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귀족 친척 셰익스피어 전집 4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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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가장 최후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희곡이며, 같은 시기의 <헨리 8>와 더불어 그의 단독작이 아니라 존 플레처와의 공저이다.

 

셰익스피어 : 1, 21, 31-2, 51, 53-4

플레처 : 22-6, 33-6, 4, 52

 

작품해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이상과 같다. 합작이니만치 전체적 짜임새는 단독적인 만큼 유기적이지 않고 다소 느슨한 면이 있다. 특히 1막은 테세우스의 테베 정벌의 불가피성을 끌어내기 위한 배경인데, 나머지 막과의 유대감에서 현저히 괴리되어 있다. 제프리 초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고 하거나 작중 배경이 고대 테베와 아테네라는 점, 그리고 테세우스와 히폴리타가 <한여름 밤의 꿈>과 마찬가지로 등장한다는 점 등은 참고만 하면 될 뿐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테베의 크레온의 폭정을 테세우스가 징벌한다는 것도 아테네 정통론에 입각한 서사 전개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팔라몬과 아사이트가 보이는 우정과 사랑의 갈등,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의 강력함이자 동시에 바보스러움이다. 22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우정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사촌 간 혈연의 정과 우정을 갖춘 아름다운 모습이다. 크레온의 폭정에 실망하면서도 조국을 버릴 수 없어 아테네에 맞서 싸운 그들, 포로가 되어 아테네에 갇힌 처지가 차라리 죄악에 물든 테베보다도 낫다고 위안 삼는 그들은 건전한 사고와 윤리관을 지닌 인물들이기도 하다.

 

(팔라몬) 우리가 크레온의 궁정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 죄가 정의이고, 높은 나리들의 미덕이라는 것이 / 욕망과 무지가 아닌가. 아사이트, 자애로운 신이 /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 남들과 같이 불운한 노인이 되어 저승길에 가고, 누가 / 서러워하지도 않고, 비문에는 대중의 저주가 새겨질 거다. (P.61, 22)

 

22장에서 포로가 된 두 사람이 에밀리아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그들은 더는 친구이자 동료가 아니라 사랑의 경쟁자가 된다, 에밀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랑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단지 적에 불과하다. 적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분출하는 장면은 매우 낯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의외가 아니다.

 

(팔라몬)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나고,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 남자에게 인식된 것을 처음 이 눈으로 / 확인한 것도 나지. 만약 네가 그녀를 사랑하고, / 나의 소원을 망쳐버리려고 한다면, / 너는 배반자다, 아사이트, 비겁한 놈이다. / 너는 사랑할 권리 같은 건 없다, 우정, 혈통, /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모든 연결된 매듭을 포기하겠다, / 네가 그녈, 한번이라도 사랑한다면 말이다. (P.65-66, 22)

 

젊은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구애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이다. 더구나 대상이 에밀리아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다. 인류 문화가 역사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아울러 남녀 간의 사랑을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서 열렬히 찬미함은 이런 까닭이다. 극 중 대사에서도 모든 신을 지배하는 사랑의 여신을 우월성을 추앙하고 있어 이것의 당연성을 인정한다. 문제는 사랑의 호르몬의 부작용은 이것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이성과 도덕이 마비된다는 점이다. 사랑 외엔 모든 것이 맹목적으로 된다.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에밀리아는 원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팜므파탈이 되었다. 그녀는 극 중에서 남자에게 관심 없어 하는 인물인데 42장에서 갑작스레 팔라몬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대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예도 있다. 쌍방의 감정이 서로를 향한다면 좋겠지만, 일방이 바라볼 때 다른 한쪽이 등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딱한 상황이 된다. 에밀리아는 어쨌든 팔라몬과 아사이트를 외면하지 않는다. 반면 팔라몬은 교도관의 딸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여성에 불과하다. 물론 신분상의 격차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팔라몬을 향한 지고한 사랑이 보답을 받지 못하자 그녀는 광기의 지배를 받고 교도관의 딸이 보여주는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는 독자 또는 관객에게 그만큼의 아픔과 동정을 유발한다.

