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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M.T. 키케로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6월
평점 :
키케로는 유명한 카이사르와 동시대인으로서 그와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다가 카이사르 사후 안토니우스에게 암살당하는 비운의 인물이다. 키케로의 명성은 공화주의자 정치가보다는 그가 남긴 불후의 저작에 따른 사상적, 문학적 영향력에 힘입어서다. 이 책에 실린 <노년에 관하여>와 <우정에 관하여>는 대표작으로서 에세이에 가까운 형식을 지닌다.
<노년에 관하여>는 대 카토를 화자로 해서 그가 자기 집을 방문한 라일리우스와 스키피오에게 노년의 삶의 가치와 편견을 담담하게 진술한다. 예나 지금이나 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노인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여기고 대비되는 싱싱한 청춘의 삶을 예찬한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카토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나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네 가지 이유를 발견하게 되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둘째, 노년은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 하며,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넷째, 노년은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네. (P.29, 5장)
카토의 말은 대체로 옳다. 육체적 활동은 쇠퇴하지만 지혜와 판단력은 오히려 늘어날 수 있다. 청년은 육체적 활동에서 장점을 지닌다면 노년은 원숙미를 발휘하는 활동을 하면 된다. 노인이 되면 감각적 쾌락에 무뎌진다는 건 결점인 동시에 장점이 될 수 있다. 쾌락의 유혹에 굴복하여 일신을 망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한다면 절제 있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노년도 괜찮다.
반면 둘째와 셋째 이유에 대한 반론은 다소 빈약하다. 그는 건강 상태를 잘 유지할 수 있다면 노인이라고 무조건 허약한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럴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모든 노인이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쾌적한 생활을 누리지는 못한다. 제아무리 우겨봐도 젊은이에게 비하면 육체는 쇠약해지고, 질병에 취약해지는 게 노년의 자연스러운 생리다. 아울러 죽음을 맞닥뜨리는데 청년과 노년의 순서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확률적으로 노인의 죽음이 훨씬 크다는 점을 무시할 순 없다.
죽음이 영혼을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죽음은 무시되어 마땅하고, 죽음이 영혼을 영생할 어떤 곳으로 인도한다면 죽음은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네. (P.78, 19장)
카토의 주장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영혼 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영혼은 항상 저절로 움직이고 단일한 본성을 지니며 결코 나누어질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영혼은 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언뜻 고대 그리스의 원자를 떠올리게 하는데, 유물론이 아닌 유심론이라는 차이가 있다. 살아생전 훌륭한 인생을 가꾸었고 영혼이 불멸한다면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비극이고 최종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통과 절차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카토는 사람은 적절한 때에 죽는 게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끝맺는다.
<우정에 관하여>는 대화체 형식을 사용한다. 라일리우스가 두 사위인 스카이볼라와 판니우스에게 자신과 소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우정을 들려주고 훗날 스카이볼라가 이를 회고하는 방식이다. 대화체이지만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라일리우스가 일방적으로 주도한다. 앞서 노년의 삶의 가치를 역설하는 과정에서 다소 무리수를 두어 보편적 설득력에서 아무래도 흡인력이 덜한 반면, 우정에 관한 담론은 참으로 매끄럽고 설득력이 있다. 자고로 우정을 기리지 않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므로. 우정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요청을 받고 라일리우스도 최고의 찬사를 바친다.
(라일리우스) 우정이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나 모든 사물에 관한,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네. 지혜를 제외하고는 그것은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고 싶네. (P.117, 6장)
돌이켜보면 혈연관계도 아닌 생판 남남인 사이에서 세월과 죽음도 무릅쓰고 고귀하고 굳건한 상호 간의 믿음과 호의가 싹 트고 유지된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진실한 우정은 어떤 이익도 기대하지 않고, 신분과 능력의 우열, 인종 간의 구별도 뛰어넘는다. 그렇기에 라일리우스는 우정은 필요가 아닌 선의와 호감의 본성에 비롯되며 진정한 우정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
세상에는 참된 우정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정의 외피를 쓴 거짓 우정도 난무한다. 라일리우스는 이를 매우 경계한다. 자칫 우정의 허명을 중시하여 우정이 지닌 참된 가치를 무너뜨리는 시도를 배격한다. 선의 미덕에 근거하지 않고 악덕에 이끌린 우정은 잘못된 우정이다. 우정의 이름으로 벗에게 배덕, 범법을 요구한다면 그는 진정한 벗이 아니다. 친구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그릇된 길로 나아간다면 이를 방관하거나 영합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충언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참된 벗이다.
내 거듭 말하노니, 우정을 맺어주는 것도 미덕이고 우정을 지켜주는 것도 미덕이라네. 조화와 안정과 신뢰는 모두 거기서 비롯된다네. (P.175, 27장)
따라서 우리는 친구를 사랑할 때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며, 친구와 바른길로 더불어 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친구의 본성이 바뀌어 같이 할 수 없다면 우정의 배반이라는 인상이 들지 않게끔 서서히 소진되는 것처럼 하라는 조언은 차라리 현실적이다.
“진정한 친구는 제2의 자아”(P.162, 21장)라고 할 정도로 인간에게는 중요한 존재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기에 뜻이 맞고 함께 어울릴 수 있으며 상호 신뢰가 가능한 친구를 찾을 수 있다면 더없는 행복이다. 키케로는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어 우정에서 미덕의 중요성을 더해 이것이야말로 진실한 우정을 가리는 잣대가 됨을 강조한다.
공화주의자로서 키케로의 한계는 명확하다. 그는 귀족, 즉 원로원이 중심이 되는 사회질서를 이상적인 체제로 보았다. 군주제는 물론이고, 평민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일체의 시도에도 맹렬히 반대하였다.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그의 개혁에 대한 키케로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임을 <우정에 관해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