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피트리온
플라우투스 지음, 신경수 옮김 / 예니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셰익스피어의 <실수 연발>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플라우투스가 언급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국내에는 <암피트뤼온><메내크미> 번역본이 나왔는데,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 신이 암피트뤼온의 모습을 하고 아내 알크메나와 동침하여 헤라클레스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이 내용을 토대로 인간의 자아 정체성, 신과 인간의 관계 등을 해학적인 문체로 그려낸 게 이 희극이다.

 

알크메나에게 흑심이 생긴 주피터가 암피트뤼온이 전쟁으로 부재중인 틈을 타 머큐리와 함께 각각 암피트뤼온과 하인 소시아로 감쪽같이 변신한다. 알크메나로서는 도저히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남편의 귀가에 기뻐할 따름이다. 소시아로 변한 머큐리의 역할은 주피터가 알크메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암피트뤼온 일행이 집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것. 여기서 진짜 소시아와 진짜로 변신한 소시아 간에 익살스러운 장면이 펼쳐진다. 관객이야 흥미롭겠지만 진짜 소시아로서는 죽을 맛이다.

 

(소시아) 그럼, 내가 소시아가 아니라면, 대체 나는 누구입니까? 말씀 좀 해 보십시오. (P.55, 1막 제1)

 

(소시아) , 불멸의 신들이시여, 도대체, 내가 어디에서 내 자신을 잃어버린 겁니까? 어디서 내가 바뀐 것입니까? 어디서 내가 내 형상을 떨쳐놓고 온 것입니까? (P.57, 1막 제1)

 

똑같은 소시아를 앞에 두고 헷갈리는 소시아의 탄식은 진정한 자아 정체성의 본질을 되묻는 근원적 질문에 다름 아니다. 사실 이 작품의 핵심적 메시지는 이것이다. 암피트뤼온과 암피트뤼온, 소시아와 소시아. 진정한 자신은 오로지 하나만 존재하는데, 너무나 똑같아서 도저히 구별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진정한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나를 나로서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은 나로써 충분하지 않다. 나를 둘러싼 사회적 확인과 수용이 요구되는데, 그들이 나 아닌 나와 똑같은 남을 나로 인정한다면, 그때 나는 진정으로 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나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나 아닌 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온당한가.

 

(암피트뤼온) 그래, 그래, 알았어! 조우브 신이라면 마누라를 함께 나눈다 해도 불평할 일이 아니지. (P.143, 5막 제1)

 

암피트뤼온은 테베의 영웅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는 철저히 신에게 농락당한다. 전장에서 분투하는 동안 신은 그의 모습으로 아내와 재미를 보며, 그가 집에 돌아올 때 신의 훼방을 받아 어쩔 줄 모르며 아내의 부정에 괴로워한다. 영웅적 면모로서 암피트뤼온은 여기에 없다. 오로지 신의 횡포에 휘둘리며 신의 처분을 숙명으로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는 연약한 인간만이 있을 따름이다.

 

(머큐리) 저기 지붕 높이 올라가서는 돌아오는 우리의 영웅을 기가 막히게 쫓아버리겠습니다. 멀쩡히 눈을 뜨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하인 소시아가 호되게 혼이 나겠지요. 내가 여기서 한 짓을 소시아가 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우리 아버지 기분만 맞추어드리면 그만이니까요.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것이 내 의무니까요. (P.125, 3막 제4)

 

인간을 농락하는 자신들의 행위에 신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간은 하찮은 완구에 불과하다. 인간을 속이고 욕정이 발하면 강제로 동침하면 그뿐이다. 한술 더 떠 주피터는 자신이 알크메나와 동침한 대가로 불후의 영광을 암피트뤼온에게 가져다줄 아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베푼 양 거들먹거린다. 글쎄, 누구도 헤라클레스의 아버지를 제우스[주피터]로 알지 암피트뤼온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의 아버지를 목수 요셉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희극에서 알크메나의 고결함은 단연 돋보인다. 어찌 보면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그녀다. 남편에 대한 정숙한 사랑을 유지한 그녀임에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 아닌 인물과 정을 통한 셈이 되었으니.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부정을 의심하는 암피트뤼온에게 항변하는 그녀의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항변은 과연 주피터가 헤라클레스의 생모로 점찍을 만큼 미모뿐만 아니라 미덕도 뛰어남을 드러낸다.

 

(알크메나) (조용하게) 제 진정한 지참금은 순결과 명예, 자제력, 신에 대한 경외심, 부모에 대한 효도, 동기간의 우애, 그리고 당신에게 착한 아내로서 무한한 사랑과 충실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P.107, 2)

 

소시아의 역할도 눈에 띄는데, 그와 가짜 소시아, 그와 암피트뤼온 간에 벌어지는 짧고 속도감 있는 대사의 교환은 극의 긴박성을 고조시키며, 해학적인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유발시켜 극의 희극성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일조한다. 이 희극의 웃음 담당은 단연 소시아와 머큐리라고 할만하다.

 

한편 이 작품은 제4막 제2장 중간 이후부터 해당 장의 끝까지 원문상에 탈문이 존재하여 정확한 내용 이해가 불가한 흠결이 있어 아쉽다.

 

작가 플라우투스는 고대 로마의 희극 작가인데 고대 그리스 희극을 이어받아 주로 개작 또는 번안 작품을 통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옮긴이의 글에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는 글이 있는데 매우 적절하므로 인용한다.

 

플라우투스의 목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었다......극의 구성이나 문학성 같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현대 독자들의 세련된 심미안으로 보면, 연극적 결함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많은 요소들이 발견된다. 희랍적인 것과 로마적인 것을 혼합하여 플라우투스는 익살맞으면서도 따뜻한 희극을 만들었다.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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