만을 인정하였다고 한다. 오도아케르는 허울뿐인 서로마 황제를 단절시켰지만 여전히 로마제국의 형식을 인정하였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로마황제가 임명한 서로마(이탈리아)의 집정관이었다. 오도아케르를 축출한 동고트족의 테오데리크도 그 형식은 유지하였다. 그러면 이를 깨뜨린 것은 누구일까? 이 책에서는 명확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바로 프랑크족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과는 달리 출발부터 로마제국의 허울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크왕국이 전성기를 맞이하고 분열되면서 유럽은 비로소 본격적인 중세시대로 이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찬란했던 로마문명의 후광을 일시에 암흑으로 몰아넣은 부정적인 인식 탓인지 바바리안의 유럽침략 시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싶다. 그러기에 오래된 이 책이 전혀 진부하지 않고 참신하게 다가온다. 더구나 내용 구성이 난삽하지 않아 문외한도 비교적 흥미진진하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다만 전문학술서와는 달리 체계가 다잡혀 있지는 않다는 약점은 강의록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인정하면 너그러워진다.
 
최근의 연구성과를 담은 저작을 읽고 싶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피터 히더의 <로마제국 최후의 100년> 출간이 반갑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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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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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명물교수 함토벤
함신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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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인기몰이로 클래식 음악계는 모처럼 들떠있는 듯싶다. 우습지만 드라마 초창기에 클래식 동호회 사이트에서는 김명민의 연기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극단적으로는 시청의 값어치가 없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었다. 그들은 다중을 위한 드라마가 아닌 매니아를 위한 정통 클래식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하기사 <베토벤 바이러스>가 원조는 아니다. 일본의 만화 원작으로 드라마화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던 <노다메 칸타빌레>가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지휘자 치아키의 캐릭터는 이 책 <함토벤>을 읽는 도중 가끔씩 오버랩 되곤 하였다.
 
솔직히 함신익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잘 모른다. 음악계 단편으로 대전시향을 맡아서 괜찮게 이끌다가 운영진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는 어렴풋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나마 귀에 익은 베를린필이나 빈필 또는 시카고나 뉴욕필을 이끈 것도 아니니 세계적 명성을 지닌 음악가도 아니다. 좀 냉정한가?
 
책장을 넘기면서 나의 편견이 얼마나 얄팍한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음악 그 자체보다는 외피와 포장에만 현혹당하는 가련한 존재. 실력에서는 뒤질지 몰라도 열정과 헌신만 있다면 얼마든지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피곤한 프로보다는 뜨거운 아마추어가 더 나을 수 있다는 점은 일찍이 청소년 오케스트라 공연을 통해 느낀 사실이다. 강마에가 이끄는 석란시의 프로젝트 오케스트라가 그러하고, 치아키가 지휘한 S 오케 또한 그러하다. 그들은 음악에서 음악 이외에는 아무런 것도 욕심부리지 않는다.
 
함신익도 달동네 소년에서 예일음대 교수가 된 것은 그야말로 지칠 줄 모르는 음악에 대한 사랑과 노력의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양교회 합창단을 이끌고 경연대회에 나간 시절의 회상이 흥미롭다. 경연장에서는 남이 무조건 나보다 더 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P.35)고 한다. 그래서 자신감이 줄어들고 결국 연주를 망치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노다메>에서 치아키가 지휘 콩쿨에 나가서 라이벌이 지휘하는 <틸 오일렌슈피겔>을 듣고 다급해져서 스스로 무너지는 장면이 절로 연상된다. 남에게 좌우되지 않는 자기만의 실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은 비단 음악만이 아니라 어떤 경합에서도 마찬가지 요건이리라.
 