 

() 몹시 추워. 별들도 다 사라졌어, / 장식용 술 같이 보이던 작은 별까지 말이야. / 해님도 보았을 거야, 내 바보스런 꼴을. 팔라몬! / 아 아냐. 그이는 천국에 있어, 나는 지금 어디 있지? (P.106, 34)

 

이 작품은 통상 셰익스피어의 로맨스 희곡으로서 비희극으로 분류된다. <겨울 이야기>, <템페스트>, <페리클레스>, <심벨린>과 달리 이 작품은 비희극으로 평가하기 애매하다. 팔라몬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시련 끝에 에밀리아와 결혼하게 되므로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아사이트를 외면하기 어렵다. 아사이트는 역할과 비중 면에서 결코 팔라몬에 못지않은 공동 주인공이다. 팔라몬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에밀리아와의 결혼 권리를 쟁취한 이가 아사이트라는 점을 놓치지 말자.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덧없이 목숨을 잃고 자신의 권리를 친구에게 양보한다. 이것을 볼 때 과연 비희극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팔라몬) , 사촌! / 소망한 것을 얻으면, 소망한 것을 / 잃어야 하다니! 소중한 사랑을 / 잃지 않고서는 소중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니!

(아사이트의 유체가 옮겨져나간다)

(테세우스) 운명의 여신이 / 이렇게 교묘한 승부를 한 일은 없었다. 패자가 이기고, / 승자가 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승부에서 / 신들은 극히 공평하였다. (P.200, 54)

 

팔라몬과 테세우스의 대사는 서로 다른 감정과 해석을 보여준다. 팔라몬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테세우스는 오히려 신이 공평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에밀리아를 먼저 본 사람이 팔라몬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 사랑의 주제에서 테세우스 같은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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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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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제를 번역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적어 놓았지만, 작품 내용을 감안하면 폭풍우가 적합하다.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하여 발생한 폭풍우이므로 계절적으로 자연 발생하는 태풍과는 구분이 필요하다.

 

작품 서두부터 거대한 폭풍우 장면이 압도한다. 배를 난파 지경까지 몰고 가서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바꿔버리는 폭풍우의 위력. <페리클레스>에서도 폭풍우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반면 여기서는 푸로스퍼로가 마법으로 일으킨 폭풍우라는 면에서 인위적이다.

 

작품은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우선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할 용서와 화해다. 작품 속에 너무나 선명하게 표현되기에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주제 정신이다. 자신과 딸을 죽음의 극한 상황까지 내몰아간 동생 일당을 향해 푸로스퍼로는 복수를 감행하지 않고 용서의 손을 내민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마법의 위력으로 충분히 그들을 몰살시켰을 것임에도.

 

그가 폭풍우를 일으킨 동기도 그들을 섬으로 유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푸로스퍼로는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무엇을? 사랑하는 딸의 장래를. 외딴 섬에서 인간이라고는 자신과 딸밖에 없는 곳에서 그로서는 딸의 행복한 앞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훌륭한 남편감을 찾아주어야 할 텐데. 더불어 자신의 가슴에 맺힌 원한과 분노도 해소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미랜더와 퍼디넌드의 만남과 결혼 약속을 바라보는 푸로스퍼로의 눈길은 흐뭇하다.

 

(푸로스퍼로) 별일 없다. / 내가 한 일은 오로지 다 너를 위해서다. / 내 사랑하는 딸 너를 위해서야. (P.14, 12)

 

(미랜더) 저는 저분이 / 어떤 신으로만 보이네요. 자연계에서는 저렇게 고상한 존재를 / 저는 일찍이 본 일이 없으니까요.

(프로스퍼로) (방백) 나의 계획이 잘 진행되는가 보군. / 내가 의도한 대로. (P.35, 12)

 

(푸로스퍼로) (방백) 가장 훌륭한 두 사랑의 아름다운 만남이로다! / 하느님이여, 자라는 이들의 사랑 위에 / 은총을 부어주시옵소서! (P.75, 31)

 

