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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희곡선 ㅣ 범우문고 170
테렌티우스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형제들>(이 책은 <형제>라고 표기함)은 앞서 읽었으므로 생략하고, <포르미오>에 대해서만 다룬다. 해설에 따르면 이 희극은 그리스의 아폴로도로스가 쓴 <고발자>를 번안한 작품이라고 한다. 사촌 형제 사이인 페드리아와 안티포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각각 좋아하는 여인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줄거리 자체는 너무나 익숙하여 특별하지 않은데 작가는 상대 여인의 처지와 신분을 범상하지 않게 설정하고 부자간에 처리 의사를 달리하여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도록 하고 있다.
포르미오는 작품의 표제이자 주인공으로 식객이다. 제1막에서 게타는 그를 거만하다고 평하며, 신이 그를 왜 빨리 죽여버리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처럼 그에 대한 평판은 처음에 썩 좋지 않게 퍼진 듯하지만 극이 진행됨에 따라 그의 올바른 면모를 확연히 알 수 있다. 제4막에 가면 게타가 그에게 감탄하는 대사가 나올 정도다.
(포르미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라도 걱정할 것 없어. 이런 일이 내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발을 내디딘 곳이 어딘지 모르는 바도 아니야. 너도 봐온 것처럼 나는 여기저기서 이와 비슷한 일들을 많이 처리해 왔어. 내 솜씨를 아직도 모르나. 너도 누가 나한테 불평하는 말을 어디서든 아직 들어 본 적이 없을 거야. (P.120, 제2막 제2장)
그는 머리 회전이 빠른데다 용기 있고, 세속적이면서도 경제적 이해관계에 초연한 신사다운 면모도 갖추고 있다. 위의 본인 대사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퍽 강한 인물이다. 이러한 포르미오는 두 젊은이가 소망을 이루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이때 데미포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주장할 수 있는 당당함과 그가 보여준 절묘한 계책이 이 작품의 압권이다.
(데미포) 농담할 때가 아냐. 자네는 우리 집에서 그 계집을 내쫓을 준비나 하게. 아니면 내가 밖으로 쫓아낼까. 포르미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포르미오) 그 여자에 대해 자유 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신다면, 저는 재판을 끝없이 끌고 갈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에요, 데미포님. (P.128, 제2막 제3장)
페드리아와 안티포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다. 페드리아는 데미포에게 안티포를 변호하기 위해 애쓰는 장면 이후에는 노예 판피라를 구해낼 방안을 찾지 못해 쩔쩔맨다. 그래도 안티포에 비하며 훨씬 낫다. 안티포는 비겁하고 무능한 인물이다. 안티포는 파니움과의 비밀결혼을 아버지 데미포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자 두려움 때문에 결혼을 후회하며 자신의 신상에 관한 사안인데 오히려 사촌 형과 게타에게 처리를 맡기고 내뺄 정도다. 뒤 대목에서는 페드리아의 문제 해결을 위해 게타에게 아이디어를 내보라고 재촉하기에 바쁘다.
(안티포) 나는 내가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어. (페드리아와 게타에게) 두 사람에게 파니움과 내 목숨을 부탁해. (도망친다) (P.111, 제1막 제4장)
(안티포) 게타, 부탁이야. 형을 위해 뭐 좀 도움을 줄 수 없을까?
(게타) 도움을요? 어떤 도움인데요?
(안티포) 제발, 궁리 좀 해봐. 형이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게 해서 안 되잖아? (P.140-141, 제3막 제3장)
고전 희극의 특징 중 하나는 배배 꼬인 사건이 우연적 요인에 의해 원만하게 술술 풀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숨겨놓은 자기 딸을 조카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클레메스는 우연의 일치로 이미 안티포가 파니움과 결혼하였음을 알게 된다. 클레메스가 외도할 때 ‘스틸포’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포르미오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음도 드러난다.
안티포의 아버지는 아들 못지않게 쫀쫀하고 치사한 성격의 보유자다. 아들의 비밀결혼을 깨뜨리려고 포르미오에게 준 돈이 클레메스의 비밀이 밝혀지며 불필요해지자 아깝게 여겨져 그에게 돌려달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면서 클레메스로서는 원치 않던 결과, 즉 부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는 상황까지 치닫게 되고 만다.
마지막 장은 노예 판피라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며 페드리아와 포르미오가 상호 덕담을 주고받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결과적으로 이 희극에서 즐겁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인물은 노예상인과 부인에게 면목이 없게 된 클레메스, 그리고 포르미오에게 건네준 돈이 아까운 데미포뿐이다. 두 젊은이와 그들의 여인, 그리고 포르미오는 즐거운 심정이다.
이제 책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문고 판형에 두 편의 희극을 싣다 보니 빽빽하게 수록한 감이 없지 않다. 옮긴이의 약력을 보건대 일본어 중역판으로 추정된다. 대중적이지 않은 작가와 작품인데 첫머리에 ‘이 책을 읽는 분에게’라고 해서 작품 개요를 두 면에 걸쳐 소개한 게 전부다. 작가 소개조차 없다. 그래도 <포르미오>는 국내 유일의 번역본이므로 불평하기 미안하다. 작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기왕에 동일한 번역자에 의해 문고판으로 간행된 아리스토파네스와 세네카의 희극을 포함하여 통상적인 판형으로 재출간되었음을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