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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패니 힐
존 클레랜드 / 예림미디어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순진한 처녀가 타락의 길에 빠져들어 생활하다가 마지막에 올바른 삶을 회복한다는 내용 전개를 볼 때 얼핏 <몰 플랜더즈>와 유사한 부류의 작품일 것으로 생각했다. 완독한 이후 판단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당대의 고급 포르노그래피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는 종이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포르노그래피에 사용되는 적나라한 비속어를 사용하지 않고 온갖 은유적 표현으로 도배하였음에도 적나라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온갖 성애의 유희를 작가는 마음껏 표현한다. 순진한 처녀의 설정, 중간에 이따금 등장하는 윤리적 자기반성 문장, 무절제한 환락의 부도덕성을 비판적 회고 등은 당대의 검열과 비난을 잠재우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 작품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인용하기는 여느 문학작품과 달리 대단히 어렵다. 표현과 문장 하나하나가 성애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성교 장면 묘사에 특히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작품 해설에 따르면 성행위의 묘사가 전체의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특히 남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단어를 50가지 이상 사용했다고 하니 비유적 표현을 위한 작가의 노고를 인정할 만하다. 작중에는 이처럼 온갖 은유적 수사가 넘치는데. 단순 외설이 아닌 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소설은 패니가 어느 사모님께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멜라>, <클라리사 할로> 등처럼 당대는 서간체의 소설이 하나의 유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식의 장점은 글쓴이의 감정과 사고를 직접적으로 표현 가능하다는 점과 타인의 은밀한 영역을 훔쳐본다는 관음증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점이다.
작품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전적으로 패니 본인이다. 첫 남자인 찰스를 비롯하여 H씨, 미청년 급사, 콜 부인댁에서 겪었던 숱한 남성들, 그녀에게 거액의 재산을 남겨준 나이 든 신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그녀 곁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여러 남성과의 일련의 성 경험을 통해 순진한 처녀는 정욕에 눈뜨고 애욕에 기꺼이 몸을 맡기며 창녀로 전락하지만 육체적 쾌락을 꺼리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고 즐기는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당당하기조차 하다.
이 계속되는 교섭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나는 뜨거운 액체가 황홀한 체내에 분출할 때의 그 온갖 기쁨 중에서 가장 멋진 환희를 마음껏 맛보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넘치는 행복,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황홀감, 가슴이 괴로울 정도의 환희, 그것들은 모두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격함, 바로 그 자체입니다. (P.90)
몇몇 인상 깊은 대목을 소개하자면, 먼저 H씨라는 한량 신사의 첩이 된 패니가 자신의 처지와 신분을 착각하는 장면이다. H씨의 바람에 분개하고 보복을 실행하는 과도한 반응은 단지 첩에 불과함에도 H씨의 행위를 배신으로 간주하여 화를 내기에 이른 것이니 마치 정식 부인의 태도와 비슷하다. 게다가 최초에는 복수로 실행되었던 미청년 급사와의 교섭에서 뜻밖의 큰 쾌락을 발견하자 이에 탐닉하게 되면서 기술되는 과정은 그녀가 애정과 무관하게 육체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내재적 욕망이 강함을 알게 해준다. 어쨌든 이것이 발각되면서 그녀는 안정적인 생활에서 내침을 당하게 되고 본격적으로 윤락의 길에 들어서는데 패니의 태도는 오히려 낙천적이다.
나는 개인적인 은밀한 사랑의 사도로부터 숨김없는 공적인 사랑의 사도, 그러니까 더 한층 많은 남자들을 상대로 하는 직업적인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신체를 물질적인 이익을 위해서든가, 쾌락을 위해서든가, 혹은 그 두 가지 모두를 위해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내가 지니고 있는 강점을 충분히 발휘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입니다. (P.166)
찰스는 그녀가 유일하게 애정을 바친 동시에 후에 그와 정식 부부로 결합하는 남성이다. 그녀가 무수한 남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그를 잊지 못하는 건 감정적 영역 못지않게 인물 자체의 매력이 남달랐을 것임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그가 드물게 보는 외모와 내면이 조화를 이룬 인물이라고 패니는 진술하는데 뛰어난 외모가 우선적으로 돋보였음을 인정하고 있어 남녀 관계에 있어 외모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처음으로 나의 눈을 끌고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름아닌 용모의 단아함이었으므로, 내가 훨씬 나중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그의 이런 내면적인 장점도 만약 그의 외모가 내 눈의 보물과 마음의 우상으로 자리잡지 않았다면 어지럽게 마음이 들뜬 시기에 그가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P.98)
이 소설에서 서술되는 여러 성행위 중 보편적이지 않은 일부 사례가 소개되고 있다. 먼저 순진한 패니에게 관능과 환락의 즐거움을 가르치기 위해 피비가 벌이는 레즈비언적 행위다. 채찍질을 통해서만 성적으로 흥분과 자극을 느끼는 남성과의 행위도 흥미롭게 묘사되는데, 패니가 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경멸스럽게 바라보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반면 남성 동성애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르다. 우연히 훔쳐보게 된 남성 간 성교 장면에 대해 패니는 물론 콜 부인은 매우 혐오스러운 인식을 공개적으로 표명한다. 남성의 육체적 사랑을 구한다는 면에서 게이는 창녀와 일종의 경쟁 관계에 있으므로 부정적 반응은 일응 이해되지만, 근세까지도 법적으로 처벌받는 비열한 관계가 현대에서는 공공연하게 양성화됨을 그녀가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소설의 뒷부분은 패니와 찰스의 재회와 그들의 뜨거운 결합, 그리고 정당한 결혼으로 이어진다. 애정 없이도 쾌락과 향락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패니였으니 사랑하는 사람과의 성적 결합은 더할 나위 없는 쾌감을 선사한다. 그것이야말로 성행위의 바람직한 전범이자 참된 관계이므로 한껏 미덕의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여기에 비하면 패니가 이전에 누렸던 즐거움은 거짓이자 천박한 악덕에 불과하다고 그녀는 마지막 문장에서 분명히 한다.
사랑! 그렇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행위를 이끌어 가는 애정이야말로 모든 환락의 풍미를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며, 사실 그것 없이는 왕후든 거지든 누구도 결코 우아한 환락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쾌락을 세련시키고 승화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신 면에서나 감각 면에서나 행복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다가가고 있는 절정의 환희 이상의 것이,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P.302)
원제는 <어느 환락녀의 수기>라고 한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 소개된 덕택에 이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만 내가 읽은 이 새론문화사본이나 예림미디어본 모두 절판이므로 그럴듯한 장정으로 새롭게 출간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