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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 - 2000년을 이어온 작업의 정석
오비디우스 지음, 김원익 옮김 / 에버리치홀딩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변신 이야기>로 유명한 로마시대 초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의 또 다른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시의 형식을 택하고 있는데, 역자는 온전한 산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원전의 정확한 전달보다는 내용의 전달에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과 작가의 다른 작품 목록을 통해 보건대, 오비디우스는 사랑의 작가이자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하겠다. 그의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에는 <사랑의 노래>와 <여걸들의 서한>, <여성의 얼굴 화장법> 등 요즘 시각에서 보더라도 매우 이색적인 분야에 글을 남기고 있다.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면, 에리히 프롬의 동명의 저작이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프롬의 글이 철학적이라면, 오비디우스는 실용서에 가깝다. 전 3권으로 구성되는데,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기술,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기술이 그것이다. 표제만 보더라도 당장 페이지를 넘기고 싶은 욕구가 물씬 당기게 만든다.
현대에도 사랑과 연애의 기법을 다룬 책들이 난무하는데, 이 책은 이런 장르의 선구격이라고 하겠다. 시대적 배경 상, 그리스 로마 신화가 많이 소개되는데, 작가는 사랑의 기술을 하나씩 소개하면서 이의 증빙을 신화에서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더욱 흥미롭게 작품을 읽어 나갈 수 있지만, 역으로 고전 신화를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영화나 미드로 유추하건대 당대 로마 사회는 현대 못지않게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임을 알게 된다. 간통은 처벌받지만 작가는 교묘하게 간통을 부추기는 듯한 발언을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사랑 조언은 매우 구체적이며 실용적이면서도 노골적이고 현대에 유용한 내용도 많다.
여자는 어디에 많은가로 시작하여 여자를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자의 최측근을 활용하라, 선물과 편지를 자주 보내라, 아낌없이 칭찬하라 등. 현재도 논란이 되고 있는 조언도 있다. 즉 먼저 여자의 입술을 훔치라, 그다음은 완력을 써도 좋다.
일단 사랑을 쟁취하면 그 후로는 수성에 힘써야 한다.
“정복은 우연히 이루어질 수 있지만, 손에 넣은 여자를 지키는 데는 기술이 필요하다.” (P.120)
그래서 남자들에게 교양을 쌓고, 부드럽게 대하고, 여전히 선물과 칭찬을 아끼지 말며, 혹여라도 외도 사실은 극비에 부치라는 등을 역시 조언한다.
오비디우스가 페미니스트임은 제3권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여자의 입장에서 원하는 남자를 사로잡는 기술을 제시한다. 미모를 가꾸는 것은 기본이며, 노래와 시와 춤을 겸비하고, 남자들의 애를 태우며 쉽게 허락하지 말라는 등이다.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이라면 발끈하겠지만, 보편적 남녀의 시각에서는 제법 그럴듯한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사랑의 치유>는 사랑이라는 열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을 위한 구제책을 기술한다. 한마디로 오비디우스는 사랑에 관한 한 병 주고 약 주고를 다하는 셈이다. 여자와 관련있는 사람과 장소를 마주치지 말며, 다른 여자를 빨리 만나라, 여자의 단점을 찾도록 노력해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라는 등 그 방안은 요즘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는 약초나 마법에 의존하지 말고 굳건한 의지와 심경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도록 독려한다.
이렇게 오비디우스의 사랑론은 2천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당시나 요즘이나 남녀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게 그 이유인 듯하다. 하긴 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없다는 취지의 글이 씌어있다고 하니 인간의 본성이야 어디 갈 것인가?
사랑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독자라도 이 책은 일독의 가치가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풍성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그것도 딱딱한 문체가 아니라 흥미로운 이야기체로 말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시각에서 신화를 재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오히려 어린 헬레나를 독수공방에 방치한 메넬라오스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 헬레나는 사랑을 좇아 간 것뿐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한 아가멤논을 죽인 악녀 클리타임네스트라는 어떠한가? 그녀는 아가멤논이 전리품으로 데려온 여인들에 절망하였다. 십년 간 고독의 대가를 아가멤논은 무참히 외면하였고 대가를 치룬 것이다. 오디세우스의 처 페넬로페 같은 이는 오히려 자고로 드물다.
역자는 라틴어 고전의 자취를 일부러 빡빡 지우고 있다. 고전을 현대의 독자에게 가깝게 하기 위하여 진부한 외피를 벗기는 것이다. 형식보다도 내용의 불멸성이 고전의 가치를 결정한다. 게다가 자칫 딱딱하게 흐를까 봐 예문의 고전 신화에 적합한 명화 수십 점을 컬러로 삽입하고 상세한 해설을 덧붙이고 있어 자체로도 매우 커다란 장점이다.
작가가 이러한 작품을 남긴 연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는 타락한 자유연애주의자인가?
“독자들이여, 정조의 상징인 머리띠와 발을 감싸는 레이스 장식은 하지 마라! 그렇다고 내 책이 외설을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건전한 사랑의 기쁨이나 허가받은 은밀한 행위만 노래할 것이다.” (P.43)
“사람들은 내게서 방종한 사랑의 유희를 배울 것이다.” (P.185)
그가 도덕군자가 아님은 확실하다. 그는 현실을 이해하며 인정할 줄도 안다.
“부부는 평생 으르렁거리면 산다. 싸움은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오는 지참금이다. 하지만 애인에게는 언제나 듣고 싶은 얘기만 하라! 너희들은 법에 따라 한 침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에게는 사랑의 신이 바로 법이다.” (P.134)
“여자들은 남자가 부자라면 야만인이라도 마음에 들어 한다. 현대는 바야흐로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P.144)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사실이지만 불화가 없으면 사랑은 금세 식어버린다. 사랑은 불화를 먹고 자란다.” (P.305)
이렇듯 그는 어지러운 남녀 간 관계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오히려 이를 긍정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랑의 지침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것은 사랑이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며, 막힌 데 없는 사랑의 건강한 흐름이야말로 개인과 가정과 사회, 나아가 인류 전체의 행복에 가장 중요함을 깨달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역자도 이를 언급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사랑의 기술은 소위 카사노바의 기술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고 끝까지 지켜내려는 기술이다.” (P.330)
그의 사랑은 남녀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사랑에서 남성과 여성은 대등한 존재다. 사랑의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P.177). 사랑에 관한 한 그는 과연 선각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