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페스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표제를 번역하지 않고 원본 그대로 적어 놓았지만, 작품 내용을 감안하면 폭풍우가 적합하다.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하여 발생한 폭풍우이므로 계절적으로 자연 발생하는 태풍과는 구분이 필요하다.

 

작품 서두부터 거대한 폭풍우 장면이 압도한다. 배를 난파 지경까지 몰고 가서 등장인물들의 인생을 바꿔버리는 폭풍우의 위력. <페리클레스>에서도 폭풍우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 작품과는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자연의 위력을 보여주는 반면 여기서는 푸로스퍼로가 마법으로 일으킨 폭풍우라는 면에서 인위적이다.

 

작품은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우선 작품의 주제 의식이라고 할 용서와 화해다. 작품 속에 너무나 선명하게 표현되기에 알아차리지 못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주제 정신이다. 자신과 딸을 죽음의 극한 상황까지 내몰아간 동생 일당을 향해 푸로스퍼로는 복수를 감행하지 않고 용서의 손을 내민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마법의 위력으로 충분히 그들을 몰살시켰을 것임에도.

 

그가 폭풍우를 일으킨 동기도 그들을 섬으로 유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점에서 푸로스퍼로는 치밀하게 계획하였다. 무엇을? 사랑하는 딸의 장래를. 외딴 섬에서 인간이라고는 자신과 딸밖에 없는 곳에서 그로서는 딸의 행복한 앞날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훌륭한 남편감을 찾아주어야 할 텐데. 더불어 자신의 가슴에 맺힌 원한과 분노도 해소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미랜더와 퍼디넌드의 만남과 결혼 약속을 바라보는 푸로스퍼로의 눈길은 흐뭇하다.

 

(푸로스퍼로) 별일 없다. / 내가 한 일은 오로지 다 너를 위해서다. / 내 사랑하는 딸 너를 위해서야. (P.14, 12)

 

(미랜더) 저는 저분이 / 어떤 신으로만 보이네요. 자연계에서는 저렇게 고상한 존재를 / 저는 일찍이 본 일이 없으니까요.

(프로스퍼로) (방백) 나의 계획이 잘 진행되는가 보군. / 내가 의도한 대로. (P.35, 12)

 

(푸로스퍼로) (방백) 가장 훌륭한 두 사랑의 아름다운 만남이로다! / 하느님이여, 자라는 이들의 사랑 위에 / 은총을 부어주시옵소서! (P.75, 31)

 

대개 용서와 화해라 함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빈 후 피해자가 만사를 다 용서하고 덮는다는 방식과 절차로 이루어진다. 이 희곡에서 주된 가해자인 앤토니오는 자신의 형에게 미안한 심정을 가지고 용서를 비는가? 절대 아니다. 이 섬에서도 그는 시배스천을 부추겨 그의 형이자 나폴리 국왕인 알론조를 시해하도록 획책한다. 주저하는 시배스천을 향한 그의 대사는 그의 비인간성의 수준이 어디에 달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앤토니오) 아니, 양심이 어디에 있어요? 그것이 발꿈치에 입은 / 동상이라면 덧신이나 신어야겠지만, / 하지만 그러한 신적인 것이 내 가슴속에는 없습니다. / 설사 양심이 스무 개쯤 나와 밀라노 대공의 지위 사이에 / 끼여 있다고 해도 난 그것들을 얼어붙거나 녹아버리도록 하여 /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소! (P.57, 21)

 

신성한 정의의 법칙에 따른다면 앤토니오는 엄벌에 처해지는 게 맞겠지만, 푸로스퍼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알론조, 시배스천, 앤토니오 일행을 용서한다. 심지어 자신의 힘의 원천인 마법을 포기한다고 선언한다. 무조건적인 용서는 작품 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개인적 차원을 초월한, 종교적 차원- 여기서는 기독교 의 것이다. 푸로스퍼로가 마법을 포기하는 대목을 두고 여러 추측이 있지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푸로스퍼로와 미랜더가 문명사회로 복귀함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마법은 기독교 세계에서 허용하는 게 아니므로 푸로스퍼로와 미랜더가 외딴 섬에서 문명사회로 복귀하려면 지배적 사회 가치를 수용해야 함은 당연하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라는 불가분의 두 가지 요소로 된 개체라고 할 때, 에어리얼과 캘리밴은 바로 인간의 이 두 요소인 것이다. 영혼, 사랑 등 천사적인 면을 상징하는 에어리얼은 곧 인간의 정신이요, 미랜더를 능욕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음으로써 육욕과 같은 동물적인 면을 상징하는 캘리밴은 곧 인간의 육신인 것이다. (P.146)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정령 또는 요정이 등장하여 주도적 역할을 맡는 사례는 <한여름 밤의 꿈> 정도에 불과하다. 에어리얼과 캘리밴이라는 피조물의 성격이 흥미롭다. 전자는 정령이며, 후자는 마녀의 자식으로 반인반수의 존재다. 작품 해설에서처럼 정신과 육체라는 관점에서 두 피조물의 언행을 파악해 보면 매우 그럴듯하다.

