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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귀족 친척 ㅣ 셰익스피어 전집 41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9년 8월
평점 :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가장 최후의 작품으로 인정되는 희곡이며, 같은 시기의 <헨리 8세>와 더불어 그의 단독작이 아니라 존 플레처와의 공저이다.
셰익스피어 : 1막, 2막 1장, 3막 1-2장, 5막 1장, 5막 3-4장
플레처 : 2막 2-6장, 3막 3-6장, 4막, 5막 2장
작품해설에 따르면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이상과 같다. 합작이니만치 전체적 짜임새는 단독적인 만큼 유기적이지 않고 다소 느슨한 면이 있다. 특히 1막은 테세우스의 테베 정벌의 불가피성을 끌어내기 위한 배경인데, 나머지 막과의 유대감에서 현저히 괴리되어 있다. 제프리 초서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았다고 하거나 작중 배경이 고대 테베와 아테네라는 점, 그리고 테세우스와 히폴리타가 <한여름 밤의 꿈>과 마찬가지로 등장한다는 점 등은 참고만 하면 될 뿐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테베의 크레온의 폭정을 테세우스가 징벌한다는 것도 아테네 정통론에 입각한 서사 전개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핵심은 팔라몬과 아사이트가 보이는 우정과 사랑의 갈등,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사랑의 강력함이자 동시에 바보스러움이다. 2막 2장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우정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는 사촌 간 혈연의 정과 우정을 갖춘 아름다운 모습이다. 크레온의 폭정에 실망하면서도 조국을 버릴 수 없어 아테네에 맞서 싸운 그들, 포로가 되어 아테네에 갇힌 처지가 차라리 죄악에 물든 테베보다도 낫다고 위안 삼는 그들은 건전한 사고와 윤리관을 지닌 인물들이기도 하다.
(팔라몬) 우리가 크레온의 궁정에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 / 죄가 정의이고, 높은 나리들의 미덕이라는 것이 / 욕망과 무지가 아닌가. 아사이트, 자애로운 신이 /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 남들과 같이 불운한 노인이 되어 저승길에 가고, 누가 / 서러워하지도 않고, 비문에는 대중의 저주가 새겨질 거다. (P.61, 2막 2장)
2막 2장에서 포로가 된 두 사람이 에밀리아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만다. 그들은 더는 친구이자 동료가 아니라 사랑의 경쟁자가 된다, 에밀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사랑을 좇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단지 적에 불과하다. 적은 나와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맹렬한 적대감을 분출하는 장면은 매우 낯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전혀 의외가 아니다.
(팔라몬) 그녀를 처음 본 것은 나고, 또 그녀의 아름다움이 / 남자에게 인식된 것을 처음 이 눈으로 / 확인한 것도 나지. 만약 네가 그녀를 사랑하고, / 나의 소원을 망쳐버리려고 한다면, / 너는 배반자다, 아사이트, 비겁한 놈이다. / 너는 사랑할 권리 같은 건 없다, 우정, 혈통, / 그리고 우리 둘 사이의 모든 연결된 매듭을 포기하겠다, / 네가 그녈, 한번이라도 사랑한다면 말이다. (P.65-66, 2막 2장)
젊은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고 구애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자연법칙이다. 더구나 대상이 에밀리아처럼 빼어난 미모를 갖춘 여성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랑의 감정과 행위는 인간이라는 종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요소다. 인류 문화가 역사적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아울러 남녀 간의 사랑을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서 열렬히 찬미함은 이런 까닭이다. 극 중 대사에서도 모든 신을 지배하는 사랑의 여신을 우월성을 추앙하고 있어 이것의 당연성을 인정한다. 문제는 사랑의 호르몬의 부작용은 이것이 과도하게 분비되면 이성과 도덕이 마비된다는 점이다. 사랑 외엔 모든 것이 맹목적으로 된다. 가족도, 친구도, 조국도. 에밀리아는 원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팜므파탈이 되었다. 그녀는 극 중에서 남자에게 관심 없어 하는 인물인데 4막 2장에서 갑작스레 팔라몬에 대한 열렬한 감정을 표출하는 대목은 낯설기 그지없다.
남녀 간의 사랑에는 애틋하고 안타까운 예도 있다. 쌍방의 감정이 서로를 향한다면 좋겠지만, 일방이 바라볼 때 다른 한쪽이 등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딱한 상황이 된다. 에밀리아는 어쨌든 팔라몬과 아사이트를 외면하지 않는다. 반면 팔라몬은 교도관의 딸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다. 그녀는 단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여성에 불과하다. 물론 신분상의 격차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팔라몬을 향한 지고한 사랑이 보답을 받지 못하자 그녀는 광기의 지배를 받고 교도관의 딸이 보여주는 대사나 행동 하나하나는 독자 또는 관객에게 그만큼의 아픔과 동정을 유발한다.
(딸) 몹시 추워. 별들도 다 사라졌어, / 장식용 술 같이 보이던 작은 별까지 말이야. / 해님도 보았을 거야, 내 바보스런 꼴을. 팔라몬! / 아 아냐. 그이는 천국에 있어, 나는 지금 어디 있지? (P.106, 3막 4장)
이 작품은 통상 셰익스피어의 로맨스 희곡으로서 비희극으로 분류된다. <겨울 이야기>, <템페스트>, <페리클레스>, <심벨린>과 달리 이 작품은 비희극으로 평가하기 애매하다. 팔라몬을 중심으로 놓고 본다면 시련 끝에 에밀리아와 결혼하게 되므로 맞는다고 볼 수 있지만, 아사이트를 외면하기 어렵다. 아사이트는 역할과 비중 면에서 결코 팔라몬에 못지않은 공동 주인공이다. 팔라몬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에밀리아와의 결혼 권리를 쟁취한 이가 아사이트라는 점을 놓치지 말자. 그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덧없이 목숨을 잃고 자신의 권리를 친구에게 양보한다. 이것을 볼 때 과연 비희극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팔라몬) 오, 사촌! / 소망한 것을 얻으면, 소망한 것을 / 잃어야 하다니! 소중한 사랑을 / 잃지 않고서는 소중한 사랑을 얻을 수 없다니!
(아사이트의 유체가 옮겨져나간다)
(테세우스) 운명의 여신이 / 이렇게 교묘한 승부를 한 일은 없었다. 패자가 이기고, / 승자가 졌으니 말이다. 그러나 승부에서 / 신들은 극히 공평하였다. (P.200, 5막 4장)
팔라몬과 테세우스의 대사는 서로 다른 감정과 해석을 보여준다. 팔라몬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반면 테세우스는 오히려 신이 공평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에밀리아를 먼저 본 사람이 팔라몬이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미를 부여한다. 오늘날 사랑의 주제에서 테세우스 같은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