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나의 두 신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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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따르면 일부 연구자들은 이 희곡을 셰익스피어의 첫 작품이라고 간주한다고 한다. 나로서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구성상의 미숙성이나 개연성의 부족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면 다른 의견이다. 상기 근거는 비단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당대 작가들에도 상당히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므로 이것만으로 주장하기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를 탈피한 게 우리가 아는 중기 이후의 셰익스피어이다.

 

두 신사가 두 여인과 맺어지는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비슷한 패턴의 희극이다. 여기서 관건은 배신이다. 사랑의 배신과 우정의 배신이 동시에 발생하지만, 다시금 원래 상태를 회복하며 행복한 결말이 성립된다. 배신자의 악역은 두 신사 중 한 명인 프로테우스가 담당한다. 그의 본디 성품은 더할 나위 없는 신사임이 친구 발렌타인의 대사로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배신하게 된 계기는 사랑이다. 사랑의 정표를 주고받은 연인 줄리아가 있음에도 그는 발렌타인의 연인인 실비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바람직하진 않지만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 본시 사랑은 맹목적인 현상이므로.

 

문제는 사랑과 더불어 양심마저 사라졌다는 점이다. 그는 실비아를 차지하기 위해 우정을 배신한다. 친구를 추방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그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이전 연인에게서 받은 반지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실비아를 구한 대가로 그녀의 사랑을 요구하고 거부당하자 폭력으로라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획책한다.

 

(프로테우스) 사랑의 본질에는 위배되지만 / 폭력을 써서라도 당신을 사랑하겠어요!

(실비아) , 하늘이시여!

(프로테우스) 폭력을 써서라도 / 당신을 내 욕망에 굴복시키겠소. (P.160-161, 5막 제4)

 

실비아를 강제하는 프로테우스의 눈앞에 발렌타인이 나타나고 그의 배신행위가 일거에 드러난다. 그러자 갑자기 프로테우스는 잘못을 사죄하고 용서를 빈다. 발렌타인은 곧바로 그를 용서하고 우정을 회복하는 증거로 실비아에 대한 사랑을 친구에게 양도하려고 한다. 사랑보다 우정? 실비아의 마음은 어떻게 하려고? 극 중에 프로테우스의 배신을 격렬히 비난했던 실비아가 갑자기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발렌타인) 네놈이 친구라고? / 우정도 사랑도 저버린 비겁한 놈! / 그런 네가 친구라고? 배신자! (P.161, 5막 제4)

 

(발렌타인) 그럼 나도 받아들이지. 다시 한번 / 자네를 진실한 친구로 받아들이겠네. / [......] / 그럼 내 우정이 분명하고 솔직하다는 걸 / 보여 주기 위해, 실비아에 대한 / 내 모든 애정을 자네에게 양도하겠네. (P.162, 5막 제4)

 

다른 황당함 중에서도 최고 압권은 딸과 발렌타인에 대한 공작의 태도 변화다. 둘의 사랑을 인정 못 하고 발렌타인을 맹비난하며 추방령을 내린 게 공작 자신이다. 인제 와서 돌연 발렌타인의 훌륭함을 칭찬하고 실비아와 결혼을 대찬성한다. 산적의 두목이 된 발렌타인이 무슨 큰 공을 세웠다는 건지?

 

(공작) 머리 위에 별이 반짝인다고 / 감히 그 별에 가까이 가려 하다니! / 썩 물러가라, 천한 침입자! / 오만한 노예 놈! 아양 떠는 그런 웃음은 / 너처럼 천한 여인들에게 보여라. (P.92-93, 3막 제1)

 

(공작) 이제 내 선조들의 명예를 걸고 말하네. / 발렌타인, 자네를 여제의 사랑도 / 받을 수 있을 만한 훌륭한 인물로 생각하네. / [......] / 자네의 큰 공에 어울릴 새 작위를 내리겠네. / 자네는 신사요 좋은 가문 출신이야. / 내 딸아이를 가질 자격이 충분해. / 그러니 실비아를 아내로 삼아 데려가게. (P.165-166, 5막 제4)

 

결말의 이런 부분들이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의 근거이다. 긴장감을 점층적으로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잘 짜인 극은 제5막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실비아의 도망을 알아차린 후 뒤를 쫓아가는 세 사람 투리오, 프로테우스, 줄리아. 그들의 대상은 하나이지만 그들의 목적은 서로 전혀 다르다, 복수와 사랑, 그리고 방해. 그리고 마지막 장의 프로테우스와 실비아의 대결 장면은 절정인 동시에 대단원이다. 그런데 대단원에 접어들면서 극은 일거에 무너진다. 갑작스럽고 어이없고 황당한 끝맺음은 누가 봐도 희극을 빨리 종결시키고자 하는 애매한 조급함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용서와 화해와 행복한 결말을 향한 무조건적인 종결!

