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 로마편 4 델피시리즈 4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지음, 이현우 옮김 / 동인(이성모)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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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는 키케로와 더불어 로마제국 초기의 유명한 철학자이다. 이런 그가 희곡을 여러 편 썼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비극만 9편을 남겼는데, 모두 그리스 비극을 모작하였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실제 상연용이 아니라 낭독용이라는 평가가 많다. 우선 무대 재현에 적합하지 않은 표현 양식을 사용하였다는 점인데 이런 점은 기술적으로 극복하기에 장벽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더 곤란한 점은 세네카의 박학다식한 그리스 신화 지식에 기인한다. 그리스 비극 작가와 달리 세네카의 자신의 비극에서 수많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한다. 따라서 어지간히 수준 높은 관객이 아니라면 무대에서 일회성으로 내뱉는 대사를 단번에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세네카의 비극은 자체의 문학적 가치보다는 후대 극작가들에게 미친 영향이 매우 크다고 일컫는다. 영국과 프랑스 등의 르네상스 시대 극작가들, 즉 키드, 말로우, 셰익스피어, 웹스터, 코르네유, 라신느 등의 유명한 극작가가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우선 세네카의 문명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유명한 문장가였으므로 그의 라틴어 저작이 교습용으로 많이 보급되었을 것이다. 또한 희랍어로 쓰여진 그리스 비극의 라틴어 번역을 직접 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세네카의 극은 훌륭한 대체재가 될 수 있었으리라. 세네카의 비극적 특징 중 하나는 이전과는 달리 잔혹한 장면의 직접적 노출인데, 셰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를 비롯한 후대 복수극에 등장하는 잔혹한 장면은 이의 영향이라고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유명한 비극과 동일한 제재를 사용한다. 원작의 구성과 표현이 워낙 강렬하므로 자칫하면 평범한 모방으로 그치기에 십상인데, 세네카는 독자적 작품으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원작에 변용을 가하였다. 세네카는 친부모와 양부모의 관계를 달리 설정하고, 오이디푸스의 인간성을 한층 존경받을 만한 인격으로 만들어 그가 나중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 때 관객에게 주는 충격을 한층 강화한다. 볼거리를 요구하는 사회적 수요에 맞추어 희생 제물의 적나라하고 잔혹한 상태 묘사(2), 오이디푸스의 끔찍한 자해 묘사(5)와 역시 이오카스타의 자살 장면(5)이 무대에서 행해지도록 구성한다.

 

(오이디푸스) 내가 너희로부터 사라질 때, 나는 / 이 땅을 집어삼킨 모든 역병을 함께 데려갈 것이다. / 오너라, 가혹한 운명의 여신들아, / 오너라, 모든 질병의 음침한 혼령들아, 검은 역병아, / 부패야, 미친 절망아! / 나와 함께 가자! / 너희 같은 길잡이들과 동행한다면, / 더 할 수 없이 즐겁겠구나! (P.89-90, 5)

 

무엇보다 세네카의 오이디푸스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점은 구세주로서의 의연함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만, 그가 감당해야 할 저주를 회피하지 않는다. 자신의 희생으로 나라가 정상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는 기꺼이 저주와 고통을 감내하리라는 당당함은 관객의 눈물보다는 오히려 박수를 끌어낼 만큼 영웅적이다. 그에게서 세상의 모든 악의 대속, 인류를 위한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예수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주제는 거스를 수 없는 인간 운명의 비극성이다. 오이디푸스는 개인적으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를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숙명은 그에게 친부를 죽이고 친모와 결혼하도록 몰고 간다.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을 피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오히려 예언의 굴레에 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 운명 앞에서 어떤 영웅도, 어떤 노력도 소용없이 신의 의지에 따라 처리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 그것은 인간이 오랜 세월 겪은 회피할 수 없는 비극의 가혹함과 인간의 무력함, 그리고 감내할 수 없는 슬픔을 중화하기 위한 나름의 장치이리라.

