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 2000년을 이어온 작업의 정석
오비디우스 지음, 김원익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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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로마시대 초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의 또 다른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시의 형식을 택하고 있는데, 역자는 온전한 산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원전의 정확한 전달보다는 내용의 전달에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과 작가의 다른 작품 목록을 통해 보건대,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겠다. 그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에는 <사랑의 노래>와 <여걸들의 서한>, <여성의 얼굴 화장법> 등 요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이색적인 분야에 글을 남기고 있다.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면, 에리히 프롬의 동명의 저작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롬의 글이 철학적이라면, 오비디우스는 실용서에 가깝다. 전 3권으로 구성되는데,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기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이 그것이다. 표제만 보더라도 당장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구가 물씬 당기게 만든다.

현대에도 사랑과 연애의 기법을 다룬 책들이 난무하는데, 이 책은 이런 장르의 선구격이라고 하겠다. 시대적 배경 상,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이 소개되는데, 작가는 사랑의 기술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이의 증빙을 신화에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더욱 흥미롭게 작품을 읽어 나갈 수 있지만, 역으로 고전 신화를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영화나 미드로 유추하건대 당대 로마 사회는 현대 못지않게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임을 알게 된다. 간통은 처벌받지만 작가는 교묘하게 간통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사랑 조언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노골적이고 현대에 유용한 내용도 많다.

여자는 어디에 많은가로 시작하여 여자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자의 최측근을 활용하라, 선물과 편지를 자주 보내라, 아낌없이 칭찬하라 등.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언도 있다. 즉 먼저 여자의 입술을 훔치라, 그다음은 완력을 써도 좋다.

일단 사랑을 쟁취하면 그 후로는 수성에 힘써야 한다.

“정복은 우연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손에 넣은 여자를 지키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P.120)

그래서 남자들에게 교양을 쌓고, 부드럽게 대하고, 여전히 선물과 칭찬을 아끼지 말며, 혹여라도 외도 사실은 극비에 부치라는 등을 역시 조언한다.

오비디우스가 페미니스트임은 제3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여자의 입장에서 원하는 남자를 사로잡는 기술을 제시한다. 미모를 가꾸는 것은 기본이며, 노래와 시와 춤을 겸비하고, 남자들의 애를 태우며 쉽게 허락하지 말라는 등이다.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발끈하겠지만, 보편적 남녀의 시각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사랑의 치유>는 사랑이라는 열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책을 기술한다. 한마디로 오비디우스는 사랑에 관한 한 병 주고 약 주고를 다하는 셈이다. 여자와 관련있는 사람과 장소를 마주치지 말며, 다른 여자를 빨리 만나라, 여자의 단점을 찾도록 노력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라는 등 그 방안은 요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약초나 마법에 의존하지 말고 굳건한 의지와 심경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독려한다.

이렇게 오비디우스의 사랑론은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나 요즘이나 남녀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게 그 이유인 듯하다. 하긴 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다는 취지의 글이 씌어있다고 하니 인간의 본성이야 어디 갈 것인가?

사랑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풍성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것도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말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에서 신화를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오히려 어린 헬레나를 독수공방에 방치한 메넬라오스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 헬레나는 사랑을 좇아 간 것뿐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한 아가멤논을 죽인 악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인들에 절망하였다. 십년 간 고독의 대가를 아가멤논은 무참히 외면하였고 대가를 치룬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처 페넬로페 같은 이는 오히려 자고로 드물다.

역자는 라틴어 고전의 자취를 일부러 빡빡 지우고 있다. 고전을 현대의 독자에게 가깝게 하기 위하여 진부한 외피를 벗기는 것이다. 형식보다도 내용의 불멸성이 고전의 가치를 결정한다. 게다가 자칫 딱딱하게 흐를까 봐 예문의 고전 신화에 적합한 명화 수십 점을 컬러로 삽입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장점이다.

작가가 이러한 작품을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는 타락한 자유연애주의자인가?

“독자들이여, 정조의 상징인 머리띠와 발을 감싸는 레이스 장식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내 책이 외설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건전한 사랑의 기쁨이나 허가받은 은밀한 행위만 노래할 것이다.” (P.43)
“사람들은 내게서 방종한 사랑의 유희를 배울 것이다.” (P.185)

그가 도덕군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는 현실을 이해하며 인정할 줄도 안다.