 

이 작품에서 두 신사보다는 두 숙녀가 더욱 돋보인다. 프로테우스와의 헤어짐을 견디지 못해 남장을 한 채 그를 찾아 나서는 줄리아.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의 배신을 목격하면서 너무나 비참함에 어이없어할 뿐인 그녀는 적어도 연인을 향한 사랑의 간절함에서 아름답다. 실비아는 어떤가. 발렌타인과 비밀 약혼한 그녀는 프로테우스의 비열함과 교활함에 굴하지 않으며, 아버지 공작의 결혼 명령도 거부한 채 가출을 감행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연인에 대한 사랑에 충실한 그야말로 사랑의 순결함의 표본이라고 할 만하다.

 

(스피드) 우리 도련님이 굉장한 러버’(lover, 연인)/ 되셨는데, 어떻게 생각해?

(룬체) 언제는 그렇지 않았나?

(스피드) 늘 그렇다고?

(룬체) 네 말처럼 굉장한 러버’(lubber, 바보)란 말일세. (P.70, 2막 제5)

 

두 신사의 하인인 스피드와 룬체의 존재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어찌 보면 기쁨과 즐거움보다 슬픔과 아픔이 지배적으로 되기 쉬운 극 중 상황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온갖 언어유희와 재담은 긴장을 완화하는 동시에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으로서의 필수적 인물이다. 어릿광대와도 같은 그들의 재치와 해학이 없었다면 이 작품을 희극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확실히 셰익스피어는 말장난에 능숙하다. 말꼬리 잡기처럼 이어지는 언어유희와 더불어 엉뚱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초기작부터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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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 - 로마편 1 델피시리즈 1
플라우투스 지음, 심미현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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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플라우투스의 대표작인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의 원전으로 유명하다. 나도 <실수 연발> 작품 해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읽다 보면 정말로 셰익스피어가 구성과 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에 놀라게 된다. 1,800년 전 옛 희극을 당대에 맞게 손보고 정교하게 다듬어낸 것이다. 그나마 원전에서는 하인은 쌍둥이가 아닌데 셰익스피어는 쌍둥이로 설정하여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동생 메내크무스는 원래 이름이 소시클레스인데, 어릴 때 헤어진 형을 찾으러 노예 메세니오와 각지를 헤매고 다니는 중 에피담누스에 도착한다. 에피담누스는 꽤나 번화한 도시이며 메세니오에 따르면 악명도 높다. 동생 메내크무스가 도시에서 매우 방어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메세니오의 경고 때문이지만 이로 인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더해주고 있다.

 

(메세니오) 에피담누스에는 온갖 못된 술주정뱅이와 난봉꾼들이 있어요. 고리대금업자와 사기꾼들도 들끓는다고요. 게다가 매춘부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가 들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이래요. (P.45)

 

형 메내크무스는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아내의 옷을 몰래 훔쳐 나오는 첫 장면은 제법 의기양양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처가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한 셈이다. 그러기에 영웅적 투쟁이니 전리품이니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메내크무스) 친애하는 모든 남편들이여...그대들은 저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 포상과 축하인사를 잔뜩 해주시지 않으렵니까? [......] , 그러니까, 제가 동지들을 위해 적으로부터 전리품을 쓱싹 훔쳐두었다고 해둡시다. (P.29)

 

