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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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 고등학교의 추천도서 목록을 살펴보는데, 표제에 특수기호가 들어간 책명이 보이길래 이게 뭘까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이른바 비속어가 들어있어서 나름 중화시킨다고 특수기호로 가린 것이다. 뭔가 이상하다, 권장도서인데 책명을 가리다니. 대담한 제목은 작가의 당당한 선택이다. 여기서 썅년은 남성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여성주의를 외치는 작가를 포함한 여성들을 지칭하는 남성들의 욕설인 동시에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 책은 웹툰 에세이다. 웹툰과 글이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는데, 아무래도 독자의 눈에 확 들어오기는 만화다. 작가는 본인이 겪거나 생각한 일상생활 속 성차별의 사례를 재밌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그림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는 글로써 미진한 부분을 설파하는데 글은 그림의 보완과 확장인 동시에 한층 강력한 주장을 펼친다. 개인적으로 만화만으로 구성하였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다. 여성주의 글은 이미 충분히 많기에.

 

이 책만의 특징은 무엇보다 웹툰 형식을 도입하여 흥미를 끌었으며, 표현 방식과 수위가 매우 직설적이라는 점이다. 작가의 주장에 공감하는 많은 여성들은 사이다를 들이켰을 때의 통쾌함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시원하게 볼일을 보았을 때의 상쾌한 배설 쾌감과도 비슷하다. 그만큼 작가는 여기서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며 점잖고 온화한 표현을 벗어던지고 주변 눈치 보지 않은 상태에서 썅년이란 소리를 들을 각오로 통렬하게 남성주의 문화를 비난한다.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다.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알게 모르게 젖어있는 남녀 차별과 남성 우월의 관념은 계속해서 지적과 개선이 필요한 영역이므로. 다만 우려는 작가의 판단기준과 수위가 지나치게 여성 중심적이고 과격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작가의 말대로 나쁜 남성은 열 명 중 두 명, 착한 남성은 한 명이며, 나머지 전부는 기회주의자라고 간주한다면, 대다수 남성은 잠재적 성범죄 가해자다. 작가의 주변 남성, 즉 아빠와 남자 형제, 또는 남사친과 남자 지인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공격적이며, 과도한 부풀리기 인식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타협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에 공감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잠재적 적군으로 간주한다. 적당한 공감은 거부한다. 굳이 우군은 필요없다고 선포한다.

 

기존 사회체제에서 남성은 가해자, 승리자, 지배자로, 여성은 피해자, 패배자, 피지배자로 단순하게 나눠 보는 관점은 적절하지 않다. 남녀 모두가 사실은 피해자다. 과거에는 그것이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며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문제로 대두되었다. 모두가 합심하여 개선 또는 철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사안이지 아군과 적군으로 양분해 갈라치기 한다면 갈등과 반발을 초래하여 문제해결에 역행할 뿐이다.

 

여성주의 이슈는 항상 조심스럽다. 저마다의 생각과 기준은 동일할 수 없고 다양하지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이원론밖에 없다.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 선과 악. 오늘날 성차별과 남성주의 문화가 당연하다고 믿는 남성은 극소수다. 대다수는 남녀평등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인정한다. 개선하는 속도와 범위에서는 이견이 생길 수 있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대목이 바로 이런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작가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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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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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케로는 유명한 카이사르와 동시대인으로서 그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다가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키케로의 명성은 공화주의자 정치가보다는 그가 남긴 불후의 저작에 따른 사상적, 문학적 영향력에 힘입어서다. 이 책에 실린 <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는 대표작으로서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닌다.

 

<노년에 관하여>는 대 카토를 화자로 해서 그가 자기 집을 방문한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에게 노년의 삶의 가치와 편견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예나 지금이나 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고 대비되는 싱싱한 청춘의 삶을 예찬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카토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나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되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둘째, 노년은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 하며,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넷째, 노년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네. (P.29, 5)

 

카토의 말은 대체로 옳다. 육체적 활동은 쇠퇴하지만 지혜와 판단력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청년은 육체적 활동에서 장점을 지닌다면 노년은 원숙미를 발휘하는 활동을 하면 된다. 노인이 되면 감각적 쾌락에 무뎌진다는 건 결점인 동시에 장점이 될 수 있다. 쾌락의 유혹에 굴복하여 일신을 망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한다면 절제 있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노년도 괜찮다.

