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와 거대한 유리 엘리베이터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8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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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속편이다. 전자가 도시와 공장으로 영역이 국한되었다면, 이번 편에서는 스케일이 크게 확장되었다. 위로는 우주공간, 아래로는 땅속 깊이로. 우주에서는 왕꿈틀이라는 외계 생명체와 사투를 벌이고, 땅속에서는 마이너스 랜드를 방문한다. 이 모든 여행의 운송 수단은 바로 유리 엘리베이터. 말이 엘리베이터지 그야말로 만능이며 우주선보다도 최첨단의 기술을 탑재하고 있으니 우주비행사들이 입을 딱 벌릴 만하다.

 

이 안에 있는 한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유리 엘리베이터는 방충격, 방수, 방폭탄, 방탄 그리고 방왕꿈틀이로 설계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안심하고 즐기시길 바랍니다.” (P.94)

 

이 작품은 찰리네 일가족이 총출동하는데, 각자 개성이 명확하다. 침대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3인방 노인네. 그중에서 조세핀 할머니와 조지아나 할머니는 완전 투덜이 전문이다. 웡카 씨뿐만 아니라 독자들마저 짜증 나게 할 정도로 매사에 심술궂고 언제나 투덜거리는”(P.225) 두 할머니는 웡카 씨의 독주를 제어하고 소설에 다소나마 현실성을 부여하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더욱 실제에 가까우리라.

 

가족이 아닌 남을 믿지 못하고, 고령에 침대 생활만 함에도 살려 달라고 악을 써 대며 발버둥치고”(P.122) 있는 그네들. ‘젊음을 되찾아 주는 위대한 약을 앞에 두고 가족과 체면 상관없이 마구 욕심부리고 이기적으로 다투는. 절대 침대를 떠나지 않을 것 같던 그들이 백악관 초대에 빠지지 않으려고 기적적으로 몸을 일으켜 용수철처럼 달려 나가는 장면! 이 소설에서 아쉬운 건 찰리 부모인 버켓 씨 부부의 지나친 소극성과 미약한 존재감이 여전하다는 점이다.

 

갑자기 뒤에서 휘익담요와 침대보 들치는 소리가 나더니 용수철이 피웅 퉁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 노인이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린 것이다. 노인들을 웡카 씨를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다려요! 기다리라구!”

노인들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 넓은 초콜릿 방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P.241)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웡카 씨며, 찰리와 조 할아버지는 충실한 조력자의 구실을 한다. 웡카 씨는 여전히 천방지축이지만, 압도적인 지적 능력을 과시한다. 그는 무시무시한 왕꿈틀이의 정체를 아는 지구상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왕꿈틀이와 결부시켜 유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데 흥미롭다. 게다가 우주와 정반대의 깊은 지하공간인 마이너스 랜드의 존재도 알고 있으며, 여러 번 방문한 적도 있다. 초콜릿 단계를 뛰어넘은 웡카바이트와 바이타웡카가 보여주는 놀라운 약효는 기절초풍할 만하며 침대 3인방이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매혹적인 생산물이 아니겠는가! 한 무제와 진시황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전작과 비교해서 두드러진 차이점은 정부 고위 관료들의 등장과 그들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다. 우주 호텔과 수송용 캡슐의 유리 엘리베이터 조우, 왕꿈틀이의 공격에 맞닥뜨린 대통령과 부통령 이하 각료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조소와 냉소의 완벽한 결합이다. 온통 가짜인 정보국장, 글자 그대로 장부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쓰는 재무보좌관, 쾅쾅 펑펑 부수는 것만 아는 육군참모총장 등은 일차원적인 풍자에 해당하지만, 바보 대통령과 그의 유모 출신 부통령의 역할은 냉소에 가깝다. 실제 권력의 배후세력인 부통령 팁스 양에게서는 최근에 읽은 <마틸다>의 교장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치인 풍자의 가장 압권은 부통령이 부르는 유모의 노래에 담겨 있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했지 / 아하! 이런 얼간이도 정치가가 될 수는 있을걸요. / 유모, , 유모! 정말 근사한 생각이야! / 하고 아이가 맞장구쳤지

[......]