 

추가하자면 전혀 상반되는 존재임에도 에어리얼과 캘리밴은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이다. 양자는 모두 자유를 희구한다. 에어리얼이 푸로스퍼로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은 그가 자신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하였기 때문이다. 에어리얼은 이 점을 푸로스퍼로에게 상기시키며, 마법사도 정령에게 반복적으로 주지시킨다.

 

(에어리얼) 저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으면 해요. / 그것이 아직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푸로스퍼로) ? 화가 났느냐? / 네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에어리얼) 저의 자유이옵니다. (P.25, 12)

 

캘리밴도 마찬가지다. 그의 처지에서 보면 섬은 원래 자신의 소유물이었다. 어느 날 푸로스퍼로가 와서 섬을 차지하고 그를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푸로스퍼로의 마법에도 굴하지 않고 저주를 퍼붓는 건 그만큼 그를 향한 적개심이 크다는 것이다. 캘리밴이 푸로스퍼로를 물리쳐줄 대안적 인물을 간구하는 건 그로서는 정당하다. 물론 에어리얼의 자유와 캘리밴의 자유는 내용 면에서 전혀 다르다.

 

(캘리밴) , , -캘린밴은 / 새 주인을 모셨다. 새 사람을 얻었다. / ! , 자유다! 자유다, 자유! (P.68, 22)

 

푸로스퍼로와 미랜더는 캘리밴을 싫어함에도 그를 버리지 못한다. 그들에게 그는 필요악이며, 그들의 생존을 위해 결여되어서는 안되는 존재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캘리밴의 음모를 지켜보면서 푸로스퍼로가 내뱉는 대사는 인간에 내재하는 근원적이며 길들일 수 없는 야성적 본성의 실상에 대한 탄식에 불과하다.

 

(푸로스퍼로) 악마, 천생 악마. 이놈의 본성에는 교육이 / 결코 들어갈 수 없다. 이놈에게 내가 자비심을 가지고 베푼 / 모든 수고가 다 헛되었다. 완전히 헛되었다. (P.103, 41)

 

이 작품에서 독자는 르네상스 정신이 물결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이성, 신성에 대한 인간성의 우위가 곧 르네상스라고 할 때, 푸로스퍼로의 모든 행위는 이성적 사고의 총합이다. 그가 감정과 본능에 휘둘렸다면 처절한 응징과 복수만이 행해졌겠지만 차분하고 고매한 이성의 힘으로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하였다.

 

(푸로스퍼로) 비록 그자들이 나에게 저지른 큰 죄는 / 나의 골수에 사무치나, 나는 고매한 이성으로써 분노를 / 참고 있는 것이다. 더 귀한 행동은 복수에 있기보다는 / 용서의 미덕에 있는 것이다. (P.112, 51)

 

미랜더는 처음에 퍼디넌드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한다. 아버지 외에 다른 인간을 접한 적이 없는 그녀에게 퍼디넌드처럼 젊고 고상한 남자는 단순한 아름다움 그 이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녀가 알론조 일행을 보았을 때 외침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생생하게 나타낸다. 르네상스는 인간 예찬에서 출발한다.

 

(미랜더) , 놀랍구나! / 훌륭한 사람들이 여기에 이렇게도 많다니! / 인간은 정말 아름답구나! 이런 분들이 존재하다니. / , 찬란한 신세계로다!

(푸로스퍼로) 너에게는 신세계이지. (P.120, 51)

 

<겨울 이야기> 독서평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인명과 지명의 번역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책을 보면서 이것이 작품이해에 중차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다시 떠올린다. 21장에서 대사 중에 미망인 다이도와 홀아비 이니애스가 인용되는데, 굳이 영어식 표기가 아니라 디도와 아에네이스라고 하면 관련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41장에서 등장하는 정령들이다. 주노, 시어리즈, 아이어리스가 그것인데, 로마의 신들이라고 한다. 주노는 그나마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나머지 둘은 도대체 어떤 신인지 알기 어렵다. 별도 주석도 없다. 할 수 없이 영어 원문을 구해서 살펴보니 그제야 이해 가능하다. 시어리즈는 케레스(Ceres), 아이어리스는 이리스(Iris)의 영어식 표기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영어식에 매몰되어야 할지 회의적이다. 이 번역본을 읽는 독자가 누구인지, 셰익스피어가 신화를 인용한 까닭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