 

반면 둘째와 셋째 이유에 대한 반론은 다소 빈약하다. 그는 건강 상태를 잘 유지할 수 있다면 노인이라고 무조건 허약한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모든 노인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쾌적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우겨봐도 젊은이에게 비하면 육체는 쇠약해지고, 질병에 취약해지는 게 노년의 자연스러운 생리다. 아울러 죽음을 맞닥뜨리는데 청년과 노년의 순서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확률적으로 노인의 죽음이 훨씬 크다는 점을 무시할 순 없다.

 

죽음이 영혼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고,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 (P.78, 19)

 

카토의 주장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영혼 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영혼은 항상 저절로 움직이고 단일한 본성을 지니며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영혼은 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언뜻 고대 그리스의 원자를 떠올리게 하는데,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이라는 차이가 있다. 살아생전 훌륭한 인생을 가꾸었고 영혼이 불멸한다면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비극이고 최종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통과 절차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카토는 사람은 적절한 때에 죽는 게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끝맺는다.

 

<우정에 관하여>는 대화체 형식을 사용한다. 라일리우스가 두 사위인 스카이볼라와 판니우스에게 자신과 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우정을 들려주고 훗날 스카이볼라가 이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대화체이지만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라일리우스가 일방적으로 주도한다. 앞서 노년의 삶의 가치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어 보편적 설득력에서 아무래도 흡인력이 덜한 반면, 우정에 관한 담론은 참으로 매끄럽고 설득력이 있다. 자고로 우정을 기리지 않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므로. 우정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요청을 받고 라일리우스도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라일리우스) 우정이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지혜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고 싶네. (P.117, 6)

 

돌이켜보면 혈연관계도 아닌 생판 남남인 사이에서 세월과 죽음도 무릅쓰고 고귀하고 굳건한 상호 간의 믿음과 호의가 싹 트고 유지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진실한 우정은 어떤 이익도 기대하지 않고, 신분과 능력의 우열, 인종 간의 구별도 뛰어넘는다. 그렇기에 라일리우스는 우정은 필요가 아닌 선의와 호감의 본성에 비롯되며 진정한 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세상에는 참된 우정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정의 외피를 쓴 거짓 우정도 난무한다. 라일리우스는 이를 매우 경계한다. 자칫 우정의 허명을 중시하여 우정이 지닌 참된 가치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배격한다. 선의 미덕에 근거하지 않고 악덕에 이끌린 우정은 잘못된 우정이다. 우정의 이름으로 벗에게 배덕, 범법을 요구한다면 그는 진정한 벗이 아니다. 친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릇된 길로 나아간다면 이를 방관하거나 영합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내 거듭 말하노니, 우정을 맺어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이라네. 조화와 안정과 신뢰는 모두 거기서 비롯된다네. (P.175, 27)

 

따라서 우리는 친구를 사랑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며, 친구와 바른길로 더불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의 본성이 바뀌어 같이 할 수 없다면 우정의 배반이라는 인상이 들지 않게끔 서서히 소진되는 것처럼 하라는 조언은 차라리 현실적이다.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P.162, 21)라고 할 정도로 인간에게는 중요한 존재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뜻이 맞고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며 상호 신뢰가 가능한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다. 키케로는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어 우정에서 미덕의 중요성을 더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우정을 가리는 잣대가 됨을 강조한다.

 

공화주의자로서 키케로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는 귀족, 즉 원로원이 중심이 되는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체제로 보았다. 군주제는 물론이고, 평민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일체의 시도에도 맹렬히 반대하였다.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그의 개혁에 대한 키케로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임을 <우정에 관해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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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오브 뮤직 논술세계대표문학 2
마리아 트라프 지음, 이경애 엮음 / 훈민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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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이 작품의 원제를 <트라프 가족 합창단 이야기>로 기억하지 않는다. 뮤지컬과 영화의 대성공으로 우리는 모두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기억할 뿐이다. 이처럼 타 장르의 성공으로 기억되는 원작을 읽게 되면 항상 원작과의 차이점을 은연중에 비교하게 된다. 무엇은 영화 내용과 같고, 어떤 장면은 영화에서 변용을 가하였고 등등.

