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나무 대산세계문학총서 63
피오 바로하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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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반테스를 제외한 스페인 작가의 글은 처음 읽는다. 그만큼 스페인은 우리에게 가깝지만은 않은 존재인가. 대산세계문학총서에 새삼 고마움을 표한다.

마지막 장을 덮고난 후 소감은 '담담함'이다. 이 단어가 이 소설의 특질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성장소설을 연상시키는 작픔 전개는 마지막에 급작스러운(하지만 당연한)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난다.

'과학의 나무'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에덴동산에 있다는 나무이다. '생명의 나무'와는 대조되는 의미에서 말이다.

작가는 안드레스 우르타도라는 젊은이를 내세워 당시 스페인의 사회 깊숙이 자리잡은 부조리와 비합리성, 낙후성을 지극히 담담한 어조로 드러낸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던 대 스페인제국은 무수한 식민지를 상실하고 이제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완패할 정도로 몰락하고 만다. 사회에 팽배한 상실감과 패배의식 속에 피오 바르하는 분노를 한껏 표출해도 되련만 자제로 이에 대응하며, 후미진 구석을 더 깊고 자세히 그려도 되겠건만 문을 열어서 안을 보여주고는 다시 닫고 만다. 어찌 보면 감질난다고 할 정도로. 이건 작가의 스타일인데, 이또한 피오 바르하가 다른 18세기 작가들과는 비교되는 현대성의 일부라고 한다.

이 작품의 성장소설적 구조는 안드레스가 아버지의 세속성에 대한 강한 불만과 의대생으로 겪고 사색해나가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에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실제적인 해결책은 전혀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애정과 자비심에 기초한 정신적 아나키즘에 경도되어 가고 있었다"(P.60).

우르타도와 삼촌 이투리오스 간의 철학적 담화는 이 소설의 또다른 특징이다. 제4장을 구성하는 이 담화는 작가 자신의 삶의 시각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흥미롭다. 이투리오스가 생명의 나무, 즉 주지주의에서 벗어나는 생의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보는데 반해("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P.160) 안드레스는 이성과 의지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신뢰한다.

굴원의 어부사가 연상된다. 세상 사람 모두가 취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고, 모두가 흙탕물에 옷을 적시는데 나만 홀로 깨끗하다. 안드레스가 바로 그러하지 않았을까. 그가 본 스페인 사회는 모두가 취한 사회였다. 그는 아무일 없듯이 그들에 합류하여 취하거나 옷을 더럽힐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 아웃사이더를 선택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었을텐데, 한줄기 끈이 그것을 지연시켰다. 룰루와의 교제와 결혼이 그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그가 세상과 맺고 있는 유일한 매개체였고 그녀를 통해서 그는 세상과 최소한의 관계나마 형성할 수 있었다.

그는 룰루의 염원과는 달리 아이을 낳는데 찬성하지 않았다. 어지럽고 희망없는 세상에 또다른 비주류를 잉태한다는 것은 비극이고 무책임한 짓이다. 출산은 사산으로 끝났고 룰루도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도 세상을 버린다. 룰루라는 한가닥 실마저 끊어진 마당에 생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너무 안됐어! 이 친구, 이제 아주 잘나가고 있었는데!" 이투리오스가 외쳤다. 그들이 하고 있던 말을 들은 안드레스는 영혼이 꿰뚫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P.288)

그는 잘나가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저 근근이 연명을 하고 있었을 뿐.

여러모로 특이한 소설이다.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전개의 고조와 클라이막스를 기대하다가는 실망하기 딱이다. 문학작품에서 기대하는 감정의 몰입도 어울리지 않는다. 담담하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뭔가 독특함이 묻어나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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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9.21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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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로드 무비가 있다면, 이 작품은 '로드 소설'에 적합하다. 적어도 중반부까지라도. 오르한 파묵. 노벨문학사 수상자로 성가가 높다. 더구나 터키 출신의 비서구권이라 진정한 실력파라고 생각되었다.

