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난드로스 희극
메난드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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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희극에서 시작한 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로마 희극을 거쳐 드디어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 희극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메난드로스는 후세 영향력에 비해 고대 그리스 희곡의 4대 작가와는 달리 인지도가 매우 약하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작품이 대부분 유실되어 온전히 남아 있는 작품이 없다는 데 있다. 옮긴이에 따르면 이 작품집에 수록한 <심술쟁이> 정도가 그나마 양호한 상태라고 한다. 확실히 수록된 4편의 작품 중 이 희극만이 문학작품으로서 감상할 만한 상태일 뿐 나머지 작품은 단지 작품의 얼개와 단편적 내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데 그칠 뿐 감상하기에는 누락된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메난드로스의 희극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한데, 옮긴이의 서문에서 그 의의를 인용한다.

 

메난드로스는 로마의 희극작가들인 플라우투스와 테렌티우스의 번역.번안을 통해 르네상스 희극과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몰리에르, 독일의 레싱 같은 작가들의 희극에 큰 영향을 줌으로써 서양 근대 희극의 아버지가 되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P.7-8)

 

1. 심술쟁이 [염세가]

 

프롤로그를 등장인물이 아니라 판 신이 담당하는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무려 세 면에 걸쳐 작품의 배경과 현재까지의 사건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프롤로그만 읽더라도 대충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겠구나를 알 수 있는 정도다. 게다가 판 신은 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소스트라토스에게 마술을 걸어 크네몬의 딸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만들었다고 친절하게 덧붙인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메난드로스 희극에서 막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코로스는 비중과 역할이 대폭 축소되어 단지 막을 구분하는 기능만을 담당하는 것으로 전락하였음도 눈에 띈다. 선배 작가들의 그것이 가지는 중요성과 의미를 비교하면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크네몬) 사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 자기 이익을 위해 계산하는지 보고는 / 비뚤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이해관계를 떠나 / 서로 호의를 베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지. / 그게 내 잘못이었어. (P.57, 4)

 

이 희극의 대표 인물인 크네몬은 이중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타이틀도 두 개이리라. 그는 염세가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길 싫어하여 딸 하나와 함께 시골에서 고독하게 살아간다. 자체가 크게 문제 될 거는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니까. 하지만 크네몬은 성격이 괴팍해서 맞닥뜨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마구 행패를 부린다. 그래서 심술쟁이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요, 무서운 존재로 귀신에 씌웠다고 할 정도다. 크네몬이 극 중에서 고통을 겪고 사람들의 놀림감으로 전락하는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의붓아들 고르기아스에게 위임한 그가 마지막 막에서 시콘과 게타스에 당하는 것도 여전히 그가 세상과 어울리기를 거부한 데 따른 것이다.

 

소스트라토스가 소녀와 결혼에 성공하게 된 까닭, 그리고 그가 고르기아스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시키도록 애쓴 까닭. 이건 모두 그들의 품성이 크네몬과 달리 뛰어난 까닭이다. 특히나 고르기아스는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존경할 정도로 고귀한 품성을 지니고 있어 그의 성공과 행복에 관객조차도 기뻐할 정도다.

 

2. 중재 판정

 

이 희극은 제1막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5막 끝부분도 없어졌다. 중간중간에도 손상된 대목이 제법 있다. 나머지 작품들도 대체로 공통된 형편이니 그저 메난드로스의 작품을 접해본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부정하게 태어난 아기의 유기. 주운 아기의 패물과 신분의 정체. 이것들은 고대부터 설화와 희곡의 제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아내 팜필레의 부정에 실망한 남편 카리시모스는 가출하여 친구 집에서 머무른다. 여기까지만 보면 남편의 반응에 일응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곧이어 속사정이 드러나면서 독자는 카리시모스의 위선을 알게 된다.

 

이 작품에서 관건은 카리시모스의 비도덕성이다. 그는 축제 때 한 소녀를 강간해서 아기를 배게 만들었다. 그 비극의 당사자 소녀가 지금의 아내 팜필레라는 것이 작품 구성의 묘미다. 자신의 부정으로 생긴 결과를 아내의 부정으로 오해하고 극렬하게 반응하는 남편의 태도. 모든 오해와 갈등이 해소된 것으로 극은 화기애애하게 막을 내리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결과만 좋으면 중간의 잘못은 용인되는가?