후대 작가와 두드러진 차이점은 식객의 존재와 역할이다. 페니쿨루스는 메내크무스와 동등한 신분이지만 동시에 그의 식객으로 상하관계이기도 하다. 부유한 메내크무스에게 빌붙어 이익을 탐하는 존재라고 하겠는데 완전한 예속관계가 아니기에 이후 분란을 부추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메내크무스에 대한 그의 추종은 철저히 이익에 따른다. 나중에 자신이 기대하던 수혜를 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태도를 돌변하여 공유하던 비밀을 그의 아내에게 폭로하는 일은 그로서는 배신이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아내로부터도 봉사의 대가를 얻어내지 못하자 페니쿨루스는 서방님, 아씨처럼 공손한 태도에서 다시금 등을 돌려 악담을 퍼부으니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페니쿨루스) 저는 지금 막 제 친구 메내크무스에게 가는 길이랍니다. 저는 지금 꽤 오랫동안 그의 노예로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저를 옭아매도록 자발적으로 몸을 맡길 겁니다. (P.26)

 

(페니쿨루스) 에라 마누라하고 남편; 두 사람 모두 뒈져버려라! 난 시내에나 가버려야지; 난 이 놈의 집구석하곤 더 이상 한 패가 아닌 것이 분명해. (P.87)

 

쌍둥이 형제의 혼동에 따른 사건 사고의 피해자는 물론 형 메내크무스다. 고대하던 점심 식사도 놓치고, 훔친 옷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정부 집에서도 쫓겨나며 나중에는 미친 사람으로 오인된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동생 메내크무스의 존재가 이런 결과를 낳는 셈이다. 여기에 동생의 모호한 태도가 혼란을 부추긴다. 형을 사랑하는 정도만큼은 윤리적으로 엄격하지 못한 동생은 형의 정부 에로티움의 식사 대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에로티움이 수선해달라고 맡긴 옷과 금팔찌를 몽땅 팔아치우고 떠날 생각에 흐뭇해한다.

 

(소시클레스) 모든 신들이 날 어지간히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승승장구하게 만드시네! 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어선 안 돼. 내가 할 수 있을 때 이 악의 동굴에서 빠져나가야 해. 메내크무스야, 서두르자! 뒤로 돌아, 속보로. (P.71-72)

 

오인된 정체성의 파장은 결국 당사자의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메내크무스가 메내크무스인 동시에 메내크무스가 아니며, 메내크무스의 정상성을 타인들은 비정상성으로 판단한다. 내가 나를 확신할 수 없고, 내가 나의 올바름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에서 누구인들 좌절과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플라우투스와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효과이다.

 

(메내크무스) 난 전혀 미치지 않았어. 또한 그 누구와도 싸움이나 언쟁을 할 생각도 없는데. 난 내가 본 다른 모든 멀쩡한 사람처럼 멀쩡하다구; 내 친구들을 보면 알아볼 수 있고, 그들과 정상적으로 말도 해.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이해하는 걸까-정작 미친 사람은 바로 자기들이 아니라면 말이야? (P.114-115)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만사가 원만하게 해결되므로 다행이지만, 현실 세계가 항상 그렇지는 않다.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미치지 않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미친 상태임을 인지 못 하는 것인가를 누가 명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근대 이전에 정신병원에 감금된 수많은 광인 중에 진짜 광인이 아닌 사람이 포함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 관련 서적 및 영화, 드라마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봉한 형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고향 시칠리아로 떠날 준비를 한다. 동생이야 당연하지만 형 메내크무스는 삶의 기반이 이곳에 있다. 자신의 집, 가족, 재산, 친구 등등. 게다가 그의 신분은 귀족-예속평민의 재판 건으로 점심 식사를 놓쳤다는 장면에서 언급(P.76)된다-이다. 고향은 정서상으로 친밀하지만 막상 타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소유물 일체, 심지어 아내까지도 포함하여 경매에 부치겠다는 그의 선택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막 구분이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번역본은 별표()로 장면 구분을 하는데 이것을 막과 장 중 어느 것으로 보아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책 자체도 만듦새가 흥미롭다. 여타 번역본과는 달리 로마 연극, 등장인물 분석, 내용분석과 해설,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 등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시리즈가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의 목적을 띠고 있는 특징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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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피트리온
플라우투스 지음, 신경수 옮김 / 예니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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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플라우투스가 언급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내에는 <암피트뤼온><메내크미>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 신이 암피트뤼온의 모습을 하고 아내 알크메나와 동침하여 헤라클레스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이 내용을 토대로 인간의 자아 정체성, 신과 인간의 관계 등을 해학적인 문체로 그려낸 게 이 희극이다.