성공한 사람은 나태하지 않다. 기회는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오지 않는다고(P.37)고 함신익도 말한다. 그는 자신의 온 존재를 던져 그 일로 돌진했다고 한다. 그가 미국 유학시절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할 때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흔히 성공한 사람, 남보다 능력이 탁월한 사람은 자신의 기대수준에 못 미치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반면 남들의 눈에 그들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다. 스포츠 스타 출신의 감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속설이 이를 입증한다. <노다메>의 치아키도 남 못지않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이다. 피아노면 피아노, 바이올린이면 바이올린, 거기다가 지휘까지. 하지만 그는 자신의 완벽성을 단원에게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가 역풍을 맞는다. 토스카니니가 다시 태어났다면 필시 지휘계에서 제명당했을 것이다. 강마에가 십년 동안 국내 무대에 서지 못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한때 함신익도 자인한다. 자신도 같은 부류였음을. "연습 중에 틀리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함으로써 내 능력을 인정받으려 했는지도 모른다"(P.19)고.

내가 이 책에서 흥미롭게 받아들인 부분은 저자 자신의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다. 사회에는 외관상 저자 자신보다 더 성공한 이들이 모래알만큼이나 많다. 음악도가 맨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자신의 실력을 배양하여 당당하게 우뚝 서는 과정과 그 이면사를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유복한 집안의 천재 연주자면 성공하지 못한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함신익은 50줄에 막 접어들었다고 한다. 지휘계에서는 과거에 오십대도 아직 원숙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아직 완성형이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소박한 바램은 이 책이 회고담이 아니라 중간 쉼표의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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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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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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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제는 <Status Anxiety>인데 번역본은 그냥 <불안>이다. '지위로 인한 불안'이 보다 정확한 용어일 텐데 단순히 '불안'이라고 줄여버린 이유는 무엇인가.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불안의 원인 중 지위에서 발생한 불안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반영한 셈인지.
 
저자는 불안의 원인으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다. 그리고 해법으로 역시 다섯 가지를 들고 있다.
 
먼저 사랑결핍. 여기서 사랑은 Love의 개념이 아니라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또는 존중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판단에 좌우된다."(P.21)
 
속물근성.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P.29)
 
기대. 가난한 나라의 국민이 선진국보다 삶의 만족도가 높은 사례가 종종 보고된다. 기대감이 낮을수록 작은 불평등에 덜 예민해지며, 무제한의 기대는 희망과 낙담의 깊은 골을 만들어내므로 쉽사리 만족 못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대'보다는 '갈망'이 유효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충족되지 않은 목마름은 삶을 괴롭게 한다.
 
능력주의.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고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P.119) 가난이라는 낮은 지위는 열등성의 반영이므로 수치감을 더해주게 된다.
 
그리고 각종 불확실한 요인들도 불안의 증폭에 한몫을 단단히 한다.
 
그러면 저자의 해법을 한번 보자.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 나열된 해법을 보면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철학. 합리적 이성으로 필터링한다. 즉 이성적 판단으로 터무니없는 외부적 평가나 비난은 무시해버린다.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대단한 인물이다.
 
예술은 현실의 덕성과 지위 불일치를 문학(예술)에서 묘사하여 독자를 달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덕성과 지위 일치의 혼동을 경고한다. 그리고 비극은 개인적 실패를 특히 위로하는 역할이 크다고 한다.
 
정치. 물자를 많이 소유하는 것은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는 이상으로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한다(P.250). 필수품에는 자연적 필수품과 사회적 필수품이 존재하는데 생명유지에 필요한 자연적 필수품의 부족은 절대적 가난으로 이어지는 반면 사회적 품위에 필요한 사회적 필수품의 부족은 상대적 가난에 닿는다. 그런데 상대적 가난이 더욱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이런 헛된 믿음(이데올로기)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배적 믿음과 사회적 질서는 신성불가침의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제기할 경우 이데올로기는 그 천상의 자리에서 배겨나지 못하게 된다.
 
기독교. 보통은 종교라고 통칭하면 편하다. 죽음과 신에 대한 관념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과 미덕의 발견을 위한 동기를 제공한다. 이때 세속적 가치체계는 덧없는 구조물로 전락한다.
 