대개 용서와 화해라 함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빈 후 피해자가 만사를 다 용서하고 덮는다는 방식과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 희곡에서 주된 가해자인 앤토니오는 자신의 형에게 미안한 심정을 가지고 용서를 비는가? 절대 아니다. 이 섬에서도 그는 시배스천을 부추겨 그의 형이자 나폴리 국왕인 알론조를 시해하도록 획책한다. 주저하는 시배스천을 향한 그의 대사는 그의 비인간성의 수준이 어디에 달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앤토니오) 아니, 양심이 어디에 있어요? 그것이 발꿈치에 입은 / 동상이라면 덧신이나 신어야겠지만, / 하지만 그러한 신적인 것이 내 가슴속에는 없습니다. / 설사 양심이 스무 개쯤 나와 밀라노 대공의 지위 사이에 / 끼여 있다고 해도 난 그것들을 얼어붙거나 녹아버리도록 하여 /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소! (P.57, 21)

 

신성한 정의의 법칙에 따른다면 앤토니오는 엄벌에 처해지는 게 맞겠지만, 푸로스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알론조, 시배스천, 앤토니오 일행을 용서한다. 심지어 자신의 힘의 원천인 마법을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작품 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개인적 차원을 초월한, 종교적 차원- 여기서는 기독교 의 것이다. 푸로스퍼로가 마법을 포기하는 대목을 두고 여러 추측이 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푸로스퍼로와 미랜더가 문명사회로 복귀함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마법은 기독교 세계에서 허용하는 게 아니므로 푸로스퍼로와 미랜더가 외딴 섬에서 문명사회로 복귀하려면 지배적 사회 가치를 수용해야 함은 당연하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라는 불가분의 두 가지 요소로 된 개체라고 할 때, 에어리얼과 캘리밴은 바로 인간의 이 두 요소인 것이다. 영혼, 사랑 등 천사적인 면을 상징하는 에어리얼은 곧 인간의 정신이요, 미랜더를 능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으로써 육욕과 같은 동물적인 면을 상징하는 캘리밴은 곧 인간의 육신인 것이다. (P.146)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정령 또는 요정이 등장하여 주도적 역할을 맡는 사례는 <한여름 밤의 꿈> 정도에 불과하다. 에어리얼과 캘리밴이라는 피조물의 성격이 흥미롭다. 전자는 정령이며, 후자는 마녀의 자식으로 반인반수의 존재다. 작품 해설에서처럼 정신과 육체라는 관점에서 두 피조물의 언행을 파악해 보면 매우 그럴듯하다.

 

추가하자면 전혀 상반되는 존재임에도 에어리얼과 캘리밴은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이다. 양자는 모두 자유를 희구한다. 에어리얼이 푸로스퍼로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에어리얼은 이 점을 푸로스퍼로에게 상기시키며, 마법사도 정령에게 반복적으로 주지시킨다.

 

(에어리얼) 저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 그것이 아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푸로스퍼로) ? 화가 났느냐? / 네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에어리얼) 저의 자유이옵니다. (P.25, 12)

 

캘리밴도 마찬가지다. 그의 처지에서 보면 섬은 원래 자신의 소유물이었다. 어느 날 푸로스퍼로가 와서 섬을 차지하고 그를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푸로스퍼로의 마법에도 굴하지 않고 저주를 퍼붓는 건 그만큼 그를 향한 적개심이 크다는 것이다. 캘리밴이 푸로스퍼로를 물리쳐줄 대안적 인물을 간구하는 건 그로서는 정당하다. 물론 에어리얼의 자유와 캘리밴의 자유는 내용 면에서 전혀 다르다.

 

(캘리밴) , , -캘린밴은 / 새 주인을 모셨다. 새 사람을 얻었다. / ! , 자유다! 자유다, 자유! (P.68, 22)

 

푸로스퍼로와 미랜더는 캘리밴을 싫어함에도 그를 버리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는 필요악이며, 그들의 생존을 위해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캘리밴의 음모를 지켜보면서 푸로스퍼로가 내뱉는 대사는 인간에 내재하는 근원적이며 길들일 수 없는 야성적 본성의 실상에 대한 탄식에 불과하다.

 

(푸로스퍼로) 악마, 천생 악마. 이놈의 본성에는 교육이 /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이놈에게 내가 자비심을 가지고 베푼 / 모든 수고가 다 헛되었다. 완전히 헛되었다. (P.103, 41)

 

이 작품에서 독자는 르네상스 정신이 물결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이성, 신성에 대한 인간성의 우위가 곧 르네상스라고 할 때, 푸로스퍼로의 모든 행위는 이성적 사고의 총합이다. 그가 감정과 본능에 휘둘렸다면 처절한 응징과 복수만이 행해졌겠지만 차분하고 고매한 이성의 힘으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하였다.

