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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치다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68
박하령 지음 / 자음과모음 / 2018년 4월
평점 :
이 책은 청각 장애인 부모를 둔 주인공이자 화자인 유나와 부모의 관계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소설이다. 가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기본적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으로 인식된다.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족의 역할을 찬미하며 가족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고금을 막론하고 끊이지 않는다. 그만큼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 가족이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탓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으레 그러하듯 가족 관계가 항상 긍정적이지는 못하다. 이른바 정상적인 가족 간에도 갈등과 불화가 개입하기 마련인데, 유나네 가족처럼 구성원의 정립(鼎立)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가족이라면 더욱 그러하기 쉽다. 게다가 유나는 아직 고등학생이다. 유나에게 어른과 같은 이해 촉구와 의무 이행을 무한히 요구하고 기대해서는 안 되는 형편이다.
가족은 사랑 공동체이지만, 사랑이 의무와 족쇄로 변질될 경우가 있다. 이때 가족은 더 이상 구성원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는 관계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명분으로 가해지는 강제와 폭력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가족은 결코 운명 공동체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랑이든 가족이든 적절한 거리를 두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게 바람직한 거란 결론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 고였다. [......]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은 다 뿌옇게 보인다. (P.87)
건강한 가족은 가족간에 한치의 틈도 없이 꽉 달라붙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예전에 읽은 책에 따르면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벌어져 있어야 한다고 하며, 그것을 ‘숨겨진 차원’이라고 부른다. 숨겨진 차원이 물리적 공간만을 지칭하지는 않을 것이다. 심리적, 정서적 여지도 사람 사이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유나가 희수에게 부모의 신분을 속인 것이며, 희수와 엄마가 마주칠까 봐 토론 대회에서 도망치는 행동을 한 것은 행위의 잘잘못을 떠나 유나가 더 이상 가족의 미명 하에 자신이 매몰당하는 현상을 거부한 결과다. 농아 부모와 이른바 정상인들을 사회적으로 연결시키는 중간자적 역할말이다.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던 바로 그 순간, 수영장에서 턴을 하는 시점과 같다고나 할까? [......] 꼭 맞는 비유가 아닌 것 같은 노파심에 굳이 다시 설명을 다시 한다면, 한마디로 난 이젠 달.라.지.고. 싶다. (P.66)
가족이 함께 있으면 물론 좋지만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다. 어차피 떠날 때가 있고 구성원의 발전을 위해 떠나는 게 마땅하다면 이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유나가 부모와 함께 지방에 내려가길 거부하는 까닭은 자신의 미래가 부모와 함께 매몰될까 두려워서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다. 유나 엄마가 유나를 남겨 두고 떠나는데 동의하고, 후에 자신의 질병을 숨긴 채 죽음을 앞에 두면서도 그런 결정이 잘한 결정이었다는 의미 또한 같은 맥락이리라.
따지고 보면 세상에 온전하고 정상적인 가족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은이네 가족, 승미네 가족, 희수네 가족 모두 한두 가지는 결핍되어 있다. 외관상 명확하게 드러나든,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 곯아 있는 관계든 말이다. 우리는 다른 가족의 사정을 알지 못한 채 서로가 상대방의 처지를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품으며 질시하곤 한다.
“해! 하면 되잖아. 하라구! 너도 부모님한테 개겨. 하면 되지 뭐 그렇게 평계가 많아?”
“그게 왜 핑계야?”
“너 모르나 본데... 넌 맨날 너네 엄마, 아빠를 내걸고 무기 삼아서 떠벌린다구.” (P.50)
소설의 후반부는 두가지 다른 방향으로 요동친다. 먼저 유나와 친구들의 관계다. 농아 부모를 외피 삼는 자신의 진실을 대놓고 말하는 주은이를 유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이성으로는 주은이가 옳음을 알지만 감정은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왕따 행위, 아마도 주은이의 사고가 없었다면 양자의 관계가 어떤 파국으로 치달았을지 알지 못한다. 이 소설의 주제가 이쪽이 아니기에 더 깊숙이 다루지는 않지만 왕따 가해자가 되는 유나의 심리- 자기 합리화와 억지 -를 잘 묘사하고 있다. 유나는 주은이의 발언을 통해 새삼 자신이 간과하던 그와 부모 관계의 진실에 눈뜨게 된다. 괴롭더라도 안온하지만 무거운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을.
“창피해한다는 건 남을 의식한다는 거잖아. 그게 장애란 거지. 너 집에선 엄마, 아빠의 장애를 크게 못 느끼잖아? 그런 것처럼 네가 엄마, 아빠를 부끄러워할 때만 너희 부모님이 장애인이신 거지. 그러니까 결국 그건 네가 장애인이라는 거지. 너 자신한테 자신이 없으니까.” (P.147)
엄마와 외가의 관계는 일부 의외의 설정이 있지만, 농아가 저절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과 농아에 대한 보호 및 교육 체계가 부족한 실상을 노정한다는 측면에서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장애아에 대한 일말의 부끄러움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나 본능적인 불안감을 지니게 마련이다. 유나 엄마에 대한 외할머니의 행동은 애정과 수치가 결부된 것이었지만, 한가지 간과한 점은 자식의 앞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지원이 많이 부족하다.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정도로 개선할 필요가 반드시 있다.
청소년 소설답게 결말은 원만하게 해결된다. 유나는 희수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솔직한 자신으로 만남을 시작하며, 엄마와 외할머니는 해묵은 원망과 갈등을 봉합한다. 비록 유나 엄마는 병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결코 불행한 죽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유나는 계속 발버둥칠 것이다. 자신이 오롯이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난 발버둥친다. 아름다운 발버둥이다. 문밖에서 기다리는 미래를 위한 몸짓이므로. 세상의 모든 발버둥은 아름답고 의연하고 경건하다. (P.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