 

(코러스) 내 마음대로 내 운명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 있다면, / 내 인생의 항해, 부드러운 바람 타게 하리, / 내 배의 돛대 흔들리지 않게 질풍과는 맞서지 않으리. [......]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마다 / 인간은 언제나 위험의 경계선에 서게 된다네. (P.79, 4)

 

한두 가지 인상적인 대목을 추가로 언급하련다. 4막에서 노인은 오이디푸스에게 출생에 대해 깊숙하게 파헤치지 말도록 경고한다. 비밀이 밝혀졌을 때 드러나게 될 후폭풍이 자칫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날 수도 있다며. 이때 오이디푸스는 위험에도 진실을 추구한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세상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그것을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출생 비밀은 더는 개인적 영역의 차원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오이디푸스)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에는 그냥 놔두는 것이 옳다. / 허나, 절박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따져봐야 하는 것이며 / 그렇다고 해가 될 일은 없다. (P.76, 4)

 

세네카는 네로 황제의 스승이자 후견인이었다. 성인이 된 네로 황제는 폭정을 행하는 데 있어 세네카의 존재가 눈에 거슬렸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에게 조언하지만 그는 결국 자살을 명령받는다. 3막에서 예언자에 의해 역병의 원인이 밝혀지지만 오이디푸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크레온과 티레시우스가 왕권을 노리고 음모를 꾸민 것으로 오해한다. 이때 크레온은 이렇게 외친다. 사실 훗날 세네카가 네로 황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크레온) 그러나 폭정을 휘두르는 왕은 /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두려움이란 말이 그 저자의 머릿속에서 물러서야 합니다. (P.66, 3)

 

소포클레스의 원작의 인기에 비해 극작가 세네카의 명성은 미미하여 존재감조차 없다. 구성과 표현의 예술성 면에서 원작보다 못하고 여러 요인으로 상연하기가 어렵다는 후대의 비판도 있다. 막상 이 작품을 읽어보니 비판받은 부정적 요소는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수용될 여지가 크다고 본다. 무대 관람이 어렵다면 최소한 희극 자체로서는 재평가가 필요하다.

 

세네카의 <오이디푸스>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든다는 의미에서 원작과는 다른 극적 긴장감과 구성적 역동성을 가지며, 혼돈과 극단의 상황을 노정하는 오늘의 시대 상황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현대성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P.94, 역자 후기)

 

테렌티우스의 희극과 마찬가지로 델피시리즈의 하나다. 작가 소개, 세네카 극작품의 주요한 특징, 소포클레스의 원작과의 비교를 통한 장면별 내용분석, 작품 이해를 위한 예제 및 모범답안 등이 특징적이다. 역시 영문판의 중역본이지만, 편집과 교정은 비교적 깔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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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희곡선 범우문고 170
테렌티우스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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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형제들>(이 책은 <형제>라고 표기함)은 앞서 읽었으므로 생략하고, <포르미오>에 대해서만 다룬다. 해설에 따르면 이 희극은 그리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쓴 <고발자>를 번안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촌 형제 사이인 페드리아와 안티포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각 좋아하는 여인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줄거리 자체는 너무나 익숙하여 특별하지 않은데 작가는 상대 여인의 처지와 신분을 범상하지 않게 설정하고 부자간에 처리 의사를 달리하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도록 하고 있다.

 

포르미오는 작품의 표제이자 주인공으로 식객이다. 1막에서 게타는 그를 거만하다고 평하며, 신이 그를 왜 빨리 죽여버리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판은 처음에 썩 좋지 않게 퍼진 듯하지만 극이 진행됨에 따라 그의 올바른 면모를 확연히 알 수 있다. 4막에 가면 게타가 그에게 감탄하는 대사가 나올 정도다.

 

(포르미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걱정할 것 없어. 이런 일이 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발을 내디딘 곳이 어딘지 모르는 바도 아니야. 너도 봐온 것처럼 나는 여기저기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많이 처리해 왔어. 내 솜씨를 아직도 모르나. 너도 누가 나한테 불평하는 말을 어디서든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야. (P.120, 2막 제2)

 

그는 머리 회전이 빠른데다 용기 있고, 세속적이면서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초연한 신사다운 면모도 갖추고 있다. 위의 본인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퍽 강한 인물이다. 이러한 포르미오는 두 젊은이가 소망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 데미포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주장할 수 있는 당당함과 그가 보여준 절묘한 계책이 이 작품의 압권이다.