겨우 한 작품 가지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예단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작품 해설을 보면 <타임스>가 "현대의 가장 특이한 작가들 중의 한 명"(P.390)이라고 하였다는데 여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더구나 이 작품은 그리 녹록치 않다. 파묵의 미덕이 서사성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분명히 서사는 서사인데...굳이 분류하자면 순수한 서사 보다는 상징적 서사에 가깝다. 전체 플롯은 존재하지만, 이것이 사실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모호한 안개에 둘러싸여 있다. 작품 해설에서도 그 점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서술하는 것은 구체적인 삶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세계이자 실상이며, 그 이미지들이 다양한 의미로 인용되는 구조다."(P.391)

하긴 출발부터 그러하다. 어떤 책을 읽고 나서 '새로운 세계'에 대해 자각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선다. 이 부분이 마치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묘사된다. 잔뜩 독자를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작품 내내 언급이 없다. 도대체 무슨 책이길래 그렇게 인생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지.

"책 한 권을 읽은 후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고, 사랑에 빠지고, 새로운 인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나였다."(P.63)

작품은 무심하게 흐른다. 오스만의 자각과 여학생 자난의 만남, 메흐메트와 자난의 실종.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 방랑 중 재회. 이어서 나린 박사와의 운명적 만남. 그렇다, 그것은 운명적이다.

오스만의 차가운 분노는 자난과 메흐메트가 자신을 속여서 그 책에 빠져들게 한 데 대한 것이 아니다. 덕분에 수년의 세월을 도로에서 보내기는 했지만, 자난과 행복한 동행을 하였다. 오스만은 여전히 '새로운 인생'을 갈망하고 있다. 그 책의 저자를 알게 되고, 그것의 신비로움의 꺼풀이 벗겨졌다. 그러나 그는 이를 뿌리칠 수 없다. 자신의 온몸과 영혼을 바치려고 하였던 그것. 그것을 쉽사리 놓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는 시골에서 개명하고 평온한 삶을 영위하는 또다른 오스만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바라마지 않는 모습이었으므로.

"그의 인생이 이미 자리를 잡았고 책 속의 표현처럼 '정상 궤도에 들어섰음'을 나는 보았다...내면의 평화를 찾아냈던 것이다...그가 찾았던 균형의 평온은 그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시간을 주었다."(P.286)

나린 박사는 다소 비극적인 동시에 희화적이다. 서구화, 개방화에 저항하여 전통적 가치와 고유성을 옹호하려는 그와 대리점주 모임의 노력은 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는 그 책을 읽고 새로운 인생을 구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자신의 아들이 변한 게 그 책이라고 판단하고 말이다.

"모든 것이 단지 하나의 책이 만들어 낸 것일까? 그 책은 거대한 음모의 아주 작은 도구일 뿐이야."(P.181)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유의 속임수에 넘어가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생각하고, 한두 권의 책을 가지고 '모든 세상을 혼란케 한다는 것'을..."(P.184)

나린 박사의 집에서 헤어진 여학생은 결혼하고 독일로 간다. 오스만도 일상으로 복귀하여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리고 은둔한 오스만을 죽인다. 14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찾아다닌다. 그리고 '새로운 인생' 캐러멜 창안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천사를 만난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생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그토록 고대하던 찰나와 영겁의 시간.

이 모든 굴곡을 작가는 극적으로 전개하지 않는다. 세부적인 묘사를 피하고 슬렁슬렁 넘어간다. 그 부분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물의 물결마냥 담담히 흘려보낸다. 그것이 인생이라고.