이제 내 나이 여든아홉이니 /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어 버렸다네 / 전부 내 탓이지 / 저 미련한 돼지 같은 녀석이 /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야 (P.104)

 

웡카 씨는 물욕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거대한 초콜릿 공장을 기꺼이 찰리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그는 위대한 약인 웡카바이트와 바이타웡카를 개발하였지만 이것으로 부를 축적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초콜릿과 위 두 가지 약, 그리고 유리 엘리베이터로 뭇사람들의 환상과 욕망을 실현하는 데 만족한다. 그것에 이기적인 욕심을 품지 않는다. 그래서 웡카바이트를 둘러싼 침대 3인방 노인의 다툼에 웡카 씨는 뒷짐을 질 뿐이다.

 

왜 사람들은 터무니없이 욕심부리고 이기적으로 행동할까. 싸우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어야겠다. 보물이 눈앞에 있으면 누구나 예의를 걷어차는군. 정말 불행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야.” (P.166-168)

 

사람들의 욕망과 환상 실현을 위한 웡카 씨의 활동에는 한계가 없다. 이 작품의 전반부가 우주공간, 후반부가 공장 내부와 지하세계라는 수직적 횡단을 오가는 것이 그러하다. 조지아나 할머니의 나이를 마이너스에서 메이플라워호 당시까지 극단적으로 늘려놓는 장면도 그러하다. 미국 대통령과 전 세계가 지켜보는 상황에서도 눈가에 반짝 웃음이 스치며 예상 밖의 행동을 거침없이 벌일 수 있는 게 바로 웡카 씨다.

 

우리는 알고 있다. 웡카 씨가 설명이 곤란한 대목에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슬쩍 넘어가려 한다는 걸. 작가가 그려내는 웡카 씨의 종횡무진한 활약에는 꼼꼼한 이성의 힘으로 파헤칠 경우 수많은 빈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작뿐 아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있을 법하지만 너무나 과장하였기에 사실상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그럼에도 독자는 웡카 씨의 돈키호테 같은 언행에 도리어 호감과 공감을 느끼며 결코 그를 미워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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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양장) - 로알드 달 베스트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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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알드 달의 동화는 상투적이지 않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어리지만, 결코 약하지 않다. 그를 괴롭히는 나쁜 어른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대신 합당한 복수를 실행한다. 동화 속 주인공은 항상 아름답고 착하고 모범적인 인물이라는 도식의 틀을 그는 거부한다. 이러한 의외성과 (아이의 입장에서) 반격의 쾌감이 그의 작품의 매력이다.

 

<마틸다>는 나쁜 어른 vs 착한 아이의 대결 구도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주인공 마틸다의 부모는 한마디로 최악의 부모다. 그들은 딸에게 매우 차별적이며, 마틸다의 빼어난 능력을 외면한다. 속물적이고 탐욕적인 동시에 중고차 사기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도덕적 불감증도 지녔다. 마틸다를 무시하고 폭언도 서슴지 않는다. 마틸다는 복수와 반격을 가한다. 초강력 접착제 소동, 유령 소동, 머리 염색 소동이 그것이며, 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세상을 접하지 않았다면 소동은 계속되었을 것이다.

 

하니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마틸다보다 한층 더한다. 부모의 사별 후 보호자가 된 이모에게 갖은 학대와 착취를 겪은 그녀는 불행하게도 마틸다만큼 강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말처럼 어렸을 때 싹이 짓밟혀 버렸기에 성인이 된 후 집을 뛰쳐나와 오두막에 초라하게 머무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던 셈이다.

 

암흑과 악몽의 유년 시절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그들이 맞닥뜨린 거대한 적은 트런치불 교장 선생님이다. 이 동화에서 트런치불 교장은 나쁜 교사로서 거의 신화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크고 당당하며 거친 외양과 태도. 비교할 데 없이 막무가내인 언사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 등. 교육자로서 전혀 부적절한 아이들에 대한 험담과 적대감의 노골적이고 반복적인 표출은 물론이다. 투포환 하듯이 멀리 집어던진 아만다, 머리칼을 움켜쥐고 들어 올린 루퍼트, 두 귀를 잡고 높이 들어 올린 에릭, 한쪽 다리를 잡고 거꾸로 들어 올린 윌프레드. 현실로는 불가능한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트런치불 교장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할 정도다. 악역이지만 워낙에 개성적이며 압도적인 캐릭터이기에 강한 인상을 주는 사례에 해당한다.

