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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아디의 우화 정원 - 위대한 페르시아 수피 ㅣ 붓다 지혜의 우물 1
사아디 지음, 이현주 옮김 / 아침이슬 / 2008년 6월
평점 :
손바닥만 한 부피에 분량도 170면 내외에 불과하다. 아담하여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만하다. 게다가 어려운 책도 아니고 ‘우화’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아디는 누구인가? 겉표지에는 ‘위대한 페르시아 수피’로 적혀 있다. 간단한 약력을 확인해 보니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으로 하피즈[허페즈]와 더불어 대표적인 저명 작가라고 한다. 작품 중에서는 <굴리스탄(장미정원)>과 <부스탄(과수원)>이 유명하다는데, 국내에는 당연히 번역본이 있을 리 없고(예전에 굴리스탄이 번역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절판되었다 ㅠㅠ), 이 우화집이 출판된 것만도 감지덕지하다. 다만, 아서 숄리의 편집본을 번역한 것이므로 작가의 원작의 출전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가 없다.
약 80여 편의 짤막한 교훈적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각 이야기는 대개 두 면 남짓하며 짧은 것은 반 면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화’라고 하였지만, 동물이 등장인물인 이야기는 몇 편 되지 않으므로 그냥 옛이야기 모음집으로 이해하면 맘 편하리라.
훈육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는 고금과 동서의 차이를 물론하고 비슷한 형태와 주제를 갖기 마련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은 유사한 법이다. 여기에 문화적 차이가 비슷비슷한 가운데 독특함을 부여하는 양념 역할을 해준다.
인상에 남는 몇 편의 이야기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목이 비틀어진 왕’ 편에서는 목이 비틀어진 왕을 고쳐주었는데도 아무런 감사를 표하지 않자 의원이 다시 목을 비틀어지게 해놓고 사라진다는 내용이다. 즉 배은망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 사람이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틀리다는 속언과 별반 차이 없다.
‘술탄과 탁발승’ 편은 알렉산더 대왕과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디오게네스에겐 한 줄기 따뜻한 햇살이 소중했듯이 탁발승은 술탄에게 자신을 성가시게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구두쇠와 아들’ 편도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다. 재화를 땅속에 묻어놓는 것은 돌멩이와 다름없다는 표면적 교훈인데, 내게는 부자 삼 대 못 간다는 속설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해답으로 여겨졌다. 선대의 근면과 절약 정신을 후대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탁발승과 여우’ 편은 고사성어 수주대토(守株待兎)가 연상된다.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와 가만히 누워서 먹을 것을 기다리는 탁발승이 어떤 차이점이 있을는지.
‘고삐 끈 이름’ 편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먼 조상 격이다. 진정한 양의 고삐 끈은 친절과 사랑이라는 소년의 말이 가슴에 뜨끔하다.
‘겁에 질린 여우’ 편에서 여우가 두려워하는 것은 집단행동의 맹목성이다. 그 맹목성에 일단 포위되면 정의는 사라지고 광기만이 난무한다. 여기에 희생된 억울한 개인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좋은 선생’ 편은 교육과 교육자의 본질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한다. 교육의 민주성은 어디까지 보장해 주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 정도의 비민주성이 불가피한 것인가. 강제적 방식으로 교육을 받은 이들이 훗날 개인의 인성 존중과 자율성에 기반한 민주적 사회를 성공적으로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을 것인가.
‘신성한 나무’ 편은 재화가 인간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재화가 혈연에 선행하는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만이 아니었다.
작가 사아디는 몽골의 침략 이후 방랑 세월을 보내다가 노예가 된 경험도 있다. 어찌 보면 그리스의 이솝과 마찬가지 경험을 한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 중에 자신을 등장인물로 삼은 경우도 있다. ‘불쌍한 노예, 사아디’ 편은 개인적 체험을 객관화시켜 더욱 사실성을 담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