 

국내에 출간된 모든 번역본은 아동용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나마 아동용이라는 느낌이 비교적 덜하다. 놀라운 점은 익히 아는 영화의 내용은 이 작품의 딱 절반에 해당한다. 예비 수녀 마리아가 트라프 가문의 가정교사가 되고 가족 모두의 사랑을 얻게 되어 남작과 결혼하게 되며, 나치의 압박으로 생사를 건 탈출에 성공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원작의 줄거리를 충실하게 따랐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원작과 크게 차이 나는 점이 일부 있는데 가족의 탈출을 도와주는 인물이 원작에서는 바스너 신부다. 영화에서 남작의 생활 형편은 나치 치하에서도 그렇게 어렵게 그려지지 않지만 원작에서는 어려운 살림을 타개하기 위해 저택을 신학교로 사용하도록 대관한다. 바스너 신부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데 그가 트라프 일가의 음악 교육을 돕는 한편 그들이 무사히 탈출할 수 있도록 작전을 기획한다. 알프스산맥 입구에서 일가와 헤어져 오스트리아에 잔류하는 신부의 모습은 마치 순교자와 같은 아우라가 느껴진다. 영화에서 애청하는 여러 노래는 에델바이스를 제외하면 대체로 원작과 무관하게 작곡된 곡이다. 유명한 도레미 송장면도 원작은 상대적으로 담담하고 무난하게 묘사되어 있어 영화 애호가라면 다소 실망할 법하다.

 

전반부가 영화와 원작의 비교에 초점을 두고 보는 재미가 있다면 후반부는 전혀 생소한 원작의 이야기에 관심을 쏟게 된다. 후반부는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도착하여 고생을 겪다가 가족 합창단으로 성공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후반부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영화가 가공의 이야기를 담은 게 아니라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가족 합창단은 단번에 성공의 길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니다. 문화적 차이와 정식 영주권이 없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떠돌이 생활을 겪는 가족의 모습. 2급 연주가로서 취급받는 그들이 비로소 미국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이야기는 당대 피난 유럽인의 전형적인 사연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트라프 남작이 귀족 혈통의 자부심으로 가족 합창단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뮤지컬과 영화 제작자가 원작의 전반부만 다룬 까닭도 충분히 납득이 간다. 누구나 역경과 고난을 겪는 주인공이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극복하는 소재에 마음이 끌린다. 여기에는 마리아와 아이들이 뿜어내는 유쾌하고 밝은 분위기와 아울러 나치 체제가 강요하는 암울한 전쟁 분위기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건 탈출이 성공하는 대목까지. 반면 후반부는 가족의 고초는 이해 가지만 반복되는 연주 여행 장면은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미국 관중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호루라기 소리가 아니라 관심과 사랑이란 말이에요.”

마리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P.57)

 

장르의 차이는 있지만 마리아가 던지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트라프 남작의 죽은 부인에 대한 그리움이 어떠하든 아이들도 자신의 엄마를 여읜 것이며 아이를 돌봐 줄 책무가 남작에게서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트라프 남작은 순전히 자신만 생각한 편협한 사고를 지녔으며 마리아가 그것을 일깨워주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도 대중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게 귀족 혈통인 자신에게는 수치로 생각하였으니 유럽의 전통적 사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남작과 결혼하려는 이본 부인도 자기 본위라는 점에서 남작과 마찬가지다. 자신은 남작과 결혼하려는 것이지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지극히 현대적이라고 하겠지만 재혼남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서는 굉장히 몰지각하고 무책임한 태도이다.