 

(데미포) 농담할 때가 아냐. 자네는 우리 집에서 그 계집을 내쫓을 준비나 하게. 아니면 내가 밖으로 쫓아낼까. 포르미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포르미오) 그 여자에 대해 자유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신다면, 저는 재판을 끝없이 끌고 갈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데미포님. (P.128, 2막 제3)

 

페드리아와 안티포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다. 페드리아는 데미포에게 안티포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 이후에는 노예 판피라를 구해낼 방안을 찾지 못해 쩔쩔맨다. 그래도 안티포에 비하며 훨씬 낫다. 안티포는 비겁하고 무능한 인물이다. 안티포는 파니움과의 비밀결혼을 아버지 데미포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자 두려움 때문에 결혼을 후회하며 자신의 신상에 관한 사안인데 오히려 사촌 형과 게타에게 처리를 맡기고 내뺄 정도다. 뒤 대목에서는 페드리아의 문제 해결을 위해 게타에게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재촉하기에 바쁘다.

 

(안티포) 나는 내가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페드리아와 게타에게) 두 사람에게 파니움과 내 목숨을 부탁해. (도망친다) (P.111, 1막 제4)

 

(안티포) 게타, 부탁이야. 형을 위해 뭐 좀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게타) 도움을요? 어떤 도움인데요?

(안티포) 제발, 궁리 좀 해봐. 형이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게 해서 안 되잖아? (P.140-141, 3막 제3)

 

고전 희극의 특징 중 하나는 배배 꼬인 사건이 우연적 요인에 의해 원만하게 술술 풀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숨겨놓은 자기 딸을 조카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클레메스는 우연의 일치로 이미 안티포가 파니움과 결혼하였음을 알게 된다. 클레메스가 외도할 때 스틸포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포르미오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음도 드러난다.

 

안티포의 아버지는 아들 못지않게 쫀쫀하고 치사한 성격의 보유자다. 아들의 비밀결혼을 깨뜨리려고 포르미오에게 준 돈이 클레메스의 비밀이 밝혀지며 불필요해지자 아깝게 여겨져 그에게 돌려달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면서 클레메스로서는 원치 않던 결과, 즉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고 만다.

 

마지막 장은 노예 판피라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며 페드리아와 포르미오가 상호 덕담을 주고받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 희극에서 즐겁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인물은 노예상인과 부인에게 면목이 없게 된 클레메스, 그리고 포르미오에게 건네준 돈이 아까운 데미포뿐이다. 두 젊은이와 그들의 여인, 그리고 포르미오는 즐거운 심정이다.

 

이제 책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문고 판형에 두 편의 희극을 싣다 보니 빽빽하게 수록한 감이 없지 않다.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중역판으로 추정된다. 대중적이지 않은 작가와 작품인데 첫머리에 이 책을 읽는 분에게라고 해서 작품 개요를 두 면에 걸쳐 소개한 게 전부다. 작가 소개조차 없다. 그래도 <포르미오>는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므로 불평하기 미안하다. 작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기왕에 동일한 번역자에 의해 문고판으로 간행된 아리스토파네스와 세네카의 희극을 포함하여 통상적인 판형으로 재출간되었음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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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 베토벤 순례 거장이 만난 거장 8
리하르트 바그너 지음, 홍은정 옮김 / 포노(PHONO)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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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바그너가 베토벤에 관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모두 5편을 수록하였는데, <베토벤 순례>와 마지막의 <베토벤>이 핵심적이며, 나머지 세 편은 음악회 프로그램 해설문 성격에 가깝다. 바그너가 베토벤을 얼마만큼 숭배하였는지와, 자신의 음악을 베토벤과 어떻게 결부시키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 베토벤 순례

연령상의 차이로 인해 바그너는 실제 베토벤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이 역사적 대가를 방문하는 내용의 글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쓴다. 예술적 가치로서는 뛰어나지 않을지 몰라도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도중에 마주친 영국인 때문에 여정과 방문이 꼬여버리는 설정과 듣지 못하는 베토벤이라는 현실 자각 등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이 글에서 두드러진 점은 바그너가 이 작품에 반영하고 있는 깊은 함의 때문이다.

