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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이야기 - Shakespeare's Complete Works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외 옮김 / 달궁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겨울 이야기’는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레온테스가 헤르미오네와 폴릭세네스의 부정을 의심하여 왕비와 갓난 아기를 박대하는 일련의 사건은 겨울에 발생한다. 플로리젤과 페르디타가 사랑을 약속하고, 회개한 레온테스가 죽은 줄 알았던 왕비와 공주를 상봉하는 사건은 봄에 발생한다. 봄이라고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양털 깎기 축제로 계절을 알 수 있다.
시간적 지칭 외에 내용적 의미도 연관되어 있다. 레온테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파장은 비극으로 치닫는데 겨울처럼 차갑고 가혹하다. 반면 레온테스가 잃어버린 가족과 재회하고, 양국의 왕자와 공주가 혼인하게 되는 내용은 화사한 봄날처럼 흐뭇하고 따뜻하다. 겨울에서 시작하여 봄으로 이어지는 시간적, 내용적 변화가 표제에 녹아 있다. 구성으로서는 1막에서 3막까지가 겨울에 해당하고, 4막과 5막은 봄에 해당한다. 전자는 비극이며, 후자는 희극이다. 비극과 희극 전환의 매개는 4막 1장에서 ‘시간’을 등장시켜 담당시킨다.
(시간)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유쾌하지 못했다면 양해해 주시고, 불쾌했던 것은 아니지만 재미가 좀 없었다면,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이 시간의 이름으로 감히 말씀드립니다. (P.116, 4막 1장)
배우자의 정절에 대한 의심은 문학의 오랜 제재 중 하나인데, 결혼 생활이 기대하는 상호 신뢰가 서약에도 불구하고 단단하지 못하다는 반증이다. 굳건한 우정으로 맺어진 레온테스 왕과 폴릭세네스 왕의 경우에도 레온테스는 어느 순간 왕비와 친구의 부정을 의심하며, 의심은 억측과 망상에 힘입어 확신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누구의 말도, 어떤 사실도 의심을 없애지 못하며 모든 것들이 의심을 강화하는 구실을 할 뿐이다. 자신의 의심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만 자신의 적일 뿐이다, 제거해야 마땅할.
(카밀로) 그분의 망상은 확신에서 온 것이라 그분의 육신이 살아 있는 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폴릭세네스)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온 것이오?
(카밀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P.54, 1막 2장)
레온테스의 망상은 아기 유기라는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명령으로 이어지고, 아폴론 신의 신탁마저도 진실로 받아들이길 거부하다가 신의 분노를 산 이후에 망상에서 벗어나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 거대한 권위를 지닌 신탁마저 부인할 정도로 거짓 확신에 깊이 빠진 레온테스와, 한편으로 신의 분노로 순식간에 망상을 벗어던진 레온테스의 두 가지 모습이 대비적이다.
희극으로 끝나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인물은 안티고누스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인 그는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고 꿈속 왕비의 지시대로 보헤미아에 아기를 버린다. 그가 어쩔 수 없음을 왕비 영혼이 이해함에도 어쨌든 악역을 맡았으니 그는 맹수에 물어뜯겨 죽게 되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만다. 그의 비극은 훗날 아내 파울리나의 운수와 상반되어 더욱 안타까울 지경이다.
파울리나는 작품 전개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은 인물이다. 그녀는 시종일관 레온테스의 불합리한 처사를 비판하고, 왕비를 죽은 것처럼 하여 몰래 숨겨 보살핀다. 파울리나가 왕에게 퍼붓는 언사는 매우 혹독하여 조마조마할 지경이다. 대놓고 폭군이라고 지칭할 정도니. 그녀의 충성과 헌신의 대가는 보답을 받는 게 당연하리라. 카밀로처럼.
아우톨뤼코스와 시골 청년은 함께 작품 내 희극적 역할을 담당한다. 시종일관 어리숙하지만 순진한 시골 청년을 속여서 재물을 뜯어내는 도둑 아우툴뤼코스가 막판에는 처지가 뒤바뀌게 되어 착하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장면은 관객과 독자에게 재미와 안도감을 전달한다.
플로리젤과 페르디타의 사랑에 관해서는 진실하지 못한 점이 눈에 띈다. 페르디타는 연인의 신분이 왕자임을 알고 있음에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가 왕의 반대에 부닥치자 실망을 토로한다. 양치기의 딸과 왕자의 결합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플로리젤 또한 신분을 숨긴 채 결혼을 감행하려고 한다. 변장한 폴릭세네스가 부친의 승인을 받으라고 조언하지만 이를 거부한 대가는 부친의 분노다.
(페르디타) 왕자님, 이제 가 주시겠습니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부탁이오니, 왕자님, 귀한 몸을 소중히 보중하십시오. 저는 이제야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P.154, 4막 4장)
그럼에도 사랑을 위해 신분을 기꺼이 포기한 플로리젤의 과감성과 순수한 사랑의 추구는 작품 내에서 빛을 발하며, 현대의 독자들도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이윤기는 유명한 번역가이지만 셰익스피어 작품에서는 상대적으로 낯선 이름이다.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번역본도 없다. 왜 하필 이 희곡에 대해서만 번역본을 남겼는지 궁금하고, 그가 다른 작품의 번역본도 남겼으면 좋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및 문화와 관련된 작품이 무려 14편이나 된다.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문화는 16, 7세기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했던 모양이다. (P.234)
부록의 풍부한 설명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대놓고 그리스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작품 외에도 작품 중간에 고대의 사례를 언급한 예도 상당히 있다. 몰라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안다면 더욱 흥미진진한 독서가 될 수 있으므로.
같은 맥락에서 번역자가 언급한 그리스와 로마의 인명과 지명에 대한 번역 문제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당대의 영국 독자를 위해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은 당연한데, 셰익스피어 번역가들이 국내 독자를 위해서도 여전히 영어식 표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작 국내 독자는 그게 누구와 무엇을 지칭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번역가들이 셰익스피어의 원문을 신성시함인지 아니면 고대 문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인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