 

트라프 가족은 비로소 자기들의 결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이 귀중한 몇 분 동안에 청중과 그들은 완전히 일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청중과의 사이를 잇는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P.154)

 

미국에서 트라프 가족 합창단은 오랫동안 최고의 연주단체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기획자인 와그너 씨와 샹 씨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건 그들이 유럽의 고답적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공연 내내 바흐를 위시한 중세와 르네상스 종교 합창곡, 슈베르트 등의 고전 작품만 무대에 올렸으니 청중들로서는 예술 수준은 차치하고 일단 재미없고 따분하였으리라.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치가 있을지 묻는다면 기꺼이 긍정적으로 답변하고 싶다. 영화를 먼저 접한 독자들은 작중에서 트라프 남작과 아이들에게 가해진 나치의 위압과 협박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한다. 원작에서 남작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생존하려면 오스트리아를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학교에서는 히틀러와 나치 찬미를 노골적으로 요구하여 트라프네 아이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큰아들 루베르트는 병원의 높은 자리 제안을 받는다. 트라프 남작은 독일 잠수함 지휘를 요구받는다.

 

주인공 마리아의 삶은 원작에서 비로소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에서 예비 수녀 마리아는 남작과 결혼하지만 아직 아내와 엄마다운 모습은 아니다. 경쾌한 처녀로서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원작에서 마리아는 결혼 후 두 딸 로즈마리와 롤리를 낳는다. 미국에 가서는 아들 요하네스를 낳는다. 즉 일가족이 오스트리아를 탈출하기 전에 이미 마리아는 아기엄마였다.

 

작품의 결말은 썩 해피엔딩은 아니다. 남편 트라프는 암에 걸려 미국에 건너온 지 10년도 안 되었는데 사망한다. 마리아 또한 얼마 후 신장병이 악화하여 임종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기적적으로 회복하여 다시금 트라프 가족 합창단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책의 마지막 단락이 인상 깊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는 동안, 트라프 가족은 스스로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단 한 가지, 돈도 명예도 아니고 오직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20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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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족 논술대비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명작 28
아그네스 서퍼 지음, 이영호 옮김 / 지경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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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페플링가> 또는 <페플링 씨 가족>으로 1906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여러 출판사에서 명작 아동문학으로 소개하고 있어 궁금한 김에 읽어본다. 페플링 씨는 가난한 음악 교사다. 그에게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는데 부부는 자녀들은 사랑과 우애가 넘치는 훌륭한 가족으로 키워낸다는 줄거리다.

 

우선 페를링 씨 부부가 재력으로는 부족하지만 인성으로는 등장인물 중에서 독보적으로 돋보이는 모범적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려고 애쓰며 어려운 처지에서도 솔직함으로 정도를 걸으며, 자녀 훈육에서도 애정과 함께 따끔한 질책도 아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애정 일면에 치우친 요즘 양육관과는 결을 달리한다.

 

일곱 명의 아이들 모두 부모를 닮아서인지 착하고 성실하다. 제각각 개성은 지니고 있지만 결코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 공부를 잘하는 오토는 친구들의 비웃음을 살까 봐 전나무 운반을 동생에게 맡겨버리는 행동으로 페플링 씨에게서 비겁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가 진짜 비겁한 아이라면 비뚤어진 길로 엇나가겠지만 오토는 그러하지 않다. 플리더도 바이올린에 빠져 규칙을 어기며 부모의 말도 따르지 않지만 결국 절제를 발휘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에게 러시아 장군의 음악 교습을 추천하는 대가를 요구하는 루돌프 마이어의 제안을 거부하라고 조언하는 카를. 눈싸움하다가 실수로 맞힌 신사에게 정중하게 사과하며, 끝내 친구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의리를 지킨 빌헬름. 쌍둥이 마리안네와 귀여운 막내 엘제. 일곱 아이가 합심하여 빌헬름의 성적을 감추려다가 들킨 장면은 비록 올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그네들의 따뜻한 우애를 찾아볼 수 있다.

 

페플링 씨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자연스러운 아이다움을 잃어버린 루돌프 마이어와 꼬마 음악가와 달리 당당한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한 길을 차근차근 밟아나가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것이 페플링 씨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면서 노력하는 자녀교육의 지향점이다. 페플링 부인의 오빠가 어려운 여동생을 돕기 위해 아이 한 명을 데려가 키우려고 하였으나 이를 포기하는 것 또한 평생 변함 없는 우애를 지닌 데다 사랑으로 똘똘 뭉친일곱 아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아서이다.

