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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야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심지영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9월
평점 :
셰익스피어의 낭만 희극의 마지막 작품으로 분류되는 작품이다. 이후의 희극은 문제극 또는 로맨스극으로 구분된다. 이 작품 또한 문제극의 하나에 포함될 수 있다는 개인적 생각이다. 진정한 낭만 희극이 성립하려면 등장인물 간 갈등이 모두 해결되고 모두-악인은 제외하고-가 행복한 결말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올리비아는 얼떨결에 바이올라의 오빠인 세바스찬과 결혼식을 올려 되돌릴 수 없다.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진정으로 원하던 상대와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최소한 행복하다고 평하기는 곤란하다. 말볼리오는 어떤가. 그는 마지막 장에서 자신을 괴롭힌 사람들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퇴장한다. 그는 대화합의 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이 희극은 작품해설에서 제시한 것처럼 문제극이나 블랙코미디로 평가해야 옳다고 본다.
(말볼리오) 네놈들 모두에게 복수를 해 주고 말테다! [퇴장]
(올리비아) 말볼리오는 가장 악독하게 학대를 당했구나. (P.225, 제5막 제1장)
여기에 한층 더 그럴듯한 분위기를 더해 주는 게 광대의 마지막 노래다. 5절로 이루어진 광대의 노래는 연극의 폐막을 알리는 역할을 하지만 노래 가사 자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밝고 즐거운 내용이라고 결코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울한 어조이다. 희극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노래라고 할 수 없다.
작품의 설정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다. 인물을 헷갈리는 데서 오는 꼬이는 상황, 엇갈린 사랑의 대상, 여기에 인물들의 말장난 등은 셰익스피어 희극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하다. 여기서도 공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는데, 올리비아는 남장한 바이올라를, 바이올라는 공작을 사랑하는 것으로 작가는 상황을 설계한다. 그리고 바이올라가 자신의 본심과는 반대로 공작과 올리비아 간 구애의 사자 역할을 맡는다. 자신의 숨은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바이올라의 처지에 동정을 하면서도, 그에게 급작스러운 사랑을 품게 되는 올리비아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그녀의 이런 성급함은 후에 세바스찬과 급하게 결혼을 올리게 되는 걸로 이어지므로 어쨌든 그녀 자신도 애매한 결혼에 부분적으로 책임을 공유한다.
이 작품을 진정으로 문제작으로 만드는 인물은 말볼리오다. 그는 토비 경과 마리아가 주축이 된 일당들에게 완전히 속임을 당하고 놀림감으로 전락한다. 올리비아의 집사인 그가 그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그가 집사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척하고, 원칙을 준수하여 업무처리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해자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쥐어 짜낸 논리라고 하겠다. 그를 향한 비난은 그의 악덕 자체가 아니라 말볼리오-올리비아의 신임을 받는-를 향한 시기심과 질투심의 발로에 가깝다.
(토비 경) [말볼리오에게] 네놈은 일개 집사에 불과하잖아? 그런데도 네가 도덕군자인척하고 있단 것만으로 더 이상 케익과 맥주를 맛볼 수 없다는 거야? (P.93, 제2막 제3장)
(마리아) 그저 기회주의자에 잘난 체 하는 바보랍니다. 높은 분들한테나 어울릴 표현들을 달달 외워서는, 엄청 쓰고 다니구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어찌나 강한지, 자기한텐 탁월한 점들이 꽉꽉 들어차 있어서 자기를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자길 사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니까요. 그자의 그런 악덕이 제 복수심의 그럴싸한 이유인 셈이죠. (P.96, 제2막 제3장)
말볼리오를 속여서 조롱거리로 만드는 계책을 주도하는 마리아와 말볼리오를 비교해 보면 적나라한 대비를 보임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말볼리오 괴롭히기에 토비 경과 합류하여 주도한 덕분으로 그와 결혼에 성공한다. 일개 시녀에서 귀족의 부인으로 신분 상승에 도달하였는데, 이에 대해 극 중에서는 어떠한 촌평도 없다. 반면 마리아의 속임수에 빠져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엉뚱한 행동을 하게 되는 말볼리오에 대해서는 온갖 비난과 조롱이 가해지고,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받아 어두운 방에 감금되기조차 한다.
마리아의 신분 상승 욕망은 허락되지만, 말볼리오의 그것은 철저히 부정당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배체제의 안정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젊은 여성이 결혼으로 상류층에 편입되는 것은 용납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금기시됐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극 중에서도 노란 스타킹과 십자대님에 대한 말볼리오의 오해는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말볼리오의 대사에 따르면 올리비아가 최근에 이걸 칭찬했다고 하는 반면, 마리아는 올리비아가 두 스타일을 혐오한다고 발언한다.
(말볼리오) 그래, 모든 것이 다 들어맞는구나.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어, 눈곱만큼도 의심할 수가 없다니까. 방해물도 없고 믿을 수 없거나 불확실한 상황도 아니야.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와 내 간절한 바람이 성취될거란 전망 사이에 끼어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군. 어쨌든, 내가 아닌 조우브 신이 하신 일이니 감사를 드려야겠어. (P.155, 제3막 제4장)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올리비아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을 품게 된 말볼리오와 같은 처지에 놓인 누구라도 당연히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볼리오의 신분 상승 욕망은 도덕적 비난 대상이 아니다. 그의 개인적 역량이 희극에 등장하는 어떤 귀족 못지않음을 독자는 충분히 인정할 것이다. 그가 악의적 수단이 아니라 정당한 방식으로 멋진 사랑과 신분 상승을 쟁취하였다면 오히려 박수를 쳐야 할 일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볼리오는 철저한 희생양이다. 마지막 장에서 말볼리오 놀리기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동기와 수단 모두가 억지스럽고 과도함에서 비롯한다. 말볼리오가 누구에게 피해를 주었는지 독자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
(패비언) 그 속임수에 익살스런 악의가 뒤따랐던 방식은 / 아마도 복수보다는 웃음을 조장할 것입니다, / 만약에 그것이 양측에게 /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말이죠. (P.224, 제5막 제1장)
셰익스피어는 이 희극에 이중 장치를 심어 놓았다. 낭만 희극으로 보기를 원하는 무리를 위해서 표면적으로 전형성을 따라갔지만, 심층부에는 토비 경으로 대변되는 귀족사회의 어리석음과 함께 귀족 체제의 불합리성을 비판하였다.
※ 제5막 제1장에서 공작과 광대의 대사 표기에 일부 오류가 있다. 교정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