 

알크메나에게 흑심이 생긴 주피터가 암피트뤼온이 전쟁으로 부재중인 틈을 타 머큐리와 함께 각각 암피트뤼온과 하인 소시아로 감쪽같이 변신한다. 알크메나로서는 도저히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남편의 귀가에 기뻐할 따름이다. 소시아로 변한 머큐리의 역할은 주피터가 알크메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암피트뤼온 일행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 여기서 진짜 소시아와 진짜로 변신한 소시아 간에 익살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관객이야 흥미롭겠지만 진짜 소시아로서는 죽을 맛이다.

 

(소시아) 그럼, 내가 소시아가 아니라면, 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말씀 좀 해 보십시오. (P.55, 1막 제1)

 

(소시아) , 불멸의 신들이시여,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겁니까? 어디서 내가 바뀐 것입니까? 어디서 내가 내 형상을 떨쳐놓고 온 것입니까? (P.57, 1막 제1)

 

똑같은 소시아를 앞에 두고 헷갈리는 소시아의 탄식은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본질을 되묻는 근원적 질문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암피트뤼온과 암피트뤼온, 소시아와 소시아. 진정한 자신은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데, 너무나 똑같아서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진정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로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은 나로써 충분하지 않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확인과 수용이 요구되는데, 그들이 나 아닌 나와 똑같은 남을 나로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진정으로 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 아닌 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온당한가.

 

(암피트뤼온) 그래, 그래, 알았어! 조우브 신이라면 마누라를 함께 나눈다 해도 불평할 일이 아니지. (P.143, 5막 제1)

 

암피트뤼온은 테베의 영웅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철저히 신에게 농락당한다. 전장에서 분투하는 동안 신은 그의 모습으로 아내와 재미를 보며, 그가 집에 돌아올 때 신의 훼방을 받아 어쩔 줄 모르며 아내의 부정에 괴로워한다. 영웅적 면모로서 암피트뤼온은 여기에 없다. 오로지 신의 횡포에 휘둘리며 신의 처분을 숙명으로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는 연약한 인간만이 있을 따름이다.

 

(머큐리) 저기 지붕 높이 올라가서는 돌아오는 우리의 영웅을 기가 막히게 쫓아버리겠습니다. 멀쩡히 눈을 뜨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하인 소시아가 호되게 혼이 나겠지요. 내가 여기서 한 짓을 소시아가 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기분만 맞추어드리면 그만이니까요.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것이 내 의무니까요. (P.125, 3막 제4)

 

인간을 농락하는 자신들의 행위에 신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은 하찮은 완구에 불과하다. 인간을 속이고 욕정이 발하면 강제로 동침하면 그뿐이다. 한술 더 떠 주피터는 자신이 알크메나와 동침한 대가로 불후의 영광을 암피트뤼온에게 가져다줄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베푼 양 거들먹거린다. 글쎄, 누구도 헤라클레스의 아버지를 제우스[주피터]로 알지 암피트뤼온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아버지를 목수 요셉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희극에서 알크메나의 고결함은 단연 돋보인다. 어찌 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그녀다. 남편에 대한 정숙한 사랑을 유지한 그녀임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 아닌 인물과 정을 통한 셈이 되었으니.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부정을 의심하는 암피트뤼온에게 항변하는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항변은 과연 주피터가 헤라클레스의 생모로 점찍을 만큼 미모뿐만 아니라 미덕도 뛰어남을 드러낸다.

 

(알크메나) (조용하게) 제 진정한 지참금은 순결과 명예, 자제력, 신에 대한 경외심, 부모에 대한 효도, 동기간의 우애, 그리고 당신에게 착한 아내로서 무한한 사랑과 충실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P.107, 2)

 

소시아의 역할도 눈에 띄는데, 그와 가짜 소시아, 그와 암피트뤼온 간에 벌어지는 짧고 속도감 있는 대사의 교환은 극의 긴박성을 고조시키며, 해학적인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켜 극의 희극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일조한다. 이 희극의 웃음 담당은 단연 소시아와 머큐리라고 할만하다.

 

한편 이 작품은 제4막 제2장 중간 이후부터 해당 장의 끝까지 원문상에 탈문이 존재하여 정확한 내용 이해가 불가한 흠결이 있어 아쉽다.