 

거의 모든 아동문학처럼 이 작품 역시 행복한 미래로 끝맺음한다. 페플링 씨는 신설되는 음악 학교의 교장 통지를 받는. 아빠의 명예와 함께 가족은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것이며 귀가 어둡지만 성실한 가정부 발브르크도 급여 인상을 약속받는다. 너무 이상적이며 상투적이고 작위적이지 않으냐는 비판도 가능하지만 장르 특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작품에서 내세우는 교육방식과 가치관이 현대의 그것과 부합하느냐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백여 년 전에 쓰인 가정 소설이라는 한계는 분명 외면할 수 없고 가부장적 권위 강조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관계없이 인성과 사회윤리의 기본 개념은 변함없음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진부하거나 구태의연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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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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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1. 피곤한 아이

2. 올드 언더우드

3. 어린 가정교사

4. 늦은 밤에

5.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

6. 해와 달

7. 환희

8. 영원한 사랑

9. 낯선 사람

10. 미스 브릴

11.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12. 만에서

13. 인형의 집

14. 차 한 잔

15. 파리

16.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

 

<가든파티>에 이은 맨스필드 작품집 두 번째 도전이다.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연대순으로 골고루 작품을 선별하였다. 따라서 맨스필드의 작품세계가 변화 발전한 모습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다. 앞선 책과 중복 수록된 <낯선 사람>, <미스 브릴>, <파커 아주머니의 인생>, <만에서>는 여기서 별도로 언급하지 않으련다.

 

맨스필드는 우아하고 고상한 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독자의 섣부른 예상과 기대에 영합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시각에서 개인의 삶과 세상에 깃들인 냉혹함과 부조리를 담담하게 때로는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기술한다. 특별히 과장된 묘사와 수사를 동원하지 않으며 서서히 나아가다 일순간에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작가의 수법은 묘한 뒷맛을 남긴다.

 

<피곤한 아이>는 초기작으로서 모방작이지만 맨스필드 만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어린 하녀 아이는 피곤함에 지쳐 어쩔 줄 모르지만 부인은 인정사정없이 아이를 부려 먹는다. 사생아라는 출생 상의 약점이 아이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망각하는 단초가 되는데, 결말은 다소 충격적이다. 작가의 후기작 같은 은근하고 미묘한 암시는 여기서 나타나지 않는다.

 

소리 없이, 생글거리며, 살금살금, 아이는 부인의 침대에서 분홍색 베개를 가져와 아기의 얼굴 위에 올려놓고, 버둥거리는 아기를 있는 힘껏 눌렀다. ‘대가리가 잘려나간 오리처럼 꿈틀거리네.’ 아이는 생각했다. (P.17)

 

<올드 언더우드>에서 영문을 모르는 독자가 서서히 알게 되는 진실은 올드 언더우드가 살인죄로 복역 후 출소하였으며, 살인 동기는 아내의 불륜이었는데 연놈이 아닌 아내만을 살인하였다는 사실이다. 늙어서 쇠락한 올드 언더우드의 가슴속에서 울리는 쉼 없는 망치질 소리는 무엇일까. 그의 상념의 변화에 따라 울림의 세기와 빠르기는 증폭된다. 선창의 어떤 배에서 자고 있는 건장한 사내의 모습, 환하게 웃으며 사내를 바라보는 아내의 사진. 작가의 글은 더 이상 나아가지 않지만 독자의 상상력은 그칠 줄 모른다.

 

세상사에 깃든 위험과 부조리함은 <어린 가정교사>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어린 여성 홀로, 낯선 땅에서의 여행은 아무래도 위험한 게 현실이다. 사방의 적대자에 둘러싸인 그녀에게 친절을 베푼 늙은 신사는 얼마나 안전하고 믿음직한 존재였을까. 어린 가정교사는 그를 완벽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야! 노인이 완전히 딴사람으로 변했다. , 끔찍해라! 어린 가정교사는 경악하며 노인을 보았다. (P.42)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여성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사회 현실과 늙은 나이에도 강압적으로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남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리라. 물론 어린 가정교사도 잘못은 있다. 타인의 이유 없는 과도한 친절을 무비판적으로 덥석 수용한 결정은 순진하기보다는 어리석음에 가깝다. 물론 어리기에 그러했겠지만.