 

기악 작곡가로서의 압도적 성공에 비해 오페라 작곡가로서 베토벤은 <피델리오> 한 편을 거듭된 실패를 겪은 후 겨우 인정을 받게 된다. 바그너는 전무후무한 오페라 작곡가로 평가받는데 자신의 오페라를 악극이라고 칭한다. 음악과 드라마가 결합하였다는 걸 강조하는데, 이것의 기원을 베토벤에게서 찾고 있다.

 

이제 이 세상에는 내가 다시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게 만드는 극본이 없네요! 만약 내가 정말로 원하는 오페라를 만든다면, 아마 사람들은 모두 도망칠 거예요. 왜냐하면 거기서는 아리아, 이중창, 삼중창은 물론이거니와 지금처럼 오페라를 구성하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을 테니까요. [......] 진정한 음악 드라마를 쓴 사람은 바보로 여겨질 테고. (P.41)

 

베토벤은 진정한 음악 드라마를 쓸만한 대본이 없으므로 더 이상의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대신 합창이 들어간 교향곡을 작곡하였다고 바그너에게 말한다. 성악과 기악의 일치를 추구하는 작품을 쓰기 위해 앞으로 스스로 대본을 집필하게 될 바그너가 자신의 정통성을 베토벤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1846년 드레스덴에서 열린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 보고서

저자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9번 연주를 거행하게 된 경과를 전반부에 기술하고 있고, 후반부는 이 곡에 대한 악장별 해설이다. 예산 부족과 청중 반응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면서도 뚝심 있게 연주회를 밀어붙이고 대성공을 거둔 바그너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특히 프로그램 해설은 더없이 주관적이고 낭만적인 표현과 문장으로 일관하고 있어 바그너 개인 및 당시 시대상의 성향을 알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도 앞의 글과 연계하여 이 교향곡의 기악적 및 성악적 요소 간의 관계를 다룬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 같은 시작으로 베토벤 음악의 결정적 특징이 분명히 드러났다. 앞선 세 악장에서 지켜오던 특성, 무한하고 불확실한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수 기악의 특성을 벗어던진 것이다. 이제 음악 작품이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촉구한다. (P.70)

 

3.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4. 베토벤의 <코리올란 서곡>

 

5. 베토벤

이 책의 분량 절반을 차지하는 이 글은 베토벤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바그너가 베토벤 음악의 미학적 위대성을 탐구한 일종의 논문이다. 앞에 실린 글들과는 의도와 형식이 다르며, 내용도 난삽하고 두서없어 저자의 논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베토벤 순례>에서 제시한 바 있는 음악 드라마에 관한 본인의 주장을 한층 강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바그너는 음악의 미학적 본질을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받아들여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음악은 인간의 꿈과 같은 근원적 내면세계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여 현상 세계에 인식하도록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 형태라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당대 음악이 본연의 숭고하고 순수한 상태”(P.127)라는 본질을 놓치고 표피적인 현상에 매몰되고 있다고 비판하며, 오직 유일하게 베토벤만이 바흐의 뒤를 이어 음악의 본질을 꿋꿋이 추구하고 있음을 밝힌다.

 

음악을 세계의 본질에 대한 가장 내면적인 꿈 이미지의 발현이라고 부른다면, 셰익스피어는 깨어 있으면서 계속 꿈을 꾸는 베토벤으로 간주할 수 있다. (P.169)

 

바그너는 셰익스피어를 높이 평가하면서 베토벤과 나란한 위상을 부여한다. 기악과 성악, 음악과 드라마를 결합하여 보다 고도의 예술 미학을 추구하고자 하는 바그너가 보기에 베토벤에서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사례가 9번 교향곡이다. 이 곡에 대한 그의 평은 숭배와도 같다. 물론 베토벤을 계승하여 이를 완성한 것은 바로 바그너 자신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베토벤의 음악 미학을 쓴 글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음악적 지향점의 정당성과 위대성을 간접적으로 옹호하는 의도도 지니고 있다.