 

3. 사모스의 여인 [결혼계약]

 

이 희극도 제1막과 제2막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데메아스와 니케라토스의 자식인 모스키온과 플랑곤은 혼인 전에 아기를 낳고 만다. 이실직고하면 되었으련만 아무래도 혼전임신이라는 불명예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무리수를 쓰다 보니 사태는 더욱 악화하고 만다. 데메아스는 그 애가 자신의 동거녀 크뤼시스와 모스키온 사이의 아기라고 오해하고 사모스의 여인 크뤼시스를 집에서 내쫓는다.

 

(데메아스) 데메아스, 너는 지금이야말로 / 남자가 되어야 해. 그녀를 향한 그리움 따위는 잊어버리고 / 사랑도 그만둬! 일어난 일은 네 아들을 위해 / 되도록 덮어버리고, 그 사모스 출신 미인은 / 집에서 거꾸로 내던져버려. 지옥으로 말이야. (P.147, 3)

 

우리는 여기서 데메아스의 고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정을 저지른 여인과 사랑하는 아들 둘 다를 모두 버릴 수는 없는 처지에서 그는 결국 아들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아들의 착하고 순수함을 믿으며. 이를 알 리 없는 아들은 아기를 돌보기로 해준 크뤼시스를 계속 감싸고 오해는 증폭된다. 결국 아들에게 폭발하는 데메아스!

 

(데메아스) 내가 왜 고함을 지르느냐고 묻는 게냐? 이 인간쓰레기야! / 말해봐, 네가 정말 책임지겠냐? 그러고도 내 얼굴을 / 똑바로 쳐다보며,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게냐? (P.157, 4)

 

너무나 인간적이다. 메난드로스의 희극을 읽다 보면 그와 셰익스피어 간에 이천 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다. 오히려 백여 년 앞선 선배들과 괴리감을 더 느끼게 된다. 이것은 그가 신화나 영웅의 발자취가 아니라 정면에서 사람과 그들이 어우러져 아웅다웅 사는 사회를 다루고 있어서다. 사람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변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4. 삭발당한 여인

 

옮긴이에 따르면 작품의 절반 정도만 복원되었다고 한다. 아들딸 쌍둥이의 유기, 훗날 자신의 쌍둥이 누이에게 애정을 품게 된 아들, 버려졌던 패물에 의해 밝혀지게 된 신원. 우연과 행운이 결합하고 오해가 더해져 사건이 증폭되는 구조는 여전하다.

 

프롤로그를 오해의 신이 담당하는 점은 <심술쟁이>와 비슷하다. 역시 여기의 신도 나름대로 능력을 발휘하여 극의 진행에 역할을 담당한다.

 

(오해) 그는 본성이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 내가 그를 자극했느니라. 드러날 것이 다 드러나고 / 그들이 드디어 가족을 찾게 하려고. / 이를 역겹고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 생각을 바꾸도록 하라. (P.184-185, 1)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삭발당한 여인 글뤼케라의 운명이다. 그녀는 폴레몬이라는 군인의 동거녀인데, 쌍둥이 모스키온과의 관계를 오해한 그에게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오해가 풀리고 그녀는 폴레몬과 결혼하게 되는데, 그녀에게 최선의 결말인지는 의심스럽다. 일단 극 중에서 보이는 폴레몬의 성격과 행동은 주인공의 배우자감으로 썩 뛰어나다고 하기 어렵다. 글뤼케라가 그의 동거녀가 된 것은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인 탓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작품은 파타이코스, 모스키온, 폴레몬에게는 분명 행복한 결말이라는 희극 정신에 충실하지만 글뤼케라만 놓고 보면 다른 짐작도 가능하다. 다만 워낙에 소실된 부분이 많은 탓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섣부르게 판단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음을 언급한다.

 

메난드로스의 희극과 그의 작품세계는 더 많은 파피루스가 발견되고 계속된 작품 복원이 가능해진 후 진정한 가치를 헤아릴 수 있으리라. 다만 이 책에 수록된 얼마 되지 않는 단편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그와 후대 희극작가들의 친연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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