 

하니 선생님이 자신의 초라한 오두막으로 마틸다를 데리고 간 것은 무슨 목적이었을까? 분명 의식적으로는 아니었겠지만, 마틸다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인식과 그의 초능력의 목도는 혹시 그가 자기의 뒤엉킨 삶을 해결해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둘 다 어른에게 고통받는 어린 시절이라는 유대감에 마음을 터놓는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일 수도 있다. 어쨌든 하니 선생님의 집 상태와 사는 모습을 알게 된 마틸다는 하니 선생님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직감하였다.

 

하니 선생님은 마틸다를 만나서 잃어버린 삶을 되찾을 수 있었고, 마틸다는 반대로 자신을 아껴주고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주는 어른을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마틸다의 부모는 끝까지 우리의 기대를 벗어나지 않고 기꺼이 마틸다를 던져버리고 외국으로 도망간다. 더는 퉁명스러운 부모에게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게 된 마틸다가 하니 선생님과 함께 행복하고 정상적인 아이로 살아갔을 거라고 믿는다.

 

현실 세계에서 마틸다의 부모와 트런치불 교장 선생님 같은 어이없고 괴팍스러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다. 너무나 극단적인 악인의 유형이기에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로알드 달은 이렇게 선과 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인물형을 표현한다. 여기에 대한 작가의 의견을 작품해설에서 읽어볼 수 있다.

 

나는 내 인물들이 아이들에게 재미있게 느껴지게 하기 위해서는 좋은 점이나 나쁜 점을 과장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못되고 잔인하다면 아주 못되고 잔인하게 만든다. 만일 못생겼다면 아주아주 못생기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재미있고 효과적이다.’

 

동화의 제일 미덕을 무엇으로 볼지는 의향이 다를 수 있다. 혹자는 재미를, 혹자는 교훈성을 중시할 수 있다. 마틸다는 작중에서 재미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는 작가의 의견과 동일하다. 동화를 쓰는 주체는 어른이지만, 읽는 주체는 결국 아이다. 동화에 지나치게 어른의 사고와 이념을 투영한다면, 읽는 사람으로서는 마뜩잖으리라. 로알드 달 이야기의 황당함은 재미를 우선 추구하는 데서 오는 보수적인 어른들의 당혹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리라.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마틸다의 독서 목록이다. 조숙하고 영특한 마틸다는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혼자서 도서관을 찾아가서 펠프스 여사의 배려로 여러 책을 읽는다. 어쨌든 청소년들에게 읽혀도 괜찮을 수준의 책으로 봐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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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난드로스 희극
메난드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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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희극에서 시작한 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 희극을 거쳐 드디어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희극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메난드로스는 후세 영향력에 비해 고대 그리스 희곡의 4대 작가와는 달리 인지도가 매우 약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작품이 대부분 유실되어 온전히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는 데 있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집에 수록한 <심술쟁이> 정도가 그나마 양호한 상태라고 한다. 확실히 수록된 4편의 작품 중 이 희극만이 문학작품으로서 감상할 만한 상태일 뿐 나머지 작품은 단지 작품의 얼개와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그칠 뿐 감상하기에는 누락된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메난드로스의 희극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한데, 옮긴이의 서문에서 그 의의를 인용한다.

 

메난드로스는 로마의 희극작가들인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번역.번안을 통해 르네상스 희극과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몰리에르, 독일의 레싱 같은 작가들의 희극에 큰 영향을 줌으로써 서양 근대 희극의 아버지가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P.7-8)

 

1. 심술쟁이 [염세가]

 

프롤로그를 등장인물이 아니라 판 신이 담당하는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무려 세 면에 걸쳐 작품의 배경과 현재까지의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프롤로그만 읽더라도 대충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겠구나를 알 수 있는 정도다. 게다가 판 신은 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소스트라토스에게 마술을 걸어 크네몬의 딸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친절하게 덧붙인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메난드로스 희극에서 막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코로스는 비중과 역할이 대폭 축소되어 단지 막을 구분하는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전락하였음도 눈에 띈다. 선배 작가들의 그것이 가지는 중요성과 의미를 비교하면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크네몬) 사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 자기 이익을 위해 계산하는지 보고는 / 비뚤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이해관계를 떠나 / 서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지. / 그게 내 잘못이었어. (P.57, 4)