 

한편 1870년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한 해이기도 하다. 통일 독일 제국의 탄생을 목전에 둔 시기에 바그너의 애국주의적 내지 국수주의적 감정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무엇보다 바흐와 베토벤으로 이어지는 숭고하고 진실한 음악이 우월한 독일 정신의 반향이자 산물이라고 시종일관 반복하는 대목은 어째서 그가 훗날 히틀러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는지 짐작케 한다.

 

음악가의 탄생뿐 아니라 독일 민족의 재탄생도 기념하라. 독일 군대의 승리가 의미하는 것으로 베토벤의 의미를 채워보라. 베토벤 음악에 감동한 마음의 에너지로 독일 민족이 행한 업적의 힘을 느껴보라. 그러면 이 둘의 의미를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민족의 업적과 베토벤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승리의 행위가 진정한 독일 제국의 작품들을 확립하게 하라. 그러면 위대한 베토벤의 작품들이 독일 정신의 고귀한 업적을 이끌어 갈 것이다. (P.200)

 

이 글은 최근에 다른 번역본 - <베토벤 음악철학의 시도>(원당희 역) -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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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
테렌스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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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와 마찬가지로 델피시리즈로 기획되었으므로 작품 분석을 위한 학습 목적의 구성은 다른 책과 동일하다. 이 책은 편집과 교정 면에서 큰 오류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책에 비해 차별성을 보인다. 역시 영문판 중역본이다. ‘형제의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표기한 것은 데메아와 미키오 형제, 아들들인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 형제를 지칭한다. 데메아는 자신의 장남인 아에스키누스를 자식이 없는 미키오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래서 아버지 형제가 각각 아들 형제를 맡아 키우게 된 상황이다.

 

기원전 160년에 상연된 이 작품은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과 올바른 자녀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P.131)

 

이 희극은 테렌티우스의 대표작으로 가장 최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내시>에 비해서 구성면에서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진일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주제는 보통 위와 같이 언급되는데, 확실히 두 형제의 아들 양육 방식이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자녀 교육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사안이다. 무엇이 최선의 양육 방식인지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미키오) 나는 자식을 키우는 데에 존경받을 일을 하거나 관용을 베푸는 것이 엄격하게 두려움을 주어 키우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바로 이점에서 나와 형님은 의견을 크게 다르게 한단 말이야. [......] 형은 아이들 양육에는 권위를 갖고 두려움을 주는 것이 사랑을 베푸는 것 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P.26, 1막 제1)

 

이처럼 데메아와 미키오는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들들을 키운다. 방식이야 어쨌든 두 아들이 의도처럼 훌륭하게 자란다면 좋겠지만, 2막에서 크테시포가 창기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미 데메아의 기대에 어긋났음을 독자는 알게 된다. 반면 오명을 덮어쓰면서도 동생을 위해 창기를 뚜쟁이에게서 빼돌린 아에스키누스의 행동은 미키오의 교육방식이 더 성공적이라는 데 무게를 실어준다. 미키오에게 쏠린 마음도 오래가지 못한다. 3막에서 아에스키누스가 팜필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시켰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상황 만을 볼 때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주기 어려운 셈이다.

 

자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고 친절한 미키오를 세상 사람들은 존경하고 자식은 공경하고 사랑한다. 미키오는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의 잘못이 드러나도 그들을 탓하고 화내는 대신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들들이 자신의 여자와 짝을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에 이러한 관대함까지 더해졌으니 아들들이 데메아보다 미키오를 더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루스는 데메아에게 그의 유익한 말씀이 여기서는 쓸모가 없다고 위로하지만 사실은 비꼬고 있다.

 

(크테시포) 바로 그거야. 내가 바라는 거는 아버지가 큰 병에는 걸리지 않은 채 이번 주에만 한 사나흘쯤 누워 계셨으면 좋겠어. (P.74, 4막 제1)

 

크테시포는 심지어 이렇게 바라기조차 한다. 반면 미키오에 대한 아에스키누스의 심정은 전혀 다르다.