 

작가 플라우투스는 고대 로마의 희극 작가인데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이어받아 주로 개작 또는 번안 작품을 통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옮긴이의 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매우 적절하므로 인용한다.

 

플라우투스의 목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었다......극의 구성이나 문학성 같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대 독자들의 세련된 심미안으로 보면, 연극적 결함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발견된다. 희랍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을 혼합하여 플라우투스는 익살맞으면서도 따뜻한 희극을 만들었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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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 전예원세계문학선 328 셰익스피어 전집 328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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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는 악몽이라고나 할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야말로 참혹의 연극이다. 잔학, 폭력, 광기가 무성한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비극이다. 내용이 보기 드물게 잔학한데다가 작가의 문제, 공연사, 비평 등에서도 유별나고 이단적인 것이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P.143, ‘작품해설’)

 

우리가 익히 알던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음모, 살인, 강간, 배신, 복수 등 온갖 잔악한 요소들이 넘실거리는 극 작품이라니. 어린이를 위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이야기로 개작한 찰스 램조차 이 작품을 제외할 정도이다. 유혈과 복수의 제재는 그나마 <햄릿>에 다소간 일면이 엿보일 뿐이다. 이 비극은 복수극이라는 장르에 속한다, 앞서 읽은 <스페인 비극><복수자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당대에 유혈이 낭자한 복수극이 유행하였으니 초기 셰익스피어도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 형식을 따랐을 것임은 당연하다. 다만 이 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복수극을 집필하지 않았으니 장르의 속성이 자신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그의 작품세계 전반부는 희극이 주류였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건들 속에서 비극의 참혹성과 중압감을 오롯이 감내하는 인물은 주인공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다. 조국 로마를 위해 고트족과 전쟁을 성공리에 치르고 돌아온 노장인 그는 선왕의 장자 새터나이너스를 왕위에 추대한다. 추대의 보답은 참혹하다. 전쟁 와중에 이미 수십 명의 아들이 전사한 그이지만 작중에서 아들 하나를 직접 죽이고,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며, 장남은 국외로 추방당하고 가장 사랑하던 라비니어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노여움과 슬픔에 제정신을 잃어버렸을 테지만 그는 리어왕처럼 강인한 인물이다. 눈물을 꾹꾹 억누르고 겉으로 미친 척하면서 그는 복수를 도모한다. 그의 복수 행위가 일견 잔인해 보이지만 그가 당한 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타이터스)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슬픔에 잠긴 너희들, 날 둘러싸라, 너희들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꼭 원수를 갚겠다는 맹세를 하고 싶다. (P.82, 3막 제1)

 

(타이터스) (방백) 저것들이 날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난 다 알고 있다. 그들의 계략을 뒤집어 버릴 테다-고약한 지옥의 두 마리 개다, 어미개하고! (P.129, 5막 제2)

 

이 작품의 두 악역은 타모라와 아론이다. 타모라는 포로가 된 고트족의 여왕으로 새터나이너스의 왕비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장자를 죽인 앤드러니커스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이후 벌어진 그녀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 복수의 그것으로 간주 될지는 의문이다. 특히 두 아들로 하여금 라비니어를 강간케 하고 잔혹하게 상해한 행위는 통상 복수의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관행에도 배치된다. 자신이 흑인 노예 아론과 지속해서 정을 통하고 나중에는 그의 아이까지도 낳는 행위를 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타모라의 행위가 그나마 일말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면, 아론은 전무하다. 그는 악행 자체를 즐기고 일삼는 인물이다. 타모라의 두 아들로 하여금 라비니어의 비극을 초래케 유도한 것이 아론이며, 앤드러니커스의 두 아들을 함정에 빠뜨려 사형에 처하게 만든 것도 역시 그다. 두 아들을 구하게 하려고 앤드러니커스의 팔을 자르도록 부추기고 집행한 것도 아론 자신이다. 이렇게 볼 때 아론은 악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아론) , 이 악행은 생각만 해도 몸이 느긋하도록 기쁘고나! 선행은 머저리들에게나 하게 하고, 자비는 선인에게나 맡겨두자. 아론의 영혼은 그 얼굴처럼 새까맣다. (P.79, 3막 제1)

 