 

이 희극의 대표 인물인 크네몬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타이틀도 두 개이리라. 그는 염세가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길 싫어하여 딸 하나와 함께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아간다. 자체가 크게 문제 될 거는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니까. 하지만 크네몬은 성격이 괴팍해서 맞닥뜨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구 행패를 부린다. 그래서 심술쟁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요, 무서운 존재로 귀신에 씌웠다고 할 정도다. 크네몬이 극 중에서 고통을 겪고 사람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의붓아들 고르기아스에게 위임한 그가 마지막 막에서 시콘과 게타스에 당하는 것도 여전히 그가 세상과 어울리기를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소스트라토스가 소녀와 결혼에 성공하게 된 까닭, 그리고 그가 고르기아스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키도록 애쓴 까닭. 이건 모두 그들의 품성이 크네몬과 달리 뛰어난 까닭이다. 특히나 고르기아스는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존경할 정도로 고귀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성공과 행복에 관객조차도 기뻐할 정도다.

 

2. 중재 판정

 

이 희극은 제1막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5막 끝부분도 없어졌다. 중간중간에도 손상된 대목이 제법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공통된 형편이니 그저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접해본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부정하게 태어난 아기의 유기. 주운 아기의 패물과 신분의 정체. 이것들은 고대부터 설화와 희곡의 제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내 팜필레의 부정에 실망한 남편 카리시모스는 가출하여 친구 집에서 머무른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반응에 일응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곧이어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독자는 카리시모스의 위선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관건은 카리시모스의 비도덕성이다. 그는 축제 때 한 소녀를 강간해서 아기를 배게 만들었다. 그 비극의 당사자 소녀가 지금의 아내 팜필레라는 것이 작품 구성의 묘미다. 자신의 부정으로 생긴 결과를 아내의 부정으로 오해하고 극렬하게 반응하는 남편의 태도. 모든 오해와 갈등이 해소된 것으로 극은 화기애애하게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결과만 좋으면 중간의 잘못은 용인되는가?

 

3. 사모스의 여인 [결혼계약]

 

이 희극도 제1막과 제2막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데메아스와 니케라토스의 자식인 모스키온과 플랑곤은 혼인 전에 아기를 낳고 만다. 이실직고하면 되었으련만 아무래도 혼전임신이라는 불명예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무리수를 쓰다 보니 사태는 더욱 악화하고 만다. 데메아스는 그 애가 자신의 동거녀 크뤼시스와 모스키온 사이의 아기라고 오해하고 사모스의 여인 크뤼시스를 집에서 내쫓는다.

 

(데메아스) 데메아스, 너는 지금이야말로 / 남자가 되어야 해. 그녀를 향한 그리움 따위는 잊어버리고 / 사랑도 그만둬! 일어난 일은 네 아들을 위해 / 되도록 덮어버리고, 그 사모스 출신 미인은 / 집에서 거꾸로 내던져버려. 지옥으로 말이야. (P.147, 3)

 

우리는 여기서 데메아스의 고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정을 저지른 여인과 사랑하는 아들 둘 다를 모두 버릴 수는 없는 처지에서 그는 결국 아들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아들의 착하고 순수함을 믿으며. 이를 알 리 없는 아들은 아기를 돌보기로 해준 크뤼시스를 계속 감싸고 오해는 증폭된다. 결국 아들에게 폭발하는 데메아스!

 

(데메아스) 내가 왜 고함을 지르느냐고 묻는 게냐? 이 인간쓰레기야! / 말해봐, 네가 정말 책임지겠냐? 그러고도 내 얼굴을 / 똑바로 쳐다보며,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냐? (P.157, 4)

 

너무나 인간적이다. 메난드로스의 희극을 읽다 보면 그와 셰익스피어 간에 이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다. 오히려 백여 년 앞선 선배들과 괴리감을 더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가 신화나 영웅의 발자취가 아니라 정면에서 사람과 그들이 어우러져 아웅다웅 사는 사회를 다루고 있어서다. 사람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변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4. 삭발당한 여인

 

옮긴이에 따르면 작품의 절반 정도만 복원되었다고 한다. 아들딸 쌍둥이의 유기, 훗날 자신의 쌍둥이 누이에게 애정을 품게 된 아들, 버려졌던 패물에 의해 밝혀지게 된 신원. 우연과 행운이 결합하고 오해가 더해져 사건이 증폭되는 구조는 여전하다.

