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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베일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평점 :
<나는 걷는다 1>보다 먼저 읽은 책이지만 역시나 게으름의 소치로 이제야 몇 줄 끄적거릴 엄두가 나게 되었다. 도대체 어찌된 생활인지 돌이켜보면 아주 시간이 나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각설하고 이 작품의 최근 개봉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의 원작이다. 영화가 원제이고 번역본은 표제를 다소 각색하였다. 하긴 '페인티드 베일'하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될 테니까. 영화 개봉에다가 1+1로 <달과 6펜스>를 덤으로 준다니 충동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서머싯 몸의 대표작으로 대개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를 언급하므로 예술성으로는 탁월하다고 보기 어려운 작품이 아닌가 일단 편견을 품는다.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럿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인 키티의 관점에서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여성으로 키워져서 미혼이 될까 두려운 마음에 사랑하지도 않는 월터와 결혼한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너무나 매력적인 찰스와 불륜에 빠진다. 그녀는 관계가 탄로나더라도 사랑과 결혼이 일치하지 않았기에 뒤늦게 참다운 사랑을 찾는다는 나름대로의 합리화가 있었다. 그녀의 주장은 부분적으로 정당하다. 그 시절 여성들은 충동과 겉치레에 관심을 가지게끔 양육되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월터를 따라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중국의 오지로 간 후 그리고 수녀원에서 봉사에 헌신하는 그들을 보면서 키티는 변모한다. 극한 상황에서 인성이 성숙해지는 것은 굳이 실존주의를 떠올릴 필요도 없다. 그녀는 자신이 무시하던 월터가 존경받을 만한 인물임을 발견하며 찰스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물인가 알게 된다. 남편이 죽고 홍콩으로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녀는 과거의 어리석음을 탈피하게 된다. 하지만 육체의 기억을 거부하지 못하고 경멸하는 찰스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 이성이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다는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을 작가는 키티를 통해 독자에게 각인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채색된 베일'이다.
월터는 사랑하는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그녀를 가까이 보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는 이유로 키티와 결혼했다. 그는 자신이 남성적 매력이 그다지 없음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현명하다. 그리고 키티가 찰스와 불륜을 벌인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찰스의 진면모를 깨닫게끔 만든다. 그가 중국 오지에 간 것은 분명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믿음을 배신한 그녀에게 애증이 교차한 그. 그는 연구와 치료에 몰두하면서 그렇게 시절을 넘기고 있었다. 만사가 잘 끝났다면 한결 성숙한 부부로 재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죽음으로 해피엔드를 맞지는 못한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고 포용하지 못하는 자신을 더욱 미워하였다. 그런 면에서 오지행은 키티에 대한 응징일 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는 스스로에 대한 형벌이었다.
찰스는 여기서 육체적 매력이 탁월한 속물적 인간형으로 나온다. 하지만 셋 중에서 가징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닐까. 그에게 키티는 일상의 진부함에 파격적 즐거움을 안겨주는 장난감이다. 그래서 그녀가 부인과 이혼을 요구하고 자신과 법적 결합을 해줄 것을 말했을때 일거에 거부한 태도를 보인다. 불장난은 한때의 유희로 그침을 그는 알고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법이다. 월터가 죽은 것에 그는 무관심할 것이다. 키티가 홍콩을 떠나니 그는 잠시 아쉬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곧 그는 새로운 즐길거리를 찾고는 소소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영국으로 돌아간 키티가 아버지를 이해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복원하려는 노력을 보인 점이다. 예전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리 능력이 신통치 못한 돈이나 갖다주는 그저그런 존재였다. 이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그녀에게 늙은 아버지의 의의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제 그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비로소 인간 본연으로서.
키티는 여성은 제2의 성이라고 주장한 보봐르가 주장한 사례의 전형이다. 그녀의 어리석음은 그녀가 그렇게 키워졌고 장려되었기에 자라났다. 개인사를 겪고 그녀는 제2의 성을 깨뜨리고 도약하는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미래적 여성상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