“부부는 평생 으르렁거리면 산다. 싸움은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오는 지참금이다. 하지만 애인에게는 언제나 듣고 싶은 얘기만 하라! 너희들은 법에 따라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에게는 사랑의 신이 바로 법이다.” (P.134)
“여자들은 남자가 부자라면 야만인이라도 마음에 들어 한다. 현대는 바야흐로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P.144)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화가 없으면 사랑은 금세 식어버린다. 사랑은 불화를 먹고 자란다.” (P.305)

이렇듯 그는 어지러운 남녀 간 관계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이를 긍정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랑의 지침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사랑이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며, 막힌 데 없는 사랑의 건강한 흐름이야말로 개인과 가정과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의 행복에 가장 중요함을 깨달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자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사랑의 기술은 소위 카사노바의 기술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기술이다.” (P.330)

그의 사랑은 남녀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한 존재다. 사랑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P.177). 사랑에 관한 한 그는 과연 선각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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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창녀 세트 - 전2권
사라 더넌트 지음, 강주헌 옮김 / 갤리온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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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어로 나도 낚이고 말았다. 하긴 누구라도 "르네상스는 한 창녀에게서 시작되었다"라는 선전문구를 보고 지적 호기심이 끓지 않았을까. 아내조차도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해인 것은 시간은 빼앗겼지만 도서관에서 대출하였기에 금전적 손실은 없었다는 정도.

내용은 광고문구와는 상당히 다르다. 르네상스 시기인 16세기 중반을 살다간 한 창녀(여기서는 고급매춘부를 의미하는데)에 관한 이야기다. 굳이 관계있다면 '우르비노의 비너스'라고 알려진 티치아노의 그림이 모티브가 되었다는 점과 그래서 소설 중에 티치아노와 작가 아레티노가 등장한다는 사실.

그럼 순수하게 작품을 들여다 보자. 여기서도 주인공은 창녀 피암메타이지만 작중 화자인 난쟁이 부치노의 역할은 이보다 더 커서 부치노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로마 최고의 매춘부였던 피암메타는 독일과 스페인의 로마 침공으로 로마가 함락당하자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고생끝에 안전한 베네치아로 온다. 그리고 여기서 피암메타는 상심을 극복하고 다시금 최고의 매춘부가 되기 위하여 분투한다.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그렇다면 진부한 스토리를 탈피할 표현 기법상 탁월성이 존재하는가 하면 그도 아니다. 당시 매춘부의 생활과 업무방식이 어찌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은 유익하다. 또한 베네치아의 거리 풍모를 엿볼 수 있다는 점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소설에서 지식을 추구하는건 아닐텐데...

사라 더넌트는 2003년작  <비너스의 탄생>으로 세계적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작품은 어떤지 모르지만 작품성과 대중성에서 약간은 회의적 인식을 받게되었다. 이게 그의 다소 침체작이기를 바란다.

각설하고 르네상스의 창녀는 일본의 게이샤, 우리나라의 기생과 유사한 것 같다. 위로는 고위층에서 하층민까지 이들 계층이 상대하는 스펙트럼은 폭넓다. 그래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도 여럿인가. 다만 창녀는 왠지 저수준의 느낌을 자아내는게 보다 직설적인 탓일까? 그렇다면 봄을 파는 매춘부는 조금 고상하려나.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 비올레타도 피암메타와 유사한 직종이다. 육체를 파는 행위 보다는 사교계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그렇게 보면 과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들 해어화의 존재는 공공연한 것이다. 새삼 우리나라의 매매춘 금지 제도의 시행 성과가 생각나다. 집창촌을 압박하면서 표면상은 감소하였지만 이들이 횡으로는 주택가로 확산되고 종으로는 각종 유사 성행위 등으로 변질되고 있음은 성인이라면 다들 알고 있다. 이쯤되면 창년의 존재는 사회가 썩는 것을 방지하는 하수처리반과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우리 정부는 헤어날 길 없는 헛수고를 하는건 아닌지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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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3.2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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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도 여성 작가들이 다수 포진하였다. 이러한 여초 현상은 하루이틀 아니지만 그만큼 글을 써서 생계를 지속하기가 힘들다는 반증일 것이다.

전경린의 '천사는 여기 머문다'는 동명의 자선 대표작과 함께 연작 소설의 형태를 취한다. 두 편 모두 가정 붕괴 현상을 다루고 있는데, 소재는 약간 다르다. 전편은 유부남과 준동거생활을 하는 여자가, 후편은 남편의 폭력으로 이혼하고 국제 결혼을 고려하는 여자가 각각 등장한다. 수상작인 후편 역시 여자가 유부남인 남편과 눈이 맞아 결국 이혼후 결혼한 것이니, 이미 단초는 출발부터 존재하는 셈이다. 전편에서 여자는 남자가 "기차에서 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후편에서는 "블라우스가 피투성이"가 되었다. 즉 작중 인물은 그 지긋지긋한 인연을 정리하고 싶어하면서도 결국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 머무는 천사는 무엇인가?

