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
테렌스 지음, 허종 옮김 / 동인(이성모) / 200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시>와 마찬가지로 델피시리즈로 기획되었으므로 작품 분석을 위한 학습 목적의 구성은 다른 책과 동일하다. 이 책은 편집과 교정 면에서 큰 오류 없이 깔끔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다른 책에 비해 차별성을 보인다. 역시 영문판 중역본이다. ‘형제의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을 표기한 것은 데메아와 미키오 형제, 아들들인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 형제를 지칭한다. 데메아는 자신의 장남인 아에스키누스를 자식이 없는 미키오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래서 아버지 형제가 각각 아들 형제를 맡아 키우게 된 상황이다.

 

기원전 160년에 상연된 이 작품은 집안에서 가장의 역할과 올바른 자녀 교육이 어떤 것인가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P.131)

 

이 희극은 테렌티우스의 대표작으로 가장 최후의 작품이다. 따라서 <내시>에 비해서 구성면에서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진일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작품 주제는 보통 위와 같이 언급되는데, 확실히 두 형제의 아들 양육 방식이 확연한 대조를 보인다. 자녀 교육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하면서도 예민한 사안이다. 무엇이 최선의 양육 방식인지 여전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미키오) 나는 자식을 키우는 데에 존경받을 일을 하거나 관용을 베푸는 것이 엄격하게 두려움을 주어 키우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바로 이점에서 나와 형님은 의견을 크게 다르게 한단 말이야. [......] 형은 아이들 양육에는 권위를 갖고 두려움을 주는 것이 사랑을 베푸는 것 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P.26, 1막 제1)

 

이처럼 데메아와 미키오는 서로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아들들을 키운다. 방식이야 어쨌든 두 아들이 의도처럼 훌륭하게 자란다면 좋겠지만, 2막에서 크테시포가 창기와 사랑에 빠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이미 데메아의 기대에 어긋났음을 독자는 알게 된다. 반면 오명을 덮어쓰면서도 동생을 위해 창기를 뚜쟁이에게서 빼돌린 아에스키누스의 행동은 미키오의 교육방식이 더 성공적이라는 데 무게를 실어준다. 미키오에게 쏠린 마음도 오래가지 못한다. 3막에서 아에스키누스가 팜필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임신시켰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 상황 만을 볼 때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주기 어려운 셈이다.

 

자식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고 친절한 미키오를 세상 사람들은 존경하고 자식은 공경하고 사랑한다. 미키오는 아에스키누스와 크테시포의 잘못이 드러나도 그들을 탓하고 화내는 대신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들들이 자신의 여자와 짝을 맺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평소의 온화한 모습에 이러한 관대함까지 더해졌으니 아들들이 데메아보다 미키오를 더 가까이하고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시루스는 데메아에게 그의 유익한 말씀이 여기서는 쓸모가 없다고 위로하지만 사실은 비꼬고 있다.

 

(크테시포) 바로 그거야. 내가 바라는 거는 아버지가 큰 병에는 걸리지 않은 채 이번 주에만 한 사나흘쯤 누워 계셨으면 좋겠어. (P.74, 4막 제1)

 

크테시포는 심지어 이렇게 바라기조차 한다. 반면 미키오에 대한 아에스키누스의 심정은 전혀 다르다.

 

(아에스키누스) 아버지란 으레 저래야 하는 걸까? 아들로서의 내 도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만일 형제나 친구라면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그러니 난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어. 늘 마음속에 고마움을 간직해야 돼. (P.97, 4막 제5)

 

시루스에 의해 이리저리 헤매게 되고, 아들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엄격함과 고지식함으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데메아와 그렇지 않은 미키오, 누가 봐도 미키오의 판정승이다.

 

작가는 이 희극의 진정한 주인공을 미키오가 아니라 데메아로 여긴다. 그는 미키오의 온화함을 데메아의 말처럼 그의 넉넉한 재산과 게으른 성격의 산물로 간주하는 듯하다. 미키오는 데메아처럼 부지런하지도 않고 자식 교육에 노심초사 애쓰지도 않고 자유방임으로 풀어놓는다. 미키오의 방식을 따른다고 모두가 아에스키누스처럼 잘 자란다고 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데메아가 자신의 기본을 유지한 채 조금만 더 미키오처럼 온화해진다면 더욱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데메아의 각성이 펼쳐진다.

 

(데메아) 이제부터라도 내가 친절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너그러워질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시험해보고 싶어. 모두들 나를 멸시하고 있어. 그렇지만 나도 아이들에게 호감을 사고 아버지답게 보이고 싶어. 그것을 돈과 친절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지. (P.114, 5막 제4)

 

데메아의 변신은 놀랍다. 아들들의 잘못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외로이 지내게 될 팜필라의 어머니와 미키오가 결혼하도록, 미키오의 성문 밖 땅을 가난한 헤기오에게 주도록 주선한다. 미키오의 노예 시루스와 그의 아내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독립 자금을 빌려주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미키오의 완강함에 부딪히는데,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모두가 미키오의 신상과 재산에 관련한 사안인데 데메오가 선심 쓰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작중 인물 네 명 중 심정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인물은 오직 데메아라는 점이다. 아들들의 변화는 장래에 기대할 수 있는 영역이다. 미키오는 처음부터 긍정적으로 기술되었으니 별로 바뀔 게 없다. 데메아는 180도로 돌아선다, 그것도 매우 급작스럽고 과격하게. 작가가 데메아의 변신을 다소 무모할 정도로 설정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이 정말로 바람직하고 훌륭하다고 믿어서일까. 그게 아니라면 외관상 미키오의 방식에 손을 들어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의 방식도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님을 데메아의 개심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추고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희극답게 모든 인물이 즐겁고 만족스러운 듯 막을 내리지만 부리나케 극을 끝마치는 작가의 태도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