 

<늦은 밤에>는 짧은 작품이지만 사랑을 갈망하는 여성의 이율배반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심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호감을 표시하는 듯하지만 자신이 다가서면 물러서 버리는 남성을 향한 불만. 자신에게 보낸 편지가 호감일지 모욕일지 궁금해하면서 부정적인 해석으로 기울어가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려는 애처로움이 인간 심리의 미묘함을 나타낸다.

 

, 됐다그래. 제발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태워버려! 아니, 지금은 안 돼. 불이 꺼졌잖아. 이제 자야지. 정말 일부러 모욕을 주려고 쓴 걸까. , 피곤해. (P.48)

 

<해와 달>은 어른 세계를 향한 아이들의 순수한 시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이들의 이름이 해와 달이기에 다소 우화적 느낌도 풍긴다. 뭉개진 아이스크림 푸딩 장식은 즐거운 파티의 정도에 대한 척도기에 어른의 관점에서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해는 그렇지 않다. 아름답고 정교하게 준비된 파티 음식과 디저트는 그에게 순수한 미의 척도에 있어 망가뜨려서는 안 될 존재다. 완벽한 순간과 존재가 어른들의 향락과 욕망을 위해 일순간에 허물어지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으리라. 그래서 해는 이렇게 외친다.

 

돌연 해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해요-끔찍해요-끔찍해요!” 해가 흐느꼈다. (P.99)

 

이 책의 표제작인 <차 한 잔><환희>는 묘하게 닮은꼴이다. 우선 주인공이 유부녀이며 상류층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신의 처지에 매우 만족함을 표명하고 있다. 후자에서 버사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만족과 환희는 눈부실 만큼 싱그럽고 흐뭇하기조차 하다. 기쁨과 사랑과 행복에 휩싸인 그녀만큼 행복한 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전자의 로즈메리는 결을 달리하지만 삶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점은 똑같다. 그녀는 대신 자신의 마음대로 호화와 사치를 누릴 수 있으므로.

 

두 사람의 완벽한 세계가 무너진 계기는 사소하다. 버사는 파티에 어울리지 못하며 남편에게 미움받는 미스 풀턴에게 동정과 애정을 함께 느낀다. 차 한 잔을 구걸하는 가난한 여자를 기어코 자신의 저택으로 데려오는 로즈메리 또한 동정과 자부심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우월자의 지위에서 열등한 사람을 내려다보는 그네들의 시선은 -의도의 선악에 무관하게- 현상의 뒤바뀜으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 이제 버사는 사랑과 행복에 젖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미스 풀턴임을, 로즈메리는 거지 여인의 빼어난 미모에 남편의 관심이 쏠리자 돌연 위기감을 느낀다. 독자는 버사와 로즈메리의 섣부른 도취를 손쉽게 비판할 수 있지만, 기실 그네들에게 진정 잘못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그런 면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의 관심을 회복하려는 로즈메리의 노력이 딱할 따름이다.

 

로즈메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필립.” 로즈메리는 속삭이고, 그의 머리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예뻐?” (P.252)

 

<인형의 집><가든파티>와 비슷하다. 버넬가를 배경으로 키지어와 베럴 이모가 등장할 뿐 아니라 주제 의식 역시 유사하다. 빈부격차에 기반한 사회계급의 명확한 구별은 바로 이웃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가든파티 개최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려한 인형의 집을 구경할 수 있는 자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켈비네 아이들이 따돌림당하는 까닭은 단지 그들이 가난하고 신분상 천하다는 이유다.