 

프롤로그를 오해의 신이 담당하는 점은 <심술쟁이>와 비슷하다. 역시 여기의 신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여 극의 진행에 역할을 담당한다.

 

(오해) 그는 본성이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 내가 그를 자극했느니라. 드러날 것이 다 드러나고 / 그들이 드디어 가족을 찾게 하려고. / 이를 역겹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 생각을 바꾸도록 하라. (P.184-185, 1)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삭발당한 여인 글뤼케라의 운명이다. 그녀는 폴레몬이라는 군인의 동거녀인데, 쌍둥이 모스키온과의 관계를 오해한 그에게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오해가 풀리고 그녀는 폴레몬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에게 최선의 결말인지는 의심스럽다. 일단 극 중에서 보이는 폴레몬의 성격과 행동은 주인공의 배우자감으로 썩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글뤼케라가 그의 동거녀가 된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탓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파타이코스, 모스키온, 폴레몬에게는 분명 행복한 결말이라는 희극 정신에 충실하지만 글뤼케라만 놓고 보면 다른 짐작도 가능하다. 다만 워낙에 소실된 부분이 많은 탓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섣부르게 판단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음을 언급한다.

 

메난드로스의 희극과 그의 작품세계는 더 많은 파피루스가 발견되고 계속된 작품 복원이 가능해진 후 진정한 가치를 헤아릴 수 있으리라. 다만 이 책에 수록된 얼마 되지 않는 단편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그와 후대 희극작가들의 친연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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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The Complete Maus 합본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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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개인의 자서전이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처절한 체험을. 그것은 과거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에도 개인에게 아픔을 주는 상흔으로 남아 있다. 홀로코스트를 다룬 책은 많이 나왔고 개인의 체험을 수록한 책도 역시 많이 출간되었다. 어찌 보면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도 서서히 역사 속의 사건으로 묻혀간다고 볼 수 있다. 전혀 새롭지 않고 상당히 익숙한 소재를 다룬 책임에도 불구하고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은 이 책이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그것도 아주 뛰어나게 성취했기 때문이다. 만화로의 접근이라는.

 

이 책은 만화책이다. 여느 만화와는 닮지 않았다. 이 안에는 유머, 즐거움, 공상처럼 흔히 떠올리는 만화의 요소가 일체 들어있지 않다. 유익함을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학습만화와 일부 공통점을 지니지만 이 책은 학습만화도 아니다. 게다가 어떤 유형의 만화에도 항상 들어가 있는 코믹적 요소가 여기에는 없다. 이 만화를 보고 읽는 과정은 어쩌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일 내 작품이 독자들에게 많은 충격을 준다면, 그건 만화에 실릴 수 없다고 생각되던 내용이 실려 있기 때문일 거예요. 만화라는 장르에 포용할 수 없다고 간주되던 사고방식 말이에요. 그리고 독자를 즐겁게 만드는 재미있는 이야기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사실 역시 일종의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거예요. (P.307-308)

 

글을 통한 경험은 머릿속에서 재구성을 하는 과정에 상상이 추가되어야 하므로 직접적이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반면 만화 같은 시각 매체는 보는 즉시 직접적으로 작가의 메시지가 머릿속에 들어오므로 한결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는 장점을 지닌다. 이 책이 대중과 독자에게 미친 충격과 파급력은 만화였기에 이례적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아버지인 블라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나치와 히틀러의 폭압을 오롯이 맨몸으로 맞닥뜨리고 헤쳐나간 블라덱의 뛰어난 생존력에는 감탄할 따름이다. 물론 그의 생존은 많은 부분 행운 덕분이지만 그의 준비력과 적응력, 맹렬한 삶의 의지가 없었다면 그 역시 아우슈비츠를 극복하기는커녕 이전에 진작 스러졌으리라.

 

그렇다고 블라덱을 존경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의 현재의 삶의 모습, 즉 그와 말라의 관계, 그와 아들 슈피겔만의 관계를 볼 때 전쟁이 남긴 상흔이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을 갉아먹은 정도를 짐작케 한다. 그에게 나치와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진행형이며,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해소될 것이므로. 그런 그를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그런 아들을 그도 이해하지 못한다. 각자가 겪은 역사 체험이 다르기에 서로 간에 공감이 불가능할 수밖에. 같은 아우슈비츠 체험을 하였다 하더라도 생존자가 모두 블라덱과 같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아냐처럼 끝내 자살을 하는 사람, 블라덱처럼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반면 적어도 겉으로는 상흔을 극복하고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으니.