(아론) 후회하고말고, 악한 일을 훨씬 더 많이 하지 못했으니. 지금도 저주하고 있지-눈부실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보낸 날을 말이오. 실은 그런 날은 며칠 안 되지만-하지 않은 날들이 비록 많지는 않으나 있었다고 생각되니까 말이지. (P.122, 5막 제1)

 

새터나이너스를 통해 권력의 냉혹함과 무상함을 발견할 수 있다. 원한다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호민관과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앤드러니커스에게 추대받은 그는 표변하여 앤드러니커스 일가를 멸문시키려고 한다. 오만과 독선의 인성적 결함에 타모라의 부추김도 한몫하지만 왕인 자신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명망이 높은 앤드러니커스가 부담스러워서이리라. 왕으로서 그의 함량 미달인 자질은 추방당한 루시어스가 고트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제풀에 의기소침하고 낙담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새 임금에게 박해당하는 앤드러니커스에게 모든 호민관도 등을 돌리는데, 권력의 무게추가 이동하였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터나이너스) 날 우롱한 자를 난 절대로 믿지 않소. 장군이나, 오만한 역모자인 장군의 아들들을 내 믿지 않을 거요. 당신네는 모두 한패가 되어서 날 이렇듯 모욕하고 있으니. 로마 천지에서 조롱의 대상이 새터나이너스밖에는 없단 말이오? (P.34, 1)

 

(루시어스) 오 아버지, 탄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호민관들은 듣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아버지께선 슬픔을 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P.72, 3막 제1)

 

라비니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초반에 여인의 전범으로 칭송받는 그녀가 사실과 다름은 아버지 몰래 배시에이너스와 약혼하였음을 통해 알 수 있으니 이 사건이 비극의 시작이다. 숲 속에서 타모라에게 모욕과 비난의 언사를 거리낌 없던 그녀가 곧이어 능욕 직전에 타모라에게 자비를 구하는 대목은 무상함의 극치다. 온갖 굴욕과 수모에도 목숨을 부지한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복수에 있을진저. 복수가 이루어진 마당에 그녀가 굳이 삶을 유지할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니 아버지 타이터스의 칼에 찔린 그녀의 심정은 차라리 기쁘지 않았을까.

 

주요 등장인물 중 아들 루시어스와 동생 마커스만 살아남을 정도이니 대단한 유혈비극이기는 하다. 사람들은 유머와 해학에 웃고 손뼉 치지만 낭자한 유혈에는 매혹당하고 열렬히 광분한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성이란 결코 이성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 항상 질시와 배신과 음모가 배후에 자리 잡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시도 때도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일단 거기에 휘말리면 선의와 선량의 사람조차도 비극의 물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이 비극에서 찾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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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패니 힐
존 클레랜드 / 예림미디어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순진한 처녀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어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올바른 삶을 회복한다는 내용 전개를 볼 때 얼핏 <몰 플랜더즈>와 유사한 부류의 작품일 것으로 생각했다. 완독한 이후 판단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당대의 고급 포르노그래피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종이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포르노그래피에 사용되는 적나라한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온갖 은유적 표현으로 도배하였음에도 적나라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온갖 성애의 유희를 작가는 마음껏 표현한다. 순진한 처녀의 설정, 중간에 이따금 등장하는 윤리적 자기반성 문장, 무절제한 환락의 부도덕성을 비판적 회고 등은 당대의 검열과 비난을 잠재우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인용하기는 여느 문학작품과 달리 대단히 어렵다. 표현과 문장 하나하나가 성애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성교 장면 묘사에 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성행위의 묘사가 전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를 50가지 이상 사용했다고 하니 비유적 표현을 위한 작가의 노고를 인정할 만하다. 작중에는 이처럼 온갖 은유적 수사가 넘치는데. 단순 외설이 아닌 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소설은 패니가 어느 사모님께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멜라>, <클라리사 할로> 등처럼 당대는 서간체의 소설이 하나의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식의 장점은 글쓴이의 감정과 사고를 직접적으로 표현 가능하다는 점과 타인의 은밀한 영역을 훔쳐본다는 관음증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점이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전적으로 패니 본인이다. 첫 남자인 찰스를 비롯하여 H, 미청년 급사, 콜 부인댁에서 겪었던 숱한 남성들, 그녀에게 거액의 재산을 남겨준 나이 든 신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여러 남성과의 일련의 성 경험을 통해 순진한 처녀는 정욕에 눈뜨고 애욕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창녀로 전락하지만 육체적 쾌락을 꺼리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즐기는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기조차 하다.