 

독자는 키지어의 용감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한편 베럴 이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편협한 사고에 심한 불편함을 느낀다. 특히 대놓고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베럴 이모에게는 적개심이 생길 정도다. 한편 내쫓기는 찰나의 순간에 인형의 집의 조그만 램프를 본 것에 기뻐하며 미소 짓는 엘스를 바라보는 우리네 마음은 따스함과 안타까움 그 어디쯤이리라.

 

<영원한 사랑><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미완)>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함께 다루어봄 직하다. 전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병든 아내를 간호하기 위하여 함께 요양 온 남자의 이야기다. 쇠잔하고 연약한 아내는 남편의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한다. 남자는 분명 아내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어찌 보면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부부의 사랑이다. 한데 이상하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그것은 부부의 사랑을 다루는 맨스필드의 필치가 극히 담담하고 건조하기 때문이리라.

 

후자는 미완작이지만, 완성된 부분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여기서 부부는 이미 서로 간에 마음이 떠났다. 남성 화자는 아내를 가리켜 마음이 산산조각 난 여자라고 칭한다. 한때의 사랑과 아름다운 부부애는 한순간에 시들고 이제 그들은 남남과 같은, 어쩌면 남남보다도 못한 관계에 처해 있다. 그렇게 남처럼 살 거라면 헤어지지 않고 뭐 하는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들이 서로를 떠나지 않는 이유를 파헤쳐보면 미스터리를 발견한다. 단순히 그들은 못 떠나는 것이다. 묶여 있다. 그들을 옭아맨 굴레가 무엇인지는 자신들만 안다. 내 말이 모호한가? 글쎄, 이 문제가 애초에 대낮처럼 명백하지 않지 않은가? (P.267)

 

결혼 관계는 하나의 사회적 약속이자 굴레이기에 애정의 소멸에도 상관없이 관계가 유지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들 부부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특별히 이상하지 않다. 화자는 양자의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한 연유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화자의 유년 시절이 부부의 현재 애매한 상황에 어떤 빛을 던져줄지 독자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이 미완성작이기에,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모른다.

 

이 책의 작품 중 가장 문제작이라면 단연 <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파리>를 꼽고 싶다. 그만큼 두 작품은 독자인 내게 당혹감과 충격을 주었다. 철저한 악행과 무자비한 잔인함으로. 후자에서 사장은 양면적 상황에 놓인다. 하나는 죽은 아들의 무덤 소식을 통해 잊고 싶었던 과거의 아픈 기억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 다른 하나는 잉크병에 빠진 파리에게 희망 고문을 선사하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 존재는 분명 하나이련만 비극과 아픔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변모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는 사장은 비단 유별난 인물은 아니리라. 압권은 가해와 살육의 즐거움에 빠져 자신이 조금 전 왜 눈물 흘릴 뻔했는지 기억 못 하는 대목이다.

 

조용히 걸어가는 늙은 개 뒤에서 사장은 조금 전에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려 했다. 무엇이었지? 그건.... 사장은 손수건을 꺼내 목깃 아래를 훔쳤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그는 기억할 수 없었다. (P.260-261)

 

전자의 주인공은 단연코 위선자다. 신사이자 작가로 자처하는 그는 게으르지만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몸을 파는 일조차도. 그런 그가 파리의 한 카페에서 마주친 글귀-Je ne parle pas francais(나는 프랑스어를 못합니다)-를 통해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과거의 사건을 떠올리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할 줄 모르며, 연인에게 버림받아 곤경에 처한 여성 마우스. 그녀에게 주인공은 어떤 행동을 하였던가. 이 작품에서 맨스필드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지 자못 궁금하다. 사회 밑바닥, 그리고 양심의 구렁텅이에까지 영락한 인간성의 한계를 확인해 보고 싶었을까. 또는 사회적 타락은 주인공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일반의 현상이기에 그 부조리함은 일개인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가든파티>를 통해 맨스필드 문학에 입문한 내게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당혹감을 안겨준다. <가든파티> 수록작이 그나마 작가 후기의 완성되고 정제된 작품이라면 이 책에는 날 것, 미숙한 것, 원숙한 것 듯이 혼재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작가 맨스필드의 생소하면서도 온전한 실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엔 이 책이 더욱 유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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