 

(푸로스퍼로) 비록 그자들이 나에게 저지른 큰 죄는 / 나의 골수에 사무치나, 나는 고매한 이성으로써 분노를 / 참고 있는 것이다. 더 귀한 행동은 복수에 있기보다는 / 용서의 미덕에 있는 것이다. (P.112, 51)

 

미랜더는 처음에 퍼디넌드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아버지 외에 다른 인간을 접한 적이 없는 그녀에게 퍼디넌드처럼 젊고 고상한 남자는 단순한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가 알론조 일행을 보았을 때 외침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르네상스는 인간 예찬에서 출발한다.

 

(미랜더) , 놀랍구나! /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 , 찬란한 신세계로다!

(푸로스퍼로) 너에게는 신세계이지. (P.120, 51)

 

<겨울 이야기> 독서평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인명과 지명의 번역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작품이해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다시 떠올린다. 21장에서 대사 중에 미망인 다이도와 홀아비 이니애스가 인용되는데, 굳이 영어식 표기가 아니라 디도와 아에네이스라고 하면 관련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41장에서 등장하는 정령들이다. 주노, 시어리즈, 아이어리스가 그것인데, 로마의 신들이라고 한다. 주노는 그나마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나머지 둘은 도대체 어떤 신인지 알기 어렵다. 별도 주석도 없다. 할 수 없이 영어 원문을 구해서 살펴보니 그제야 이해 가능하다. 시어리즈는 케레스(Ceres), 아이어리스는 이리스(Iris)의 영어식 표기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영어식에 매몰되어야 할지 회의적이다. 이 번역본을 읽는 독자가 누구인지, 셰익스피어가 신화를 인용한 까닭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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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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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레온테스가 헤르미오네와 폴릭세네스의 부정을 의심하여 왕비와 갓난 아기를 박대하는 일련의 사건은 겨울에 발생한다. 플로리젤과 페르디타가 사랑을 약속하고, 회개한 레온테스가 죽은 줄 알았던 왕비와 공주를 상봉하는 사건은 봄에 발생한다. 봄이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양털 깎기 축제로 계절을 알 수 있다.

 

시간적 지칭 외에 내용적 의미도 연관되어 있다. 레온테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파장은 비극으로 치닫는데 겨울처럼 차갑고 가혹하다. 반면 레온테스가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하고, 양국의 왕자와 공주가 혼인하게 되는 내용은 화사한 봄날처럼 흐뭇하고 따뜻하다. 겨울에서 시작하여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내용적 변화가 표제에 녹아 있다. 구성으로서는 1막에서 3막까지가 겨울에 해당하고, 4막과 5막은 봄에 해당한다. 전자는 비극이며, 후자는 희극이다. 비극과 희극 전환의 매개는 41장에서 시간을 등장시켜 담당시킨다.

 

(시간)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유쾌하지 못했다면 양해해 주시고, 불쾌했던 것은 아니지만 재미가 좀 없었다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이 시간의 이름으로 감히 말씀드립니다. (P.116, 41)

 

배우자의 정절에 대한 의심은 문학의 오랜 제재 중 하나인데, 결혼 생활이 기대하는 상호 신뢰가 서약에도 불구하고 단단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굳건한 우정으로 맺어진 레온테스 왕과 폴릭세네스 왕의 경우에도 레온테스는 어느 순간 왕비와 친구의 부정을 의심하며, 의심은 억측과 망상에 힘입어 확신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누구의 말도, 어떤 사실도 의심을 없애지 못하며 모든 것들이 의심을 강화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자신의 의심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만 자신의 적일 뿐이다, 제거해야 마땅할.

 

(카밀로) 그분의 망상은 확신에서 온 것이라 그분의 육신이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폴릭세네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온 것이오?