새로운 인생. 파묵이 말하는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새로운 인생은 따로 없는지 모른다. 아니면 일상의 나날이 새로운 인생 자체일 수도 있다. 아니면 떠도는 길 위에서 마주치는 또는 방황을 멈추고 이제는 고요히 정착하는 모든 게 새로운 인생인가? 어쩌면 파묵은 이 모든 열려진 결말(open ending)을 우리가 생각해 보도록 권유하고 있나 보다. 그게 그의 의도라면 그는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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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2.1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런던 스케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2
도리스 레싱 지음, 서숙 옮김 / 민음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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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을 한 번은 봐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구입하였다. 독서 후 소감은 우선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것.

요즘 국내에서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가 다가오면 언론에서 괜한 기대감을 부추긴다. 국내 작가도 수상할 때가 되었다느니, 이번에는 아시아권이 차례가 되지 않겠냐 등등. 일부 작가도 부화뇌동에서 괜히 들썩거린단다. 가소롭다. 노벨문학상이 대륙별, 국가별 안배로 정해지는 나눠먹기라도 되는지. 그렇게 노벨상을 받고 싶으면 뛰어난 작품을 쓰던가. 솔직히 모 시인이 후보라는 사실조차 나는 아연해지고 만다. 이름은 자자하지만, 그 시인의 대표작이 뭐더라.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난 뭐지?

이 단편 모음집에서 레싱의 특질을 파악하는 건 무리라고 본다. 장편 작가에게 단편은 말 그대로 개인과 사회의 편린을 살짝 비쳐주는 수준이므로. 그럼에도 레싱을 통해 한번도 가보지 못한 런던의 속살, 런던의 사람사는 내음을 얼핏 맡았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문체는 간결하고 화려하지 않다. 언뜻 평범하지만 오히려 고졸(古拙)하다는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노작가의 담담함과 사물을 바라보는 여유로운 시각이 배어나온다. 제목 그대로 관찰과 스케치를 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도 작가의 눈을 빌려 런던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아,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사는 방식은 우리랑 별 차이없네, 이런 동질감은 안도감을 자아낸다.

'데비와 줄리'에서 미혼모가 되어 낳은 아기를 몰래 버리는 어린 여성. 우리나라도 점차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문제다. '참새들'과 '공원의 즐거움'은 스케치라는 느낌에 가장 부합한다. 자잘하고 소소한 일상의 장면들, 왠지 웅장하고 극적이어야 대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시대에, 진실은 작고 단순한데 있다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공명한다.

'흙구덩이'와 '진실'은 헝클어진 부부관계를 보여준다. 이혼이 전혀 낯설지 않은 사회. 전자는 그래도 심리적 타격이 여전히 극심함을 나타낸다. 너무나 닮았기에 상반되는 여성에 이끌려 가정을 떠난 남자. 하지만 이제는 다시금 편안함이 소중하게 다가와 전처에게 다가온다. 전처의 선택은? '진실'은 이혼 부부와 각각의 재혼 파트너의 관계를 다룬다. 이혼하면 원수처럼 지내는 것은 대체로 우리나라의 문화인지 이들은 친구처럼 자연스레 어울린다. 주말동안 같이 지내면서 새로운 파트너들은 한 가지 불편하지만 명확한 진실, 즉 원래 커플이 다시금 재결합하는 게 옳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 실려있는 18편은 분량상 단편과 꽁트를 넘나드는 다양함을 보여준다. 때로는 길게 어떤 것은 매우 짧게. 그야말로 스케치의 형식에 부합되게. 그렇다면 스케치의 정신은? 작가의 시선에 비친 런던 사람들, 나아가 현대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변이, 궤적이다.

사족. 적어도 단편소설의 수준은 국내가 매우 뛰어나다고 느꼈다. 우리 작가가 원래 단편에 강한지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역설적으로 국내 단편이 얼마나 역동적이고 미묘한 암시, 극적인 반전과 진지한 결론 등 재밌으면서도 탁월한지 재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네 작가들이여, 더 힘을 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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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2.7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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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을 읽고난 후 갑자기 도킨스에 궁금증이 생겨 집어들었다. 실제 책을 구입한지는 꽤 됐지만서도. 덧붙이자면 이 짤막한 소감도 읽은지 두 달여만에 적는다.

