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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신화
조철수 지음 / 서해문집 / 2003년 6월
평점 :
절판
작년 후반부터 세계문학을 통독해 보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야심만만하게 시도하였다. 우선 문학의 시원인 신화부터 시작하여 시대 순으로 내려올 생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펼쳐들었다. 그 후 불현 듯 인도의 고대 문학작품이 궁금하여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샤쿤탈라>, <메가 두타> 등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호기심은 고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페르시아를 향해 서쪽으로 나아가 우화집 <칼릴라와 딤나>로 시작하여 사아디와 허페즈의 교훈적 이야기와 시를 살짝 맛보았다. 이번에는 다시 메소포타미아로 건너뛰었는데 <길가메쉬 서사시>를 실제로 대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길가메쉬는 고립무원의 독립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수메르 신화의 광대하고 풍요로운 토양에서 생산된 산물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래서 수메르 신화와 문명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이런저런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처음에는 낯설기 짝이 없던 신들의 계보와 용어, 수메르 어휘가 가리키는 깊은 중의적 의미, 찬란한 고대 서양 문명과 신화가 수메르에게 크게 빚지고 있었음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진실. 게다가 터무니없이 고대이면서 때로는 초현대적이기 조차한 그들의 문명 세계. 인류가 그토록 오랜 세월 수메르를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몇 권의 수메르 저작물을 읽어나가면서 레퍼런스로 소장할 책을 골랐다. 수메르 인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윤색을 거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맞대면하고 싶었다. 그것은 국내에서 수메르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단 두 명의 인물인 김산해의 <길가메쉬 서사시>와 조철수의 <수메르 신화>이다. 다행히 김산해의 책은 쉽사리 구할 수 있었던 반면, 조철수의 것은 시중 서점에서 절판되어 구할 수 없어 출판사에 직접 전화하여 재고분을 겨우 습득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욱 뜻 깊다.
사실 <수메르 신화>의 내용은 대부분 전혀 새롭지 않다. 이미 앞서 읽은 책들에 한두 번 내지 많게는 대여섯 번도 등장했던 토판의 이야기들이다. 지우수드라의 홍수 이야기, 아트라하시스, 에누마 엘리쉬 등 수메르 신들의 창세기. 그리고 유명한 인안나와 무두지의 사랑과 비극, 길가메쉬 이야기 등.
그렇다고 이 책을 읽는 게 별 의미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인용이 많고 해설이 풍성하다고 해도 원작을 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안이다. 그렇다, 나는 수메르 탐험의 휴지부를 여기서 찍을 작정이었다. 그래서 수메르 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다. 그것이 수메르에 대한 걸맞은 에티켓으로 생각하였다. 그 의도에 이 책은 십분 부합한다.
수메르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수메르가 재발견된 지 겨우 이백여 년 남짓. 수메르 문자가 해독되고 토판들이 연구되기 시작했던 게 얼마 전이던가. 현재까지의 연구만으로도 수메르는 인류 문명의 선구자로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연구 결과가 더욱 기대되는 것은 수메르가 갖는 양면성이 어쩌면 고대 인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뒤엎을 잠재력을 내포할 가능성에 기인한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수메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