 

이 계속되는 교섭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나는 뜨거운 액체가 황홀한 체내에 분출할 때의 그 온갖 기쁨 중에서 가장 멋진 환희를 마음껏 맛보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넘치는 행복,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황홀감, 가슴이 괴로울 정도의 환희, 그것들은 모두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격함, 바로 그 자체입니다. (P.90)

 

몇몇 인상 깊은 대목을 소개하자면, 먼저 H씨라는 한량 신사의 첩이 된 패니가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착각하는 장면이다. H씨의 바람에 분개하고 보복을 실행하는 과도한 반응은 단지 첩에 불과함에도 H씨의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하여 화를 내기에 이른 것이니 마치 정식 부인의 태도와 비슷하다. 게다가 최초에는 복수로 실행되었던 미청년 급사와의 교섭에서 뜻밖의 큰 쾌락을 발견하자 이에 탐닉하게 되면서 기술되는 과정은 그녀가 애정과 무관하게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내재적 욕망이 강함을 알게 해준다. 어쨌든 이것이 발각되면서 그녀는 안정적인 생활에서 내침을 당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윤락의 길에 들어서는데 패니의 태도는 오히려 낙천적이다.

 

나는 개인적인 은밀한 사랑의 사도로부터 숨김없는 공적인 사랑의 사도, 그러니까 더 한층 많은 남자들을 상대로 하는 직업적인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신체를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든가, 쾌락을 위해서든가, 혹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내가 지니고 있는 강점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P.166)

 

찰스는 그녀가 유일하게 애정을 바친 동시에 후에 그와 정식 부부로 결합하는 남성이다. 그녀가 무수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잊지 못하는 건 감정적 영역 못지않게 인물 자체의 매력이 남달랐을 것임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그가 드물게 보는 외모와 내면이 조화를 이룬 인물이라고 패니는 진술하는데 뛰어난 외모가 우선적으로 돋보였음을 인정하고 있어 남녀 관계에 있어 외모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처음으로 나의 눈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용모의 단아함이었으므로, 내가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그의 이런 내면적인 장점도 만약 그의 외모가 내 눈의 보물과 마음의 우상으로 자리잡지 않았다면 어지럽게 마음이 들뜬 시기에 그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P.98)

 

이 소설에서 서술되는 여러 성행위 중 보편적이지 않은 일부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먼저 순진한 패니에게 관능과 환락의 즐거움을 가르치기 위해 피비가 벌이는 레즈비언적 행위다. 채찍질을 통해서만 성적으로 흥분과 자극을 느끼는 남성과의 행위도 흥미롭게 묘사되는데, 패니가 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경멸스럽게 바라보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남성 동성애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우연히 훔쳐보게 된 남성 간 성교 장면에 대해 패니는 물론 콜 부인은 매우 혐오스러운 인식을 공개적으로 표명한다. 남성의 육체적 사랑을 구한다는 면에서 게이는 창녀와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으므로 부정적 반응은 일응 이해되지만, 근세까지도 법적으로 처벌받는 비열한 관계가 현대에서는 공공연하게 양성화됨을 그녀가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소설의 뒷부분은 패니와 찰스의 재회와 그들의 뜨거운 결합, 그리고 정당한 결혼으로 이어진다. 애정 없이도 쾌락과 향락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패니였으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적 결합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그것이야말로 성행위의 바람직한 전범이자 참된 관계이므로 한껏 미덕의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여기에 비하면 패니가 이전에 누렸던 즐거움은 거짓이자 천박한 악덕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마지막 문장에서 분명히 한다.

 

사랑! 그렇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행위를 이끌어 가는 애정이야말로 모든 환락의 풍미를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며, 사실 그것 없이는 왕후든 거지든 누구도 결코 우아한 환락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쾌락을 세련시키고 승화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신 면에서나 감각 면에서나 행복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다가가고 있는 절정의 환희 이상의 것이,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P.302)


원제는 <어느 환락녀의 수기>라고 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덕택에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만 내가 읽은 이 새론문화사본이나 예림미디어본 모두 절판이므로 그럴듯한 장정으로 새롭게 출간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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