출간된 지 삼십여년이 경과하였음에도 이 저작의 내용은 도전적이다. 진화의 주체는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것이다. 인간과 같은 개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보조하는 기계라고 한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여기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몇십년 전에 이런 주장을 과학 이론으로 전개해 나가니 신심깊은 자와 보수파에서 질색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도킨스는 당당하다. 자신은 반대증거가 제시되면 언제든지 이 가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다. 요는 아직까지는 이보다 유효적절한 이론은 없다는 것. 그의 이런 굳은 믿음이 드디어 신(神)의 영역에까지 침범한 것이 신작이다.

간단한 개념만 정리하면,

1. 이기적 유전자가 곧 이기적 개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2. 유전자는 복제자, 개체는 운반자.
3. 다윈의 진화론은 개체수준에서 유전자수준으로 조정되는 전제에서 타당하다.
4. 게임이론을 통해 이타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협력적 관계 생성 및 육성이 가능하다.
5. ESS : "독립된 이기적 단위의 집합이 어떻게 해서 단일 조직화된 전체를 닮게 되는가를 비로소 분명히 가르쳐 줄 것이다."(P.166)
6. Meme(밈) : 문화적 유전자

이 책은 분명 자연과학서다. 하지만 뛰어난 과학서가 으레 그러했듯이 기다란 인문학적 스펙트럼을 흩뿌리고 있다. 어쩌면 그 가치는 자신의 본래 영역보다도 훨씬 클지도 모른다.

진화론에 대한 거부감은 대체로 독실한 종교인일수록 큰 편이다. 사람이 어찌 원숭이의 후손일 수 있겠는가? 맞다. 사람은 원숭이의 후손이 아니라 단지 사촌일뿐이다. 선조는 미약하기 이를데 없는 단세포 생물이리라. 태초에 신이 있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논리는 쉽지만 근원적 약점이 있다. 신과 같은 완전체는 누가 창조하였는가? 그냥 저절로 있었다는 주장은 회의론자의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도킨스는 용의주도하다. 유전자의 맹목적 이기성을 제시한 다음, 그것이 공멸이 아닌 공생으로 귀결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개체간에는 게임이론을, 집단간에는 ESS 개념을 도입한다. 미워하지만 대의를 위하여 연합하는 인간들처럼 유전자와 개체는 그렇게 협력한다. 그리고 인류는 진화한다.

개정판은 끝장에서 잠시 후속작 <확장된 표현형>울 소개한다. 이기성이 유전자와 개체 수준을 뛰어넘어 타 개체를 조종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밈을 빼놓으면 안 된다. 아직은 정착된 개념은 아니다. 영원히 주변을 맴돌 수도 있다. 그것은 생물학적 유전자만큼 직관적이지는 못하다. Gene 이 생물학적/유전학적 정보를 복제한다면, Meme 은 문화적 정보를 복제하여 후손에 남긴다. 제법 그럴싸하지만 아직은 미심쩍다.

유전자는 이기적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이라는 개체는 단순한 운반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타고 있는 복제자를 압도하여 타고난 이기성을 희석시키는 역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살은 유전자적 차원의 사건인지 아니면 개체수준의 사건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도킨스의  공헌은 분명하다. 비논리성이 존중받는 예술과는 달리 과학의 영역에서 적어도 합리적 사고의 세계에서는 그의 친구 이기적 유전자의 존재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인간 인식의 폭과 깊이를 확장시켜준다면 말이다. 훗날 탁월한 대체이론이 등장한다면 그때 은퇴시켜도 된다. '불편한 진실'이란 용어는 앨 고어가 특허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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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3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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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뇌리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종교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맹렬한 찬반의 논의가 봇물 터지듯 하던 한때가 있었다. 불과 몇 달 전의 일이다.

