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리콘 -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
페트로니우스 지음, 강미경 옮김, 노먼 린지 그림 / 공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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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개그맨 최양락의 전성 시절, 로마황제 네로 역을 맡은 코너가 꽤 인기를 끌었다. 이때 궁정에서 비교적 건전한 상식과 비판의식을 가진 신하에 페트로니우스가 있었는데, 네로로부터 구박과 괄시를 받고는 하였다.

그렇다. 바로 그가 이 글의 저자라고 한다. 서기 1세기의 역사 속에 화석화된 인물이 아닌 자신이 남긴 글로 생생히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말이다.

해설에 따르면 현존 원문은 전체 20권 내외 분량 가운데 14권에서 16권의 일부에 해당한다고 한다. 완결된 작품으로 조망하기에는 앞뒤는 물론 중간에도 단락이 많이 있어 여의치 않으므로 오히려 남아있는 내용 자체의 미학을 즐기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일단 궁금한 것은 페트로니우스가 이런 작품을 남긴 의도이다. ‘품위 판관’으로 네로 황제마저도 인정해 마지않던 그의 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천박하기 조차한 내용을 담고 있다. 등장인물 중에서도 긍정적인 인간상이라고 할 만 이를 발견할 수 없다.

만약 이 작품의 내용이 작가의 기이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고 당대 로마 민중의 삶의 이면을 묘사한 것이라면 작가는 풍속화가의 자질이 뛰어나다 할 것이다. 신과 영웅이 문학의 주인공이 되던 시기, 작가는 대담하게도 시정잡배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것도 모자라 비정상적인 성적 사랑의 관계가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추동력이 되고 있다.

이 <사티리콘>은 고전 소설의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후대의 <황금 당나귀>보다 시대를 훌쩍 앞서는데 그치지 않으며, 거기에 결여된 악한소설적 면모가 확연하다.

주인공 엔콜피우스는 동행인 미소년 기톤과 동성애적 사랑에 집착하고 있다. 기톤을 사이에 두고 친구 아스킬토스와 다툼을 벌이기도 하며, 늙은 시인 에우몰푸스와도 대립한다. 그는 물건과 돈을 훔치기도 하며, 살인도 저지르며 용감한 척하지만 겁쟁이 기질도 다분하다. 부잣집 유부녀 키르케와의 정사 도중에는 성적 무능력이 되어 남근 신 여사제들의 치료를 받기도 한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결코 통상적인 주인공의 모습은 아니다.

작품은 엔콜피우스 일행이 여행 도중에 머무르다가 겪는 소동과 에피소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공간적 배경도 푸테올리에서 타렌툼으로 가는 배, 다시 크로톤으로 옮겨진다.

푸테올리에서는 남근 신 프리아푸스의 여사제 콰르틸라 무리에 끌려가 방탕한 의식에 동참한다. 졸부 트리말키오의 연회에서 당대 로마 부유층의 호사스러운 연회 장면을 눈앞에서 목도할 수 있다. 세세한 묘사는 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다. 타렌툼으로 가는 배에서 맞닥뜨린 선장 리카스와 트리파이나가 어우러진 장면은 또 어떤가? 하인으로 분장하고 크로톤에서 보내는 삶 등.

이 작품에서는 제정 로마 초기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마 사회의 구석구석이 그대로 눈앞에 드러난다. 작가가 진정 페트로니우스가 아닐지라도 이러한 글을 남길 수 있는 이라면 웬간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은 당대 사회에 대한 풍자소설인 동시에 풍속소설이기도 하다.

완전하지도 않으며, 내용도 천박하고 음란한 이 작품의 묘미는 바로 그 외설성과 천박성에 있다. 세상은 신실함과 고상함만으로 완전해지지 않는다. 사회 계층의 절대 다수는 평범한 시민 계급과 천민 계급이 차지한다. 그들의 가치관은 지배층의 거짓 엄숙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들은 꾸밈없이 솔직하며 자연스럽다. 이 글에서는 귀족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트리말키오의 연회도 결국 모방에 불과하다. 이 모방이 실제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 아니면 심히 왜곡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연회 관습, 그들의 남성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시장과 여관에서, 공중목욕탕을 오가는 평범한 로마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흔한 분류로 나누자면, <사티리콘>은 순수 문학이 아닌 통속소설이며, 영화로 치자면 B급 영화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는가? 사람들은 대중예술에 보다 열광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포르노가 겉으로는 쉬쉬하지만 안 본 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의 울고 웃는 일상의 모습은 대중문화의 변천에서 보다 용이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도덕성과 예술의 순수성을 중시하는 이에게 이 작품의 일독을 굳이 권하고 싶지는 않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해설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해설에서 알 수 있듯이 <쿠오바디스>의 작가가 창작에 참고하였고, <위대한 개츠비>의 초판본 표제가 <트리말키오>라는 점, 시인 엘리엇과 소설가 헨리 밀러가 경애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냥 무시하기 어려운 일면이 있다. 게다가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이를 다룬 영화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디스커버리 사의 다큐멘터리 <로마>의 중요한 대본 자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대 로마 사회의 일상을 이해하고 재구성하는데 이 작품은 매우 중요하며, 여전한 음란성에도 불구하고 계속적 관심을 끄는 연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트리말키오는 졸부의 사치는 고대와 현대가 차이가 없음을 입증하는 자료 역할을 한다.

조금 낯설고 황당하고 어이없지만, 심각성과 진지함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책장을 넘기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게다가 ‘노먼 린지 일러스트판’이라는 특별 문구가 말해주듯이 20세기 대표적 삽화가의 거의 백편에 이르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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