 

이 만화는 특이하게 인물을 사람이 아닌 동물로 표현한다. 유대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미국인은 개 등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끔찍한 상황과 장면을 사람으로 그리기보다는 동물로 묘사하는 게 훨씬 부담감이 덜하고 덜 직접적일 수 있다는 점도 있다. 또한 제2권 첫머리에 인용된 독일의 신문 기사 내용처럼 당시 독일인은 미키 마우스로 상징되는 가장 저열한 동물인 쥐를 유대인과 동일시하도록 선동하고 있으므로 유대인=쥐는 자연스럽게 연결 가능하다. ‘톰과 제리처럼 쥐를 괴롭히는 동물은 당연히 고양이이므로 독일인=고양이도 저절로 성립한다.

 

(프랑소와즈) 말도 안돼요! 어떻게 아버님이 인종차별을 하실 수 있죠? 마치 나치가 유태인 얘기하듯 흑인을 대하시는군요.

(블라덱) 난 네가 이럴 줄은 정말 몰랐다. 검둥이는 유태인과 비교할 수도 없어! (P.263)

 

나치의 인종주의로 비극을 겪은 유대인. 직접 원인제공은 물론 나치지만, 이 책 속에 나오는 폴란드인도 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나치의 선동이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 감정을 촉발했던 것이다. 온갖 고통을 겪은 블라덱이라면 이러한 인종주의에 극심한 혐오를 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우리는 그가 드러내는 흑인 비하 사고와 발언에 충격을 받는다. 나치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그의 시각에 그래도 자신들이 흑인보다는 우월하다고 여긴다면, 우리가 나치를 비판할 윤리적 토대는 너무나 취약하기 그지없다. 블라덱의 관점은 오늘날 미국과 유럽 사회에 뿌리 깊은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와 반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치의 망령은 아직 전세계에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지분을 계속 요구하는 셈이다.

 

부록으로 조엘 개릭에 의한 작품 해설이 있어 아트 슈피겔만의 작품세계와 그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 과정 및 사용 기법을 세부적으로 알 수 있어 도움이 된다. 쉽게 쉽게 그린 만화가 아니라 내용, 표현 및 크기, 배치 등 세심하게 고민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1부와 2부로 각각 출판된 두 권의 책을 하나로 합권하였다. 튼튼한 양장본, 좋은 종이로 만듦새에 별 불만은 없다. 유일한 아쉬움은 다만 판형이 좀만 더 컸으면 하는 것, 그림과 글자가 작고 보기에 답답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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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야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심지영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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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이후의 희극은 문제극 또는 로맨스극으로 구분된다. 이 작품 또한 문제극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진정한 낭만 희극이 성립하려면 등장인물 간 갈등이 모두 해결되고 모두-악인은 제외하고-가 행복한 결말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올리비아는 얼떨결에 바이올라의 오빠인 세바스찬과 결혼식을 올려 되돌릴 수 없다.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으로 원하던 상대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행복하다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말볼리오는 어떤가. 그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퇴장한다. 그는 대화합의 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희극은 작품해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문제극이나 블랙코미디로 평가해야 옳다고 본다.

 

(말볼리오) 네놈들 모두에게 복수를 해 주고 말테다! [퇴장]

(올리비아) 말볼리오는 가장 악독하게 학대를 당했구나. (P.225, 5막 제1)

 

여기에 한층 더 그럴듯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게 광대의 마지막 노래다. 5절로 이루어진 광대의 노래는 연극의 폐막을 알리는 역할을 하지만 노래 가사 자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밝고 즐거운 내용이라고 결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울한 어조이다. 희극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노래라고 할 수 없다.