(카밀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P.54, 12)

 

레온테스의 망상은 아기 유기라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명령으로 이어지고, 아폴론 신의 신탁마저도 진실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다가 신의 분노를 산 이후에 망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 거대한 권위를 지닌 신탁마저 부인할 정도로 거짓 확신에 깊이 빠진 레온테스와, 한편으로 신의 분노로 순식간에 망상을 벗어던진 레온테스의 두 가지 모습이 대비적이다.

 

희극으로 끝나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은 안티고누스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인 그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꿈속 왕비의 지시대로 보헤미아에 아기를 버린다. 그가 어쩔 수 없음을 왕비 영혼이 이해함에도 어쨌든 악역을 맡았으니 그는 맹수에 물어뜯겨 죽게 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만다. 그의 비극은 훗날 아내 파울리나의 운수와 상반되어 더욱 안타까울 지경이다.

 

파울리나는 작품 전개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레온테스의 불합리한 처사를 비판하고, 왕비를 죽은 것처럼 하여 몰래 숨겨 보살핀다. 파울리나가 왕에게 퍼붓는 언사는 매우 혹독하여 조마조마할 지경이다. 대놓고 폭군이라고 지칭할 정도니. 그녀의 충성과 헌신의 대가는 보답을 받는 게 당연하리라. 카밀로처럼.

 

아우톨뤼코스와 시골 청년은 함께 작품 내 희극적 역할을 담당한다. 시종일관 어리숙하지만 순진한 시골 청년을 속여서 재물을 뜯어내는 도둑 아우툴뤼코스가 막판에는 처지가 뒤바뀌게 되어 착하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관객과 독자에게 재미와 안도감을 전달한다.

 

플로리젤과 페르디타의 사랑에 관해서는 진실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띈다. 페르디타는 연인의 신분이 왕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가 왕의 반대에 부닥치자 실망을 토로한다. 양치기의 딸과 왕자의 결합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플로리젤 또한 신분을 숨긴 채 결혼을 감행하려고 한다. 변장한 폴릭세네스가 부친의 승인을 받으라고 조언하지만 이를 거부한 대가는 부친의 분노다.

 

(페르디타) 왕자님, 이제 가 주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부탁이오니, 왕자님, 귀한 몸을 소중히 보중하십시오. 저는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P.154, 44)

 

그럼에도 사랑을 위해 신분을 기꺼이 포기한 플로리젤의 과감성과 순수한 사랑의 추구는 작품 내에서 빛을 발하며, 현대의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윤기는 유명한 번역가이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상대적으로 낯선 이름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번역본도 없다. 왜 하필 이 희곡에 대해서만 번역본을 남겼는지 궁금하고, 그가 다른 작품의 번역본도 남겼으면 좋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및 문화와 관련된 작품이 무려 14편이나 된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문화는 16, 7세기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던 모양이다. (P.234)

 

부록의 풍부한 설명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놓고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 외에도 작품 중간에 고대의 사례를 언급한 예도 상당히 있다. 몰라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안다면 더욱 흥미진진한 독서가 될 수 있으므로.

 

같은 맥락에서 번역자가 언급한 그리스와 로마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번역 문제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당대의 영국 독자를 위해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은 당연한데, 셰익스피어 번역가들이 국내 독자를 위해서도 여전히 영어식 표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작 국내 독자는 그게 누구와 무엇을 지칭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번역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원문을 신성시함인지 아니면 고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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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치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68
박하령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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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주인공이자 화자인 유나와 부모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소설이다. 가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족의 역할을 찬미하며 가족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고금을 막론하고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 가족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탓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으레 그러하듯 가족 관계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이른바 정상적인 가족 간에도 갈등과 불화가 개입하기 마련인데, 유나네 가족처럼 구성원의 정립(鼎立)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가족이라면 더욱 그러하기 쉽다. 게다가 유나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유나에게 어른과 같은 이해 촉구와 의무 이행을 무한히 요구하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형편이다.

