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레스크 소설 대우학술총서 구간 - 문학/인문(논저) 7
이가형 / 민음사 / 1997년 9월
평점 :
절판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 이후 변화된 스페인의 사회 풍조는 세계문학사에 피카레스크 소설이라는 개성적인 장르로써 기여하였다. 보통 악한(惡漢) 소설로 일컬어지는 피카레스크는 스페인에서 유래하여 곧 서구 각지로 퍼져나가 근현대의 가장 독특한 소설 장르가 되었다.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기다란 수명을 갖지는 못했지만, 피카레스크적 특성을 차용한 문학을 제외하면 서양문학은 매우 빈약해진다.

몇 편의 스페인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피카레스크에 흥미가 생겨 학술적 관점에서 접근해 보고자 이 책을 펼친다.

저자는 피카레스크 소설의 역사적 흐름을 출현, 발전, 부활로 나누어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에서 처음 나타난 장르가 국경을 넘어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로 퍼져 나간 과정을 살핀 후, 20세기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저자의 서술은 단지 이론적 관점에서 딱딱하게 기술되지 않고, 각 과정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들의 상세한 작품 분석으로 이어지고 있어 이론적 배경이 없는 독자라도 충분히 저자의 견해를 좇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작품을 모두 열다섯 편이다.

1부에서는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 알레만의 <구스만 데 알파라체>, 세르반테스의 <모범소설> 중 한 편인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그리고 케베도의 <사기꾼>이 등장한다.

2부에서는 내쉬의 <잭 윌턴의 생애>, 그리멜스하우젠의 <짐플리치시무스>, 르 사즈의 <질 블라스>, 디포의 <몰 플랜더스>, 스몰릿트의 <로드릭 랜덤>,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다룬다.

3부에서는 셀린느의 <밤의 끝으로의 여로>, 벨로의 <오기 마치의 모험>, 토마스 만의 <펠릭스 크룰>, 카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분석한다.

열다섯 편 중 읽어 본 것은 단 2편이며, 이름이라도 들어본 것은 4편, 나머지는 처음 알게 된 작품이다. 더욱이 시중에서 번역본을 구할 수 있는 작품은 절반도 채 못 된다. 그만큼 국내에서 피카레스크 소설은 그리 대중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피카레스크 소설은 사실주의의 조상 격이다. 물질적 풍요는 넘쳐흐르는 가운데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면서 더 이상 문학은 멋진 기사와 아름다운 귀부인의 로망스 문학에 머무르지 않는다. 점점 더 많은 현실의 대중은 가난과 억압의 질곡에서 신음하게 된다. 그들의 원성과 절규는 자연스레 반사회적 목소리를 낳게 되면 그들의 자화상으로 소위 ‘악한’이 등장한다. 피카로는 사회 밑바닥 인물이며 그가 겪고 만나는 인물들도 자연스레 하층 계급 사람들이다. 피카레스크 소설을 처참한 사회와 개인의 삶을 가감 없이 옮기며, 기만적 허세에 물든 상류계급의 속물들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피카레스크의 주인공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방랑인의 삶이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횡적으로는 작게는 스페인 내에서 크게는 세계 각지-유럽, 미국, 아시아 등-를 떠돈다. 종적으로는 최하층에서 최상층의 인물들까지 다양하게 접촉한다. 그들이 더 이상 떠돌이가 되지 않을 때 작품도 끝을 맺는다. 그래서 대체로 작품명에는 ‘...의 생애’ 또는 ‘...의 모험’이라는 명칭이 따라붙는다.

피카레스크는 반사회적, 풍자소설이기도 하다. 작가는 피카로의 눈과 행동을 통해 악한이 되기를 권하는 사회, 악한보다도 더 악덕과 위선이 넘치는 사회를 남김없이 비꼰다. 초기 피카레스크의 주인공은 선량하지만, 생존하기 위해서 악한이 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을 둘러싼 각계각층의 인물들, 귀족, 기도사, 경찰, 상인, 사제 등은 호시탐탐 남을 등쳐먹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들의 진지하지만 허위적 삶의 정직한 기술은 자체로 사회풍자가 된다.

이렇게 남에게서 속기 전에 남을 등쳐야만 하는 사회, 즉 사회적 환경은 피카로와 피카라의 출현에 책임을 모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악한이 되지는 않는 법. 그렇다면 악한이 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피카로와 피카라는 환경적 요인으로 점차 악한으로 변모하지만, 악한의 삶과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이를 뿌리친다. 그들은 스스로 떠돌이를 선택한다. 이는 그들의 기질 자체가 악한적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우리는 피카로와 피카라에 대해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그들의 연약한 인간적 모습에 동정심을 품는다. 그들의 사회규율의 거침없는 위반과 허식에 물들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부러움을 가진다. 반면 그들의 정말로 악한다운 행위에 분노를 감출 수 없다. 이러한 이율배반적 감정은 그들이 남이 아닌 바로 우리들 자신의 숨겨진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내면에 피카로와 피카라의 태아를 지니고 산다.

피카레스크 소설이 일시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현대에도 형태를 달리하여 생존하고 있는 연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현대의 작가가 피카레스크 소설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그 소설의 다양한 가능성 때문이 아닌가 한다. 특히 피카로로 태어나는, 자아가 강한 현대인이 자기의 정체를 추구하거나 사회 문제를 다루는 소설 형태가 될 때 피카레스크 소설의 방식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P.164)

현대 사회는 개인 간의 경쟁을 부추기며, 적당한 이기심과 탐욕을 긍정적인 심성으로 권장한다. 나의 사회적 성공은 타인의 실패를 밟고 올라서게 마련이다. 기만과 폭력과 경쟁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주류가 되는 20의 사람들은 물론, 주류가 되지 못하는 80의 사람들은 언제나 일상에서 피카로와 피카라의 유혹에 노출된다. 그러기에 피카레스크는 불사의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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