논의의 중점은 먼저 한 종교가 다른 종교에 비하면 우월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에 대해서다. 비록 내전으로 피폐해져 있다고는 하나 절대적인 이슬람 신앙국가에 기독교를 포교(대외적으로는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올바른 방향인가? 그들의 종교는 무시하고 정복할 대상인가 아니면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종교상대론의 입장을 취할 것인가 등등.

또한 포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택하였을 경우라도 안전상의 중대한 위협이 예기되어 정부에서 여행금지를 권유하는(당시에는 강제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 없었음을 상기하라) 상황에서 그렇게 지침을 무시하면서 강행하는 게 올바른 태도인가도 쟁점의 하나였다.

결국 인질이 된 그들을 풀려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정부는 테러단체와 협상을 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공식적으로는 몸값은 없었다고 하지만 그걸 누가 믿으랴)하는 금전적 손해와 아울러 국제적 수모를 감수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위해 소모된 국민의 혈세에 대해 일반 국민들이 납득할 것인가? 비록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과 언론은 종교계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인터넷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그리도 광신적 신앙에 대해서는 종교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되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은 그 시점에 절묘한 타이밍을 갖고 등장하였다. 비록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내가 이 책을 읽고 나서도 한 달이 넘도록 간단한 인상조차 남기지 못하였던 것은 종교 자체에 대한 공격인 도킨스의 주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스스로도 쉽사리 방향을 정하지 못한데도 연유가 있다.

저자가 관심을 갖는 종교는 유대교와 이에 연원을 둔 기독교(개신교/가톨릭)와 이슬람이다. 물론 출생배경을 고려하면 기독교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신랄함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도킨스는 오늘날 미국을 중심으로 근본주의 종파가 득세하면서 소위 창조론이 과학의 옷을 입고 세력을 늘리기 시작하는 현상을 우려한다. 양의 껍질을 쓴 늑대처럼 교묘하게 과학으로 위장한 채 사람들의 인식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상당 부분은 진화론을 옹호하고 창조론의 허구성을 설파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진화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반대되는 증거가 나오면 언제라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현재로는 이를 지지하는 증거만이 발견되고 있으니 여전히 진화론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

그는 광신적인 종교가 문제라는 세간의 주장을 타파한다. 정상종교이건 광신이건 구분 없이 종교 자체가 수많은 인간문제의 원인이다. 아프간인도 종교로 인하여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십자군과 수많은 종교전쟁 등이 이를 다 입증한다. 911사건도 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팔레스타인 사태도 종교가 깊이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종교 없는 세상’이 되면 최소한 이로 인한 상당한 갈등과 분열이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종교의 순기능이 있으니 유구한 세월에 스러지지 않고 인류에게 남아있는 게 아닐까라는 소박한 반문이 있다.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뭔가 경건하고 모범적이며 존경할 만한 인품의 소유일거라는 환상이 내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내가 비종교인이더라도 말이다. 저자는 그건 인간 자신의 도덕률에 따르면 된다고 한다. 살인을 하면 안 된다, 거짓말은 나쁘다, 불쌍한 이를 도와야한다 등은 종교적 가르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우러나온 본연의 가치다. 어찌 보면 공맹(孔孟)의 가르침과 닮았다는 느낌이 든다.

마약중독자는 마약의 해로움을 의식 못한다. 애연가에게는 담배의 해독을 아무리 귀 아프게 설교해도 소용없다. 그들은 이미 너무 깊이 빠져 있다. 이성적인 이들은 마약과 흡연, 지나친 음주 등을 멀리하고 있으므로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일단 믿고 몰입하면 맹목적이 되는. 그것이 비록 벼랑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멈추지 못한다.

그래서 도킨스는 은인자중하고 있는 세계의 무신론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요청하고 있다. 잘못된 믿음을 배격하고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만국의 무신론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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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10.5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