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서정시선 - 서정시는 어떻게 쓰여지는가
아르킬로코스 외 지음, 오자성 옮김 / 청개구리아카데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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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과 그들의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책이다. 저자가 십여 년 전에 펴낸 사포 시 전집에 이은 후속작이기도 하다.

일단 서양 문학사는 서사시에서 출발하여 서정시를 거쳐, 희곡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서사시에서 서정시로 이어지는 단계는 인류가 신과 영웅의 인식을 뛰어넘어 인간 자체를 주체적으로 인식하였음을 증명한다. 이는 일순간에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회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식의 성장의 결과이다.

“서정시는 이 자유로운 몸에서 태동하는 것이다. 신으로부터 전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몸, 세속화된 몸으로부터 서정시가 태동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서정시의 언어는 세속화된 몸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P.20)

“도시적인 경제적 개인주의 생활양식과 자유 경쟁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정신생활의 모든 분야에서도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세계관이 표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P.21)

서정시는 자유롭다. 서정시가 다루는 소재는 제한이 없다. 사랑, 인생, 사물, 우주 등은 물론 감정과 행동의 모든 측면을 거리낌 없이 포괄한다. 더 이상 신과 영웅의 위대한 업적에 억매일 필요가 없다.

“그들 모두는 독특한 목소리와 색조를 지니고 변혁기였던 당대의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험에 찬 생활을 그려내었다. 그들은 통상에 참여해 여행하고, 전쟁에 종군하고, 방패를 버리고 전쟁터에서 달아나기도 하고, 혁명에 가담하고, 사랑하고 질투하였으며, 노래로써 동료 병사를 독려하거나 전사자를 기리고, 입법을 하고, 올림픽 우승자를 찬양하였으며, 여행을 하고, 동료들의 성격과 행동을 비난하기도 했다.” (P.23)

최초의 서정시인은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다. 호메로스와 거의 동시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이미 후대 시인들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신의를 배신한 자에 대한 비난(‘배반’, ‘배신’)과 결혼 약속을 깨뜨린 여자친구의 아버지에 대한 비난(‘여자친구의 아버지에게’)이 토로되고, 성(性)에 대한 거침없는 표현(‘성기’, ‘성급한 사랑’, ‘창부’, ‘남성의 기관’)과 음주 예찬(‘주신 찬가’, ‘만취’)이 당당하다.

티르타이오스(Tyrtaios)는 애국시 내지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독전(督戰)시를 썼다. 개인적 견해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한 것인데, 아무래도 순수시보다는 목적시 성격이 강하여 공감은 어렵다.

세모니데스(Semonides)는 인생과 여성에 대한 시가 두드러진다. 인생의 어두운 면을 부각하면서 삶의 유한성을 절절히 읊는다(‘인생’,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 ‘삶과 죽음’, ‘죽음 이후’). 한편 ‘여자의 기질’은 비교적 장시인데, 당대적 관점에서도 반(反)여성시라고 하겠다. 시에서 그는 여자를 암퇘지, 암여우, 암캐, 진흙, 바닷물, 당나귀, 족제비, 암말, 유인원, 꿀벌로 비유하여 분류하며, 꿀벌형 여자에 대해서만 긍정한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역병에 불과하다.
“여자보다도 더 나쁜 역병은 없다네.” (P.59)

밈네르모스(Mimnermos)는 청춘 예찬과 노쇠에 대한 슬픔을 주로 그리고 있다.

알크만(Alkman)은 사랑, 인생, 자연 등의 다양한 소재를 시의 제재로 삼고 있는데, 심지어는 음식마저도 시화(詩化)한다(“알크만의 식성”).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대표작은 ‘처녀합창단을 위한 노래’라는 합창시다. 내용은 평범하지만, 형식의 독창성 면에서 흥미롭다.

알카이오스(Alkaios)는 사포와 동시대 시인이다. 참주 피타코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이후 그를 맹비난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혁명시, 투쟁시 외에 추방된 이후 망명객의 쓸쓸한 처지를 노래한 시들도 제법 있다. 이 시들에서는 자기 처지에 대한 탄식, 참주에 대한 분노, 신세를 달래기 위한 음주(‘치료약’, ‘창문’, ‘취기’, ‘삼인일조’, ‘순번’)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는 참주 지배하의 레스보스 섬을 배에 비유(‘추방지에서’, ‘구조’)하고 있는데, 그가 비난하는 피타코스가 후세에서는 그리스의 7대 현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니 시와 역사의 아이러니다.

사포(Sappho)에 대하여는 이미 단상을 기록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다시 읽어도 사포의 시는 시대를 초월한 통시대성을 지니고 있어 여전히 감정이 절절하고 현대적이다.