 

작품의 설정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다. 인물을 헷갈리는 데서 오는 꼬이는 상황, 엇갈린 사랑의 대상, 여기에 인물들의 말장난 등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도 공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는데, 올리비아는 남장한 바이올라를, 바이올라는 공작을 사랑하는 것으로 작가는 상황을 설계한다. 그리고 바이올라가 자신의 본심과는 반대로 공작과 올리비아 간 구애의 사자 역할을 맡는다. 자신의 숨은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바이올라의 처지에 동정을 하면서도, 그에게 급작스러운 사랑을 품게 되는 올리비아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녀의 이런 성급함은 후에 세바스찬과 급하게 결혼을 올리게 되는 걸로 이어지므로 어쨌든 그녀 자신도 애매한 결혼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공유한다.

 

이 작품을 진정으로 문제작으로 만드는 인물은 말볼리오다. 그는 토비 경과 마리아가 주축이 된 일당들에게 완전히 속임을 당하고 놀림감으로 전락한다. 올리비아의 집사인 그가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그가 집사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척하고, 원칙을 준수하여 업무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해자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쥐어 짜낸 논리라고 하겠다. 그를 향한 비난은 그의 악덕 자체가 아니라 말볼리오-올리비아의 신임을 받는-를 향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에 가깝다.

 

(토비 경) [말볼리오에게] 네놈은 일개 집사에 불과하잖아? 그런데도 네가 도덕군자인척하고 있단 것만으로 더 이상 케익과 맥주를 맛볼 수 없다는 거야? (P.93, 2막 제3)

 

(마리아) 그저 기회주의자에 잘난 체 하는 바보랍니다. 높은 분들한테나 어울릴 표현들을 달달 외워서는, 엄청 쓰고 다니구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어찌나 강한지, 자기한텐 탁월한 점들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자기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길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니까요. 그자의 그런 악덕이 제 복수심의 그럴싸한 이유인 셈이죠. (P.96, 2막 제3)

 

말볼리오를 속여서 조롱거리로 만드는 계책을 주도하는 마리아와 말볼리오를 비교해 보면 적나라한 대비를 보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말볼리오 괴롭히기에 토비 경과 합류하여 주도한 덕분으로 그와 결혼에 성공한다. 일개 시녀에서 귀족의 부인으로 신분 상승에 도달하였는데, 이에 대해 극 중에서는 어떠한 촌평도 없다. 반면 마리아의 속임수에 빠져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 말볼리오에 대해서는 온갖 비난과 조롱이 가해지고,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받아 어두운 방에 감금되기조차 한다.

 

마리아의 신분 상승 욕망은 허락되지만, 말볼리오의 그것은 철저히 부정당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젊은 여성이 결혼으로 상류층에 편입되는 것은 용납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금기시됐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극 중에서도 노란 스타킹과 십자대님에 대한 말볼리오의 오해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말볼리오의 대사에 따르면 올리비아가 최근에 이걸 칭찬했다고 하는 반면, 마리아는 올리비아가 두 스타일을 혐오한다고 발언한다.

 

(말볼리오) 그래,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구나.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어, 눈곱만큼도 의심할 수가 없다니까. 방해물도 없고 믿을 수 없거나 불확실한 상황도 아니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와 내 간절한 바람이 성취될거란 전망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어쨌든, 내가 아닌 조우브 신이 하신 일이니 감사를 드려야겠어. (P.155, 3막 제4)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을 품게 된 말볼리오와 같은 처지에 놓인 누구라도 당연히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볼리오의 신분 상승 욕망은 도덕적 비난 대상이 아니다. 그의 개인적 역량이 희극에 등장하는 어떤 귀족 못지않음을 독자는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가 악의적 수단이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멋진 사랑과 신분 상승을 쟁취하였다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볼리오는 철저한 희생양이다. 마지막 장에서 말볼리오 놀리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동기와 수단 모두가 억지스럽고 과도함에서 비롯한다. 말볼리오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독자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패비언) 그 속임수에 익살스런 악의가 뒤따랐던 방식은 / 아마도 복수보다는 웃음을 조장할 것입니다, / 만약에 그것이 양측에게 /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말이죠. (P.224, 5막 제1)

 

셰익스피어는 이 희극에 이중 장치를 심어 놓았다. 낭만 희극으로 보기를 원하는 무리를 위해서 표면적으로 전형성을 따라갔지만, 심층부에는 토비 경으로 대변되는 귀족사회의 어리석음과 함께 귀족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판하였다.


5막 제1장에서 공작과 광대의 대사 표기에 일부 오류가 있다. 교정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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