공선옥의 '빗속에서' 역시 가족 문제를 다룬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완벽한 가족 해체를 보여 준다. 여기서는 가족이란 더이상 가슴 아련한 대상이 아니다. 남 보다도 못하고 억겁의 악연이 맺어준 끔찍한 관계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한창훈의 '아버지와 아들'은 구수한 사투리 속에서 역설적인 가족의 끈끈한 정을 보여 준다. 제 아무리 아웅다웅해도 가족은 해체될 수 없는 것임을 낮은 목소리로 들려준다.

김연수의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다소 이색적인 제재를 사용하고 있는데, 시위 학생을 고문하여 죽이는 데 관여한 후 숨어사는 공안 형사의 자취를 통해 인간과 인간사이를 되돌아보게 한다. 다만 장편소설에 적합한 제재를 무리하게 단편으로 축소하다 보니 어색함이 드러난다. 단편소설의 마학이 무엇인가를 되새김할 필요가 있다.

권여선의 '약콩이 끓는 동안'은 낯설다. 교통사고당한 노교수의 연락책을 맡는 조교의 교통사고가 주는 연속적 재앙이 우선 낯설다. 우물쭈물 생의 투쟁성이 박약한 조교가 자신과 학교와 노교수에 부딫히는 관계 설정이 낯설다. 불편함 몸으로 조교, 아들들, 가정부 등 주위사람에 대한 노교수의 삐딱함이 낯설다. 아버지의 사고소식에 집안으로 들이닥쳐 죽치다가 조교의 사고 이후로 훽 나가버리는 아들들이 낯설다. 가정부와 안주인의 분위기를 동시에 풍기는 건장한 가정부도 낯설기는 매한가지다. 하지만 이 모든 낯선 상황을 낯설기 그지없게 이끌고 나가는 작가가 무엇보다도 내게는 낯설다.

천운영의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근원적 생명력 회복에 대한 갈구를 담아내며, 진실한 삶의 이해를 촉구한다. 이 작가는 특이한 소재를 다루는데 매료된 듯 하다.

편혜영은 '첫번째 기념일'에서 한 시골 택배 기사를 통해 기약없는 공허한 삶의 굴레를 보여주려 한다. 그다지 가슴에 다가오지는 않지만. 타인의 물품을 개봉하고 사용하는 그에게는 관음증과 페티시즘의 자취가 슬쩍 엿보인다.

김애란은 <달려라 애비>에서 재미있게 마주친 작가다. 역시 그에게는 참신성과 재미가 묻어 나온다. 작품을 쭉 읽어 나가게 하는 능력은 요즘 많은 작가들에게 결핍된 미덕이다. 생활의 미묘한 구석을 발견하고, 예상치못한 허 찌르기에서 고음과 저음의 짜릿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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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3.22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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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셋 모옴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작이다. <인간의 굴레>와 쌍벽을 이루지만 대중성에 있어서는 그를 능가한다. 아무래도 소재의 파격성에 연유한게 아닐까 섣부른 추정을 한다. 모옴의 작품은 예전에 <인간의 굴레>를 읽어본 이후 관심영역 밖에 놓여 있었다. 썩 내 취향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 <달과 6펜스>도 <인생의 베일> 증정품으로 받지 않았더라면 손에 들었을 가능성을 장담 못했을 것이다.

모옴은 특히 영미권에 인기가 높다. 탁월한 문학성으로 정평있는 작가는 아니지만 대중성에 있어서는 남부럽지 않다고 한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언급했듯이 스토리텔러를 지향하기 때문이 아닌가싶다. 괜히 난해하고 현학적인 표현과 구조가 수준높은 문학으로 인정받는 시대에 그는 대중에 보다 다가서는 방법을 택한 댓가이다.

흔히 고갱을 모델로 했다는 이 작품은 한 증권중개인이 어느날 처자식을 버리고 예술의 길로 뛰어들고 자신의 길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나'라는 관찰자의 눈으로 추적하고 있다. 확실히 찰스 스트릭랜드는 예술 외에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영국의 부인과 처자식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떠나왔으며, 파리에서 유부녀 블란치 스트로브의 죽음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철저한 예술지상주의 구현자라고 하겠다. 오히려 그가 중연의 나이까지 가슴속의 열망을 억누르고 살았다는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스트로브 부인이 그를 꺼려했던 이유는 가슴에 뜨거운 열정을 품은 그녀에게 그는 본능적으로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존재이다. 죽을줄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의 운명을 예감한 것이다. 그녀에게 사랑은 전부를 의미하지만(그래서 더크 스트로브를 떠날 수 있었다) 찰스에게 사랑은 귀찮은 찰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찰스보다는 더크 스트로브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낀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천재를 질시하는 살리에리가 주인공보다 더 관심이 끌리듯이. 천재의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은 있지만 스스로가 천재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범인의 비애. 아내를 빼앗아간 찰스에 대한 분노를 능가하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어찌할 수없는 사랑.