 

가족은 사랑 공동체이지만, 사랑이 의무와 족쇄로 변질될 경우가 있다. 이때 가족은 더 이상 구성원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관계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강제와 폭력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가족은 결코 운명 공동체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랑이든 가족이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게 바람직한 거란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 고였다. [......]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은 다 뿌옇게 보인다. (P.87)

 

건강한 가족은 가족간에 한치의 틈도 없이 꽉 달라붙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 따르면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벌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것을 숨겨진 차원이라고 부른다. 숨겨진 차원이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적, 정서적 여지도 사람 사이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유나가 희수에게 부모의 신분을 속인 것이며, 희수와 엄마가 마주칠까 봐 토론 대회에서 도망치는 행동을 한 것은 행위의 잘잘못을 떠나 유나가 더 이상 가족의 미명 하에 자신이 매몰당하는 현상을 거부한 결과다. 농아 부모와 이른바 정상인들을 사회적으로 연결시키는 중간자적 역할말이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던 바로 그 순간, 수영장에서 턴을 하는 시점과 같다고나 할까? [......] 꼭 맞는 비유가 아닌 것 같은 노파심에 굳이 다시 설명을 다시 한다면, 한마디로 난 이젠 달.... 싶다. (P.66)

 

가족이 함께 있으면 물론 좋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떠날 때가 있고 구성원의 발전을 위해 떠나는 게 마땅하다면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유나가 부모와 함께 지방에 내려가길 거부하는 까닭은 자신의 미래가 부모와 함께 매몰될까 두려워서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유나 엄마가 유나를 남겨 두고 떠나는데 동의하고, 후에 자신의 질병을 숨긴 채 죽음을 앞에 두면서도 그런 결정이 잘한 결정이었다는 의미 또한 같은 맥락이리라.

 

따지고 보면 세상에 온전하고 정상적인 가족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은이네 가족, 승미네 가족, 희수네 가족 모두 한두 가지는 결핍되어 있다. 외관상 명확하게 드러나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 곯아 있는 관계든 말이다. 우리는 다른 가족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서로가 상대방의 처지를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품으며 질시하곤 한다.

 

! 하면 되잖아. 하라구! 너도 부모님한테 개겨. 하면 되지 뭐 그렇게 평계가 많아?”

그게 왜 핑계야?”

너 모르나 본데... 넌 맨날 너네 엄마, 아빠를 내걸고 무기 삼아서 떠벌린다구.” (P.50)

 

소설의 후반부는 두가지 다른 방향으로 요동친다. 먼저 유나와 친구들의 관계다. 농아 부모를 외피 삼는 자신의 진실을 대놓고 말하는 주은이를 유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이성으로는 주은이가 옳음을 알지만 감정은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따 행위, 아마도 주은이의 사고가 없었다면 양자의 관계가 어떤 파국으로 치달았을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제가 이쪽이 아니기에 더 깊숙이 다루지는 않지만 왕따 가해자가 되는 유나의 심리- 자기 합리화와 억지 -를 잘 묘사하고 있다. 유나는 주은이의 발언을 통해 새삼 자신이 간과하던 그와 부모 관계의 진실에 눈뜨게 된다. 괴롭더라도 안온하지만 무거운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을.

 

창피해한다는 건 남을 의식한다는 거잖아. 그게 장애란 거지. 너 집에선 엄마, 아빠의 장애를 크게 못 느끼잖아? 그런 것처럼 네가 엄마, 아빠를 부끄러워할 때만 너희 부모님이 장애인이신 거지. 그러니까 결국 그건 네가 장애인이라는 거지. 너 자신한테 자신이 없으니까.” (P.147)

 

엄마와 외가의 관계는 일부 의외의 설정이 있지만, 농아가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과 농아에 대한 보호 및 교육 체계가 부족한 실상을 노정한다는 측면에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장애아에 대한 일말의 부끄러움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나 본능적인 불안감을 지니게 마련이다. 유나 엄마에 대한 외할머니의 행동은 애정과 수치가 결부된 것이었지만, 한가지 간과한 점은 자식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지원이 많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선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청소년 소설답게 결말은 원만하게 해결된다. 유나는 희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솔직한 자신으로 만남을 시작하며, 엄마와 외할머니는 해묵은 원망과 갈등을 봉합한다. 비록 유나 엄마는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코 불행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유나는 계속 발버둥칠 것이다. 자신이 오롯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난 발버둥친다. 아름다운 발버둥이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미래를 위한 몸짓이므로. 세상의 모든 발버둥은 아름답고 의연하고 경건하다.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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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 쫌 아는 10대 - 우리, 100년 뒤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과학 쫌 아는 십대 3
최원형 지음, 방상호 그림 / 풀빛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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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환경과 생태의 문제점을 인식시키고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의 책이다. 환경과 생태에 사람들이 관심 갖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일단 경제적 궁핍 수준을 벗어나야 비로소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기 마련이다. 과거에 비해선 진일보한 게 사실이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아직 멀었음을 깨닫게 된다. 오히려 예전과 비교할 때 환경과 생태 문제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개선과 극복이 한층 어려워졌음도 알게 된다.

