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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메내크무스 형제 : 메내크미 - 로마편 1 ㅣ 델피시리즈 1
플라우투스 지음, 심미현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2월
평점 :
이 작품은 플라우투스의 대표작인 동시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의 원전으로 유명하다. 나도 <실수 연발> 작품 해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읽다 보면 정말로 셰익스피어가 구성과 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용했음에 놀라게 된다. 약 1,800년 전 옛 희극을 당대에 맞게 손보고 정교하게 다듬어낸 것이다. 그나마 원전에서는 하인은 쌍둥이가 아닌데 셰익스피어는 쌍둥이로 설정하여 혼란을 더욱 부추기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
동생 메내크무스는 원래 이름이 소시클레스인데, 어릴 때 헤어진 형을 찾으러 노예 메세니오와 각지를 헤매고 다니는 중 에피담누스에 도착한다. 에피담누스는 꽤나 번화한 도시이며 메세니오에 따르면 악명도 높다. 동생 메내크무스가 도시에서 매우 방어적이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은 메세니오의 경고 때문이지만 이로 인해서 정체성의 혼란을 더해주고 있다.
(메세니오) 에피담누스에는 온갖 못된 술주정뱅이와 난봉꾼들이 있어요. 고리대금업자와 사기꾼들도 들끓는다고요. 게다가 매춘부들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제가 들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유혹적이래요. (P.45)
형 메내크무스는 이곳에서 정착하여 살고 있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은 듯하다. 그가 아내의 옷을 몰래 훔쳐 나오는 첫 장면은 제법 의기양양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공처가로서는 대단한 모험을 한 셈이다. 그러기에 영웅적 투쟁이니 전리품이니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메내크무스) 친애하는 모든 남편들이여...그대들은 저의 영웅적 투쟁에 대해 포상과 축하인사를 잔뜩 해주시지 않으렵니까? [......] 아, 그러니까, 제가 동지들을 위해 적으로부터 전리품을 쓱싹 훔쳐두었다고 해둡시다. (P.29)
후대 작가와 두드러진 차이점은 식객의 존재와 역할이다. 페니쿨루스는 메내크무스와 동등한 신분이지만 동시에 그의 식객으로 상하관계이기도 하다. 부유한 메내크무스에게 빌붙어 이익을 탐하는 존재라고 하겠는데 완전한 예속관계가 아니기에 이후 분란을 부추기는 역할을 담당한다. 메내크무스에 대한 그의 추종은 철저히 이익에 따른다. 나중에 자신이 기대하던 수혜를 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워지자 태도를 돌변하여 공유하던 비밀을 그의 아내에게 폭로하는 일은 그로서는 배신이라고 하기조차 어렵다. 그의 아내로부터도 봉사의 대가를 얻어내지 못하자 페니쿨루스는 서방님, 아씨처럼 공손한 태도에서 다시금 등을 돌려 악담을 퍼부으니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페니쿨루스) 저는 지금 막 제 친구 메내크무스에게 가는 길이랍니다. 저는 지금 꽤 오랫동안 그의 노예로 지내왔습니다. 그리고 전 여전히 저를 옭아매도록 자발적으로 몸을 맡길 겁니다. (P.26)
(페니쿨루스) 에라 마누라하고 남편; 두 사람 모두 뒈져버려라! 난 시내에나 가버려야지; 난 이 놈의 집구석하곤 더 이상 한 패가 아닌 것이 분명해. (P.87)
쌍둥이 형제의 혼동에 따른 사건 사고의 피해자는 물론 형 메내크무스다. 고대하던 점심 식사도 놓치고, 훔친 옷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정부 집에서도 쫓겨나며 나중에는 미친 사람으로 오인된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동생 메내크무스의 존재가 이런 결과를 낳는 셈이다. 여기에 동생의 모호한 태도가 혼란을 부추긴다. 형을 사랑하는 정도만큼은 윤리적으로 엄격하지 못한 동생은 형의 정부 에로티움의 식사 대접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에로티움이 수선해달라고 맡긴 옷과 금팔찌를 몽땅 팔아치우고 떠날 생각에 흐뭇해한다.
(소시클레스) 모든 신들이 날 어지간히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승승장구하게 만드시네! 하지만 난 여기서 멈추어선 안 돼. 내가 할 수 있을 때 이 악의 동굴에서 빠져나가야 해. 메내크무스야, 서두르자! 뒤로 돌아, 속보로. (P.71-72)
오인된 정체성의 파장은 결국 당사자의 자기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메내크무스가 메내크무스인 동시에 메내크무스가 아니며, 메내크무스의 정상성을 타인들은 비정상성으로 판단한다. 내가 나를 확신할 수 없고, 내가 나의 올바름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에서 누구인들 좌절과 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플라우투스와 셰익스피어가 의도한 효과이다.
(메내크무스) 난 전혀 미치지 않았어. 또한 그 누구와도 싸움이나 언쟁을 할 생각도 없는데. 난 내가 본 다른 모든 멀쩡한 사람처럼 멀쩡하다구; 내 친구들을 보면 알아볼 수 있고, 그들과 정상적으로 말도 해.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내가 미쳤다고 이해하는 걸까-정작 미친 사람은 바로 자기들이 아니라면 말이야? (P.114-115)
이 작품은 희극이므로 만사가 원만하게 해결되므로 다행이지만, 현실 세계가 항상 그렇지는 않다. 내가 미치지 않았음을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연 나는 미치지 않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미친 상태임을 인지 못 하는 것인가를 누가 명확히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근대 이전에 정신병원에 감금된 수많은 광인 중에 진짜 광인이 아닌 사람이 포함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러 관련 서적 및 영화, 드라마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상봉한 형제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고향 시칠리아로 떠날 준비를 한다. 동생이야 당연하지만 형 메내크무스는 삶의 기반이 이곳에 있다. 자신의 집, 가족, 재산, 친구 등등. 게다가 그의 신분은 귀족-예속평민의 재판 건으로 점심 식사를 놓쳤다는 장면에서 언급(P.76)된다-이다. 고향은 정서상으로 친밀하지만 막상 타향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자신의 소유물 일체, 심지어 아내까지도 포함하여 경매에 부치겠다는 그의 선택은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
이 작품은 막 구분이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번역본은 별표(★)로 장면 구분을 하는데 이것을 막과 장 중 어느 것으로 보아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책 자체도 만듦새가 흥미롭다. 여타 번역본과는 달리 로마 연극, 등장인물 분석, 내용분석과 해설, 작품이해를 위한 질문 및 모범답안 등을 부록으로 싣고 있다. 이 시리즈가 고전 희곡을 위한 안내서이자 학습서의 목적을 띠고 있는 특징인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