찰스 사후에 찰스의 그림은 세상의 인정을 받고 찬사를 자아낸다. 무시받던 그의 그림은 일순간에 거액의 가치를 갖는 명품이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예술에 미친 괴짜에서 놀랍게도 현인으로 변모되었다.
혹자는 스위스가 인류문명에 기여한 것을 과소평가한다. 전쟁과 투쟁이 오히려 수많은 예술과 과학에 기여하였다고 높이 평가한다. 예술과 예술가는 별개로 취급하는게 원안이리라. 하지만 나와 남을 파멸로 이끌어간 예술가의 작품에 대하여 탄복하고 감탄하는게 일반화된다면 우리사회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서머셋 모옴은 유달리 인간성의 발현에 관심이 큰 듯하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성의 완벽한 현현은 헛된 망상이다. 때로는 감정에 흔들리며 이성과 감성을 오가지만 그러면서 조금씩 발전을 이루는 양태가 작가가 생각하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인 듯하다. <인간의 굴레>나 <인생의 베일>이 그러하며, 이 작품도 외양으로는 세속에 대한 예술의 찬양으로 비치지만 내게는 피할수 없는 예술의 손아귀에서 허적거리는 불행한 인간의 삶을 통해 인간사의 순탄하지 못한 측면을 부각하는 것으로 인식됨은 나의 지나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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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5.10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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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1>보다 먼저 읽은 책이지만 역시나 게으름의 소치로 이제야 몇 줄 끄적거릴 엄두가 나게 되었다. 도대체 어찌된 생활인지 돌이켜보면 아주 시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각설하고 이 작품의 최근 개봉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의 원작이다. 영화가 원제이고 번역본은 표제를 다소 각색하였다. 하긴 '페인티드 베일'하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될 테니까. 영화 개봉에다가 1+1로 <달과 6펜스>를 덤으로 준다니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으로 대개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를 언급하므로 예술성으로는 탁월하다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 아닌가 일단 편견을 품는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키티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 키워져서 미혼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사랑하지도 않는 월터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찰스와 불륜에 빠진다. 그녀는 관계가 탄로나더라도 사랑과 결혼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뒤늦게 참다운 사랑을 찾는다는 나름대로의 합리화가 있었다. 그녀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그 시절 여성들은 충동과 겉치레에 관심을 가지게끔 양육되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월터를 따라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중국의 오지로 간 후 그리고 수녀원에서 봉사에 헌신하는 그들을 보면서 키티는 변모한다. 극한 상황에서 인성이 성숙해지는 것은 굳이 실존주의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무시하던 월터가 존경받을 만한 인물임을 발견하며 찰스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가 알게 된다. 남편이 죽고 홍콩으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녀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탈피하게 된다. 하지만 육체의 기억을 거부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찰스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 이성이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다는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을 작가는 키티를 통해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채색된 베일'이다.

월터는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가까이 보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키티와 결혼했다. 그는 자신이 남성적 매력이 그다지 없음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하다. 그리고 키티가 찰스와 불륜을 벌인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찰스의 진면모를 깨닫게끔 만든다. 그가 중국 오지에 간 것은 분명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을 배신한 그녀에게 애증이 교차한 그. 그는 연구와 치료에 몰두하면서 그렇게 시절을 넘기고 있었다. 만사가 잘 끝났다면 한결 성숙한 부부로 재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죽음으로 해피엔드를 맞지는 못한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욱 미워하였다. 그런 면에서 오지행은 키티에 대한 응징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는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었다.

찰스는 여기서 육체적 매력이 탁월한 속물적 인간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셋 중에서 가징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그에게 키티는 일상의 진부함에 파격적 즐거움을 안겨주는 장난감이다. 그래서 그녀가 부인과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과 법적 결합을 해줄 것을 말했을때 일거에 거부한 태도를 보인다. 불장난은 한때의 유희로 그침을 그는 알고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다. 월터가 죽은 것에 그는 무관심할 것이다. 키티가 홍콩을 떠나니 그는 잠시 아쉬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곧 그는 새로운 즐길거리를 찾고는 소소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국으로 돌아간 키티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보인 점이다. 예전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리 능력이 신통치 못한 돈이나 갖다주는 그저그런 존재였다. 이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그녀에게 늙은 아버지의 의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인간 본연으로서.

키티는 여성은 제2의 성이라고 주장한 보봐르가 주장한 사례의 전형이다.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가 그렇게 키워졌고 장려되었기에 자라났다. 개인사를 겪고 그녀는 제2의 성을 깨뜨리고 도약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미래적 여성상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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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근대나무 2011-09-0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2007.4.23 마이페이퍼에 쓴 글을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