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의 사랑
사포 / 한겨레 / 1991년 7월
평점 :
품절


서사시의 호메로스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시 부문에서 쌍벽으로 일컬어지는 서정시의 대가 사포. 일찍이 플라톤은 그녀를 가리켜 열 번째 뮤즈라고 칭송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바로 그 인물, 서양철학사의 우뚝 선 거인 플라톤의 말이다.

도대체 사포는 어느 시절의 사람인가? 사료에 따르면 사포는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삶을 누렸다. 중국의 공자보다도 선대라고 하면 가히 신화적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런 그녀의 시 작품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자연적 소실 외에 중세 기독교도의 인위적 훼멸도 만만치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한 악평, 즉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점에 연유한다.

사포는 레즈비언일까? 레즈비언의 어원도 사포가 태어나서 살았던 그리스 레스보스 섬에서 유래하니 근거 없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녀의 시를 보자.

“사포여, 너의 마음은 아프겠지만
네가 원하는 그녀가 떠나게 그냥 내버려 둬라.” (P.21, 아프로디테의 송가)

“나는 그리움으로 말라가고
그녀의 사랑에 허기져 있네.” (P.26, 주지 못한 사랑)

또, 다음의 시 구절은 어떠한가?

“부드러운 침대 위에서
팔과 다리에 향기로운 향유를 발라 주었을 때
섬세한 너의 욕망은 만족했었지.” (P.37, 떠나는 아티스에게)

“그가 너와 마주 앉아
달콤한 목소리에 홀리고
너의 매혹적인 웃음이 흩어질 때면” (P.38, 질투, 일명 아티스를 위한 노래)

시구만으로 판단컨대 여성 간의 단순한 애정 차원을 넘어서는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명백한 연인의 심경이 느껴지지 아니한가.

한편, 그렇지 않은 시도 보자.

“달콤하고 상냥한 한 젊은이를
열렬히 그리워하도록
날씬한 아프로디테가
나를 꾀어 버렸어요.” (P.17, 마비)

“내 지금 바라노니
그대 여자 친구들을 돌려보내다오.
그리고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대로
나와 사랑을 맺기를.” (P.18, 조우)

여기를 보면 분명히 사포는 남성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게다가 사포의 삶을 보건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하여 딸까지 낳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사포에 대한 비난은 시기심과 유언비어에 의한 억울한 누명이 아닐까?

“가장 아름다운 여인 사포가 우리와 함께
하얀 도시 미틸레네로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딸을 거느린 어머니처럼.” (P.34, 아티스에게 4)

“저는 처녀들을 가르쳐
성스러운 신들을 섬기게 하겠습니다.” (P.156, 헤라 여신이여)

오히려 위 시구의 표현이 사포의 참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포는 젊은 여성들로 이루어진 처녀 가무단을 이끌었다. 레스보스 섬은 그리스 본토와는 달리 여성의 사회생활에 관대한 편이었다.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 대한 보수주의자 및 후대 기독교도의 반감이 분방한 애정 표현으로 가득찬 시 내용을 곡해하도록 만든 것일 수 있다. 사포 자신의 말에 따르면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P.93, 이별)을 세진(世塵)에 물든 눈은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사포는 신과 영웅시대를 마감하고 인간이 당당한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는 시기에 걸맞는 서정시의 선구자다. 이제 올림포스 신은 사람의 머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성하게 빛내는 조연으로 물러서게 된다.

사포가 노래하는 대상은 다양하다. 무엇보다도 사랑, 그리고 청춘, 결혼, 삶의 예찬. 하지만 나이 들어서는 더 이상 사랑의 열병에 빠지는 것을 회피한다.

“부끄러운 욕망으로 나를
비틀거리게 하는 아프로디테가” (P.90, 자신에게)

“그대를 사랑하기엔 너무 벅찹니다.
젊은 그대와 함께 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를 먹었습니다.” (P.95, 너무 늦은 사랑)

“사랑은 이제 나에게는
꿀도 아니고 꿀벌도 아닙니다.” (P.95, 사랑을 거절하며)

이제 세월의 흐름과 죽음이 사포의 시 세계를 사로잡는다. 때로는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끝까지 삶을 긍정한다. 노쇠와 죽음마저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나 또한 계속 늙어가지만
나는 화려하고 찬란한 것을 사랑하네.
이것만이 나의 몫이요,
태양신처럼 빛나고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라네.” (P.100, 세월)

“그리고 이제 나도 망각 속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가리라.” (P.131, 망각)

사포의 명성은 단지 그녀가 개인의 감정을 노래했다는 데 국한하지 않는다. 그녀 말고도 당대 및 후대의 많은 시인들이 인간과 사랑을 개성적으로 노래하였다.

“사포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그녀의 시가 가진 특징은 감정의 격렬함과 솔직함,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분석, 절묘한 언어선택과 절제의 아름다움,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구성에 있다.” (P.198)

작품해설에 나오는 이러한 평은 실로 적확하다. 수백여 편에 달한다는 그녀의 시 가운데 그나마 비교적 온전히 전하는 것은 ‘아프로디테의 송가’, ‘아프로디테의 사원에서’, ‘질투’, ‘아나크토리아를 위한 노래’가 전부이지만, 단편에서도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격정적인 감정(’질투’와 ‘아나크토리아를 위한 노래’를 보라!)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표현의 참신성은 단순하고 소박함과 맞물려 현재의 시각에서도 전혀 진부함을 느낄 수 없다.

“시원한 샘물은 사과나무 가지 사이로 흐르고
장미는 도처에 그늘을 드리우고,
흔들리는 잎새들은 나른한 졸음을 선사합니다.” (P.147, 아프로디테의 사원에서)

“아도니스가 깨어날 시간은 오지 않습니다.
봄은 아직 말이 없고 꽃은 피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P.152, 아도니스의 죽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인 2011-12-12 0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이 너무 읽고싶어 백방으로 찾다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두고두고 보고 싶은 마음에 제 블로그로 담아갔는데 혹시 내키지 않으신다면 말씀해주세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