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 - 전예원세계문학선 328 셰익스피어 전집 328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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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는 악몽이라고나 할 세계에서 일어나는 그야말로 참혹의 연극이다. 잔학, 폭력, 광기가 무성한 피비린내나는 복수의 비극이다. 내용이 보기 드물게 잔학한데다가 작가의 문제, 공연사, 비평 등에서도 유별나고 이단적인 것이라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하다. (P.143, ‘작품해설’)

 

우리가 익히 알던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음모, 살인, 강간, 배신, 복수 등 온갖 잔악한 요소들이 넘실거리는 극 작품이라니. 어린이를 위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이야기로 개작한 찰스 램조차 이 작품을 제외할 정도이다. 유혈과 복수의 제재는 그나마 <햄릿>에 다소간 일면이 엿보일 뿐이다. 이 비극은 복수극이라는 장르에 속한다, 앞서 읽은 <스페인 비극><복수자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 당대에 유혈이 낭자한 복수극이 유행하였으니 초기 셰익스피어도 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 형식을 따랐을 것임은 당연하다. 다만 이 극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복수극을 집필하지 않았으니 장르의 속성이 자신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그의 작품세계 전반부는 희극이 주류였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사건들 속에서 비극의 참혹성과 중압감을 오롯이 감내하는 인물은 주인공 타이터스 앤드러니커스다. 조국 로마를 위해 고트족과 전쟁을 성공리에 치르고 돌아온 노장인 그는 선왕의 장자 새터나이너스를 왕위에 추대한다. 추대의 보답은 참혹하다. 전쟁 와중에 이미 수십 명의 아들이 전사한 그이지만 작중에서 아들 하나를 직접 죽이고, 두 아들은 죽임을 당하며, 장남은 국외로 추방당하고 가장 사랑하던 라비니어는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한 상황에 빠진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노여움과 슬픔에 제정신을 잃어버렸을 테지만 그는 리어왕처럼 강인한 인물이다. 눈물을 꾹꾹 억누르고 겉으로 미친 척하면서 그는 복수를 도모한다. 그의 복수 행위가 일견 잔인해 보이지만 그가 당한 것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타이터스) ,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자. 슬픔에 잠긴 너희들, 날 둘러싸라, 너희들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꼭 원수를 갚겠다는 맹세를 하고 싶다. (P.82, 3막 제1)

 

(타이터스) (방백) 저것들이 날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난 다 알고 있다. 그들의 계략을 뒤집어 버릴 테다-고약한 지옥의 두 마리 개다, 어미개하고! (P.129, 5막 제2)

 

이 작품의 두 악역은 타모라와 아론이다. 타모라는 포로가 된 고트족의 여왕으로 새터나이너스의 왕비가 된다. 그녀는 자신의 장자를 죽인 앤드러니커스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이후 벌어진 그녀의 행동이 과연 정당한 복수의 그것으로 간주 될지는 의문이다. 특히 두 아들로 하여금 라비니어를 강간케 하고 잔혹하게 상해한 행위는 통상 복수의 대상에서 여성을 제외하는 관행에도 배치된다. 자신이 흑인 노예 아론과 지속해서 정을 통하고 나중에는 그의 아이까지도 낳는 행위를 볼 경우 더욱 그러하다.

 

타모라의 행위가 그나마 일말의 정당성을 갖고 있다면, 아론은 전무하다. 그는 악행 자체를 즐기고 일삼는 인물이다. 타모라의 두 아들로 하여금 라비니어의 비극을 초래케 유도한 것이 아론이며, 앤드러니커스의 두 아들을 함정에 빠뜨려 사형에 처하게 만든 것도 역시 그다. 두 아들을 구하게 하려고 앤드러니커스의 팔을 자르도록 부추기고 집행한 것도 아론 자신이다. 이렇게 볼 때 아론은 악인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스스로도 이를 인정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하다.

 

(아론) , 이 악행은 생각만 해도 몸이 느긋하도록 기쁘고나! 선행은 머저리들에게나 하게 하고, 자비는 선인에게나 맡겨두자. 아론의 영혼은 그 얼굴처럼 새까맣다. (P.79, 3막 제1)

 

(아론) 후회하고말고, 악한 일을 훨씬 더 많이 하지 못했으니. 지금도 저주하고 있지-눈부실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보낸 날을 말이오. 실은 그런 날은 며칠 안 되지만-하지 않은 날들이 비록 많지는 않으나 있었다고 생각되니까 말이지. (P.122, 5막 제1)

 

새터나이너스를 통해 권력의 냉혹함과 무상함을 발견할 수 있다. 원한다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호민관과 국민의 지지를 받는 앤드러니커스에게 추대받은 그는 표변하여 앤드러니커스 일가를 멸문시키려고 한다. 오만과 독선의 인성적 결함에 타모라의 부추김도 한몫하지만 왕인 자신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존경과 명망이 높은 앤드러니커스가 부담스러워서이리라. 왕으로서 그의 함량 미달인 자질은 추방당한 루시어스가 고트군을 이끌고 공격해 온다는 소식에 제풀에 의기소침하고 낙담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새 임금에게 박해당하는 앤드러니커스에게 모든 호민관도 등을 돌리는데, 권력의 무게추가 이동하였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새터나이너스) 날 우롱한 자를 난 절대로 믿지 않소. 장군이나, 오만한 역모자인 장군의 아들들을 내 믿지 않을 거요. 당신네는 모두 한패가 되어서 날 이렇듯 모욕하고 있으니. 로마 천지에서 조롱의 대상이 새터나이너스밖에는 없단 말이오? (P.34, 1)

 

(루시어스) 오 아버지, 탄원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호민관들은 듣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아버지께선 슬픔을 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P.72, 3막 제1)

 

라비니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초반에 여인의 전범으로 칭송받는 그녀가 사실과 다름은 아버지 몰래 배시에이너스와 약혼하였음을 통해 알 수 있으니 이 사건이 비극의 시작이다. 숲 속에서 타모라에게 모욕과 비난의 언사를 거리낌 없던 그녀가 곧이어 능욕 직전에 타모라에게 자비를 구하는 대목은 무상함의 극치다. 온갖 굴욕과 수모에도 목숨을 부지한 그녀의 목적은 오로지 복수에 있을진저. 복수가 이루어진 마당에 그녀가 굳이 삶을 유지할 이유는 더더욱 없을 것이니 아버지 타이터스의 칼에 찔린 그녀의 심정은 차라리 기쁘지 않았을까.

 

주요 등장인물 중 아들 루시어스와 동생 마커스만 살아남을 정도이니 대단한 유혈비극이기는 하다. 사람들은 유머와 해학에 웃고 손뼉 치지만 낭자한 유혈에는 매혹당하고 열렬히 광분한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인간성이란 결코 이성적이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존재라는 것, 항상 질시와 배신과 음모가 배후에 자리 잡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시도 때도 없이 악행을 저지를 수 있으며 일단 거기에 휘말리면 선의와 선량의 사람조차도 비극의 물결에서 헤어나올 수 없음을 이 비극에서 찾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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