 

(아에스키누스) 아버지란 으레 저래야 하는 걸까? 아들로서의 내 도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만일 형제나 친구라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그러니 난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어. 늘 마음속에 고마움을 간직해야 돼. (P.97, 4막 제5)

 

시루스에 의해 이리저리 헤매게 되고, 아들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격함과 고지식함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데메아와 그렇지 않은 미키오, 누가 봐도 미키오의 판정승이다.

 

작가는 이 희극의 진정한 주인공을 미키오가 아니라 데메아로 여긴다. 그는 미키오의 온화함을 데메아의 말처럼 그의 넉넉한 재산과 게으른 성격의 산물로 간주하는 듯하다. 미키오는 데메아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자식 교육에 노심초사 애쓰지도 않고 자유방임으로 풀어놓는다. 미키오의 방식을 따른다고 모두가 아에스키누스처럼 잘 자란다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데메아가 자신의 기본을 유지한 채 조금만 더 미키오처럼 온화해진다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데메아의 각성이 펼쳐진다.

 

(데메아) 이제부터라도 내가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 모두들 나를 멸시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호감을 사고 아버지답게 보이고 싶어. 그것을 돈과 친절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P.114, 5막 제4)

 

데메아의 변신은 놀랍다. 아들들의 잘못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외로이 지내게 될 팜필라의 어머니와 미키오가 결혼하도록, 미키오의 성문 밖 땅을 가난한 헤기오에게 주도록 주선한다. 미키오의 노예 시루스와 그의 아내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독립 자금을 빌려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미키오의 완강함에 부딪히는데,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모두가 미키오의 신상과 재산에 관련한 사안인데 데메오가 선심 쓰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중 인물 네 명 중 심정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오직 데메아라는 점이다. 아들들의 변화는 장래에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다. 미키오는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기술되었으니 별로 바뀔 게 없다. 데메아는 180도로 돌아선다, 그것도 매우 급작스럽고 과격하게. 작가가 데메아의 변신을 다소 무모할 정도로 설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로 바람직하고 훌륭하다고 믿어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외관상 미키오의 방식에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방식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데메아의 개심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추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희극답게 모든 인물이 즐겁고 만족스러운 듯 막을 내리지만 부리나케 극을 끝마치는 작가의 태도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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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훔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 외국편 1
염명순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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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는 많은 예술가가 그러하듯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더 유명하게 된 화가다.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은 그저 자기 귀를 자른 미치광이 화가 정도로 더 기억한다. 이 책은 그림으로 만난 세계의 미술가들시리즈 중 하나인데. 청소년 대상으로 고흐의 생애와 미술 세계를 안내하고자 기획한 책이다. 일반적인 책보다 판형이 더 큰데, 주요 작품들을 고급용지에 올컬러로 보다 큼지막하게 수록하여 화집의 성격을 강조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며 고흐의 대표작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양면에 걸쳐 수록된 그의 작품들은 이러하다. 감자 먹는 사람들(P.48-49), 별이 빛나는 밤(P.116-117), 빈센트의 방(P.128-129),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P.162-163), 올리브나무(P.164-165), 실편백나무가 서 있는 길(P.170-171), 까마귀가 나는 밀밭(P.186-187). 단면을 차지하는 작품들의 목록은 해바라기, 자화상, 씨 뿌리는 사람, 탕기 영감의 초상, 가셰 의사의 초상 등등 몇 배나 숫자가 많다.

 

고흐 하면 흔히 인상주의를 떠올리는데, 의외로 그가 인상주의에 경도된 기간은 매우 짧음을 알 수 있다. 파리로 오기 전 그의 경력 초기는 책에서도 지적되었듯이 네덜란드 미술의 전통에 따라 어두운 색상으로 일관한다. 소재도 감자 먹는 사람들, 탄광 광부, 옷감 짜는 사람 등 가난한 노동자 계층을 주로 택하였다. 그의 후기작에서도 농부들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는 걸 보면 그의 성향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빈센트가 즐겨 그린 이러한 그림의 소재를 통해 이 화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그림은 결코 나올 수 없었을 터입니다. (P.38)

 