솔론(Solon)은 입법가답게 정치에 관한 제재를 다루고 있다. ‘지도자를 선출할 때’에서는 잘못된 지도자 선출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변호’에서는 자신의 업적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한 사람이 너무 높이 올라가고 나면 그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네.”하고 독재에 대한 경고(‘독재의 징조’)도 아끼지 않는다. 한편 ‘준법’에서는 악법도 법이라는 언뜻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연상시키는 구절이 나와 이채롭다.

포킬리데스(Phokylides)는 대부분의 시에 “포킬리데스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라는 표현을 삽입하고 있어 강한 자의식을 드러내며, ‘아내를 고르는 어려움’은 세모니데스의 시 내용과 연결되어 흥미로우며, ‘현자의 외출’은 현자인 체 하는 부류의 사람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보여준다.

스테시코로스(Stesichoros)는 합창시와 장시가 대표적이라고 하는데, 이 시선에서는 단시만 수록하여 아쉽다.

이비코스(Ibykos)는 소위 연애시의 대가라고 하겠다. ‘늙은 경주마처럼’, ‘사랑의 계절’ 등 수록된 시편으로는 그의 온전한 면모 이해에 한계가 있다.

히포낙스(Hipponax)는 귀족 계층의 시인과 다르게 하층민의 불우한 처지를 반영하고 있어 이채로운데, 속어와 비어(‘엿 먹어!’, ‘불행의 표지’)를 거리낌 없이 시 속에 사용하고 개인적 원한에 의한 비난(‘악당 부팔로스’, ‘부팔로스의 여자’)도 숨기지 않는다.

아나크로온(Anakreon)은 구애와 사랑, 늙음(더 이상 사랑이 불가능함에 대한 아쉬움), 술 등 사랑과 낭만의 시인이다. 유사한 제재를 다룬 시인 가운데는 가장 뛰어나다고 하겠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철학자인 탓인지 시의 성향도 매우 이성적이다. ‘신들의 초상’과 ‘향연의 주제’는 신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물과 바람’과 ‘무지개의 근원’은 자연현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를 살다간 시인답게 죽은 용사를 위한 송가를 여럿 남기고 있다. 전쟁은 죽음과 아울러 인간의 숙명, 유한성 등을 깊이 되새기게 한다(‘변화’, ‘인간의 운명’, ‘반신’, ‘유한한 인간’, ‘시간’ 등).

테오그니스(Theognis)는 키르노스에게 주는 교훈시로 유명한데, 이 시에서 그는 삶의 지혜, 도덕률, 교우관계, 처세 등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또한 “고귀한 사람이 매도당하고, 천한 사람이 존경받는”(‘시민의 변화’) 당대의 현실에 대해 비판과 우려를 품고 있다. 특히 교우관계에 대한 시들(‘교우’, ‘진정한 친구’, ‘우정’ 등)은 요즘도 유효하다. 한편 그는 키르노스에 대한 불평도 늘어놓는데, 그가 자신을 존경하지 않으며 거짓말을 한다(‘키르노스에 대한 불평’)는 것이다. 수용자의 거부감을 극복하는 과제는 교훈시의 한계임을 깨닫게 한다.

핀다로스(Pindaros)는 올림픽 경기와 피티아 경기의 우승자를 위한 송가를 많이 지었다. 그만큼 당대에 인정받는 시인이었다. 하지만 이런 송가는 공식적이고 의례적인 것이라 핀다로스의 내밀한 참모습을 파악하기 곤란하다.

바킬리데스(Bakchylides) 역시 올림픽 경기 우승자를 위한 송가를 제법 남겼다는 점에서 핀다로스와 유사하다. 그 외에 테세우스, 헤라클레스 등 신화적 인물을 내세운 시들도 있지만 역시 진면목을 알기 어렵다.

프락실라(Praxilla)는 여류시인으로서 사물에 대한 시를 썼는데, 수록된 4편의 시는 너무 적어서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플라톤(Platon)은 유명한 철학자로서 그의 시들은 ‘사랑하는 알렉시스’나 창부 레이스‘처럼 표현 수법상 흥미로운 점도 있지만 대체로 평이한 느낌을 안겨준다.

역자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현대의 한국시에 주는 의미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것은 서정시가 필히 갖추어야 될 어떤 내재적 이념의 회복이 아닐까 한다.” (P.248)
우리 현대시는 양적인 면에서 폭발적 성장을 거듭했지만, 질적인 측면에서도 상승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여기 소개된 시들을 겉핥기나마 읽으면서 갖는 느낌 또한 역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시는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서정성과 소박성을 지니고 있음이다. 그것이 수천 년의 시간의 경과에도 박제물이 되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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