보헤미안. 데이비드 소로의 예와 같이 기존의 사회적 관습과 가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거부하는 생의 태도라고 하겠다. 보헤미안이나 히피가 되는 것에는 낭만적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소시민에게 환상과 경각을 일깨워 주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그 또한 교조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해법은 그 자체로 지위로 인한 불안을 제거하지는 못한다(P.385). 그것들은 지위를 다변화함으로써 지위의 새로운 위계를 구성하고 그럼으로써 불안을 단편화한다.
 
불안은 연원에 따라 개체적 불안과 사회적 불안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체적 불안은 생명이나 상해와 같은 존재에 대한 불안으로 본원적 불안이다. 반면 사회적 불안은 지위 등 관계에 대한 불안으로 후천적 불안이다. 현대 사회의 특성은 사회적 불안을 개체적 불안으로 전이시키는 증상에 있다. 사회적 불안은 역사적 관습에 의해 본원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것을 당연하게 내면화한다. 거기에 유일한 가치를 숭상하고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풍조가 이를 증폭시킨다.
 
저자의 해법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해소책은 부재한다. 인간이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속에 잔류하는 한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사회를 등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사회적 불안을 완화 또는 중화시키는 방책이 필요하다. 저자의 다섯 가지 해결책이 지향하는 바도 이것이다. 당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에 매몰되지 말자. 독자적 가치판단과 의식으로 인습을 거부하고 자존을 유지한다면, 그리고 타인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돌아본다면 외관상 실패와 못남도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 못한다.
 
* 존 러스킨과 그의 <이 최후의 사람에게>에 대한 내용을 처음 접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런 선구적인 인물을 나는 아직 왜 몰랐던가. 인터넷 서점에서 당장 그의 책을 주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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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6.9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 길벗어린이 문학
미하엘 엔데 지음, 프란츠 요제프 트립 그림, 선우미정 옮김 / 길벗어린이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발표한 후속작이다. 대표작인 <모모>에 비하면 국내 번역본은 숫적으로 미약하기 그지없다. 직접적 동화라는 외관상 차이점에 기인한 듯하다. 하지만 전작도 마찬가지지만 내용을 보면 단순한 동화는 아니다. 오히려 중·고교 이상 성인들에게 더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작의 모험담이 산맥과 사막이 배경이라면 여기서는 바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인어공주 수르술라피치와의 조우
 물의 요정 우샤우리슈움
 
그리고 바닷불을 밝히기 위한 자석 암초에서 발견한 소위 영구기관으로 비행을 하는 기관차
 
몸바꿈을 한 '슬기로운 황금용'에게서 들은 정보로 13인의 해적과 결전을 벌이지만 패배하고 포로가 되는 일행과 정말 어이없게 해적들을 쉽사리 제압하는 짐 크노프
 
짐 크노프의 출생의 비밀과, '있어서는 안되는 나라'와 '잠발라'의 관계. 그리고 최고의 반전은 '13인의 해적'의 진실에 있다.
 
정말 종반부로 갈수록 극적인 사건의 반전이 흥미진진함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한다. 초·중반부의 다소간 밋밋한 전개를 일거에 불식시킨다.
 
전작이 예측치 못한 판타지의 세계를 우리에게 선사하여 감탄을 자아냈다면 - 룸머란트, 만달라, 세상의 왕관 산맥, 세상의 끝 사막, 용들의 도시 쿰머란트 등을 보자 - 후속작은 보다 참신과 흥미를 제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제법 컸을 것이다. 엔데는 이를 멋지게 극복하였다. 당시 독자들에게 얼마나 환호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영화로 만들어도 꽤나 호응이 좋을 텐데. 동화인 만큼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그리고 엔데는 연이은 작품으로 세계적 작가로 우뚝 선다.

엔데의 작품의 기조가 여기서도 뚜렷하다. 현실과 낯선 세계를 대비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그 무엇을 되찾아 주고자 함이다. <모모>는 '시간'의 의미를, <끝없는 이야기>는 현실과 환상의 조화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전작과 <짐 크노프와 13인의 해적>에서 엔데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짐 크노프의 비밀'(P.322)에서 언급하였듯이 선의는 옳지 않은 것을 옳게 만든다는 소박하지만 자명한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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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1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9.5.26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