그의 삶에서 중요한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그의 동생 테오인데, 동생이 아니었다면 고흐의 예술가 생활은 단명했으리라. 형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박봉을 쪼개 생활비를 보내준 테오. 형이 죽자 얼마 지나지 않아 갓난아기를 남긴 채 역시 세상을 떠난 테오. 죽어서나마 세상의 갈채를 받게 된 형의 뒤늦은 인정에 저승에서나마 기뻐했으리라. 그리고 고갱. 예술가들의 공동생활이라는 고흐의 꿈은 비현실적이다. 일반인들조차도 남들과 함께 생활하기 힘든데, 개성 강하고 유아독존적인 예술가들이 순수한 공동생활 공동작업을 한다? 그들의 짧은 동거는 고흐의 자해라는 비극으로 끝나게 되었으니, 차라리 함께하지 않는 편이 양자에게 나았을 텐데.

 

이 책은 고흐를 태양을 훔친 화가라고 평하지만 내게는 격정과 광기의 화가로 비친다. 그의 격정은 비단 후반부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부에서도 이미 드러난다. 탄광촌에서의 극단적인 전도사의 모습은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다. 사촌 누이에 대한 사랑을 인정받지 못하자 램프 불에 손가락을 태우는 고흐의 태도 또한 범상하지 않다. 격정적이고 극단적인 그의 행동은 결국 자신의 귀를 자르는 상황으로 악화한다.

 

빈센트는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인간의 무시무시한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냥 열정이 아닌 무시무시한 열정은 무슨 뜻일까요? 아마 앞에서 말한 인간을 파멸시키고, 미치게 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열정일 성싶습니다. 빈센트는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열정을 허름하고 쓸쓸한 밤의 카페 내부에 빗대어 이 그림처럼 표현했습니다. (P.108)

 

<밤의 카페>에 대한 화가 자신의 해석이다. 아를르의 한밤중 몇 명의 손님만 자리를 지키는 카페에서 화가는 어떠한 무시무시한 열정을 발견하였을까. 혹 그것은 화가 자신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무시무시한 환상의 연상일지도 모른다.

 

파리로 건너온 이후 그의 화풍은 강렬한 원색과 밝은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인상주의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이라고 하는데, 한낮의 그림은 확실히 과감한 색의 사용과 색상의 강렬한 대비가 두드러진다. 반면 밤을 소재로 한 그림은 어둡고 기괴하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소용돌이치는 대기와 하늘,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꿈틀거리며 비틀린 나무들은 스스로 온전히 서 있지 못하게 된 화가의 몸과 마음을 반영한 게 아닐는지. 유명한 해바라기의 꿈틀거림조차도 왕성한 생명력의 뻗침보다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것 같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생레미 요양원 시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실편백나무가 있는 별이 빛나는 밤>입니다. 이 무렵 그가 그린 실편백나무는 그의 혼란스러운 마음 상태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전에 비해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끼여 있거나, 여기에서 보듯 소요돌이치고 있습니다. 앞의 <추수하는 사람>에서도 보았듯이 일정한 방향으로 소용돌이치는 형태는 이 시기의 큰 특징입니다. (P.160)

 

고흐는 극히 내성적이어서 타인과의 교류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가정도 없는 그가 타지에서 온종일 그림만 그려내는 장면은 성실한 화가의 이미지보다도 외로움에 갇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오로지 그림그리기로만 일관하는 슬픈 자화상을 떠올리게 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자신의 그림은 전혀 이해받지 못한 채로 남과의 대화는 단절되었고 한 가닥 기대하였던 고갱과의 공동생활도 처참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는 버텨낼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음을 그의 마지막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아 정말이지 우리는 오직 그림으로만 말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림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과 이야기하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는 그림에 내 삶을 걸었건만 내 이성은 반쯤은 허물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무렵에 발걸음마저 휘청거린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황금빛 밀밭 속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P.184)

 

성실한 화가 고흐가 남긴 그림은 모두 이천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그의 수많은 그림이 그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후대에 불후의 명성을 남기게 되었으니 인간 고흐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그는 성공한 셈인가. 그의 그림 못지않은 평판을 받은 게 그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라고 한다. 기회가 닿으면 그가 남긴 편지글들을 통해 그의 내면을 좀 더 가까이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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