 

우리가 먹는 것이 책에서 예시한 컵라면, 바나나, 아보카도 , 입는 것- 이 책에서 다루는 패스트 패션, 롱패딩 -, 그리고 플라스틱, 전자제품, 화학물질 등처럼 일상생활에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환경과 생태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나아가 인류의 복지와 생존과도 직결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우려를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치부하고 덮어버리기가 곤란한데, 인간의 욕망, 기업의 속성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 체제의 근본적 특성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다. 모두가 편리하고 쾌적한 삶을 원한다. 맛있고 진귀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바람은 식도락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패션모델만이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포장하기 위해 애쓰는 게 아니다. 좀 더 편리하며, 아름답고 돋보이고 싶어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때로는 욕망 발현을 부추기기 위해 기업은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고 광고하며 유혹한다.

 

글쓴이는 즐거운 불편을 감수하자고 하는데, 누구라도 불편을 일부러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 취미 영역이라면 몰라도 일상생활 영역은 오직 빠르고 편리한 게 최고의 미덕이다. 환경과 생태 보전을 위해 컵라면을 먹지 말고, 휴대폰을 자주 바꾸지 말자고 하기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패션에 진심인 사람들한테 한가지 옷을 오래 입고, 화장품도 가급적 줄이자고 하면 지지받기 어렵다. 현대 사회는 절약이 아닌 소비를 권장하는 체제이며, 일정 정도 과소비를 전제로 경제가 돌아가는 게 자본주의 시스템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필요를 끊임없이 만들어 주고 있어. 어딜 가든 우리의 시선을 집요하게 끌어당기는 광고는 소비를 부추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지. 새로운 물건을 지속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노출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물건을 낡고 진부한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야. (P.109)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기업이 자발적으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환경과 생태에 신경 쓰도록 기대하는 건 어렵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 추구에 있으며, 최대의 이익 추구를 위해 최소의 비용만을 투입하기 위해 애쓴다. 농작물 플랜테이션과 식품 회사, 플라스틱 제품과 전자제품 회사, 의류 회사들이 어쩔 수 없이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도록 외부의 감시와 지도가 필요하며, 자발적으로 환경과 생태에 신경을 써야만 하도록 유인하는 정책과 제도가 요구된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거의 모든 것에 화학물질이 있는데, 그럼 어쩌라는 거냐고 항변할지도 모르겠구나. “이게 대안이야하고 내놓을 방법은 사실 없어. 집에서 먹거리를 싸 들고 다닐 수도 없고, 무턱대고 화장을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지. 다만 좀 줄여 보자는 거야. (P.151-152)

 

이처럼 이 책에서 제시된 여러 문제점은 개인 차원에서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지금 당장 문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사안에 계속된 관심과 주의를 쏟는 것은 의미가 있다. 수많은 개인의 관심과 목소리가 결집하면 기업도, 정치권도 결국에는 이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과 비교해서 우리나라의 환경오염과 생태 보전이 현저히 개선된 것은 기업과 정부의 선제적 자발적 조치가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단체들의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하는 과정이 반복된 결과이다.

 

이런 까닭으로 글쓴이와 출판사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 책을 기획한 것이다. 기성세대가 아니라 앞으로 이 사회와 국가의 주역이 될 그들을 향해서 문제점을 알아달라고, 조금이나마 고쳐보려고 노력해달라고 말이다. 2의 그레타 툰베리가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읽는 사람 중 누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제 어른에게 더는 기대하지 말고 미래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으면 좋겠어. “나 혼자 이런다고 뭐가 되겠어?”가 아니라 나라도 해 볼까?”하는 생각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걸 툰베리가 보여줬듯이 말이야!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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