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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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성한 정원에는 숲의 요정들이 둘러싸며 놀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에리직톤은 요정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렸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리모스를 보내 그에게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내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지만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다. 부자였던 그는 음식을 구할 돈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자신의 딸까지 팔았다. 아버지에 의해 팔려진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순결을 앗아갔던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포세이돈은 그녀에게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의 능력을 주었다. 그녀는 모습을 바꾸어 그녀의 주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된 에리직톤은 되돌아오는 딸을 다시 팔아가며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배고픔은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설은 데메테르가 아닌 시어리어스의 숲이라고 적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사건을 모티프로 창작된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병욱('나')를 제외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상훈 교수와 그의 딸 혜령으로 대표되는 수직지향적 인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며, 수직적 관계의 회복 없이 수평적 관계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혜령은 후반부에 가서야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지만 이전의 모습에서도 이런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상훈 교수의 설교를 잠시 보자.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이런 수평적 폭력은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폭력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벨이 카인에게 무슨 짓을 해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아벨은 카인이 아니고 카인은 아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이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을 불러냅니다. (...) 절대자와의 비뚤어진 수직 관계를 방치하고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만을 기획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21쪽)


이와 반대로 형석과 태혁, 델브루케로 대표되는 수평지향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 신이나 신화로 대변되는 수직과 초월의 논리는 현상 구조의 영구화에 기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절대자의 논리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닮아있고, 에리직톤의 초상(肖像)들이다.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신화의 해체이며, 그를 통해 실현되는 해방이다. 태혁이 쓴 글처럼.


이 에리직톤의 신화와 기본적으로 구조가 같은 설화가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에리직톤의 다른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 에리직톤이 실패한 싸움에서 모세는 승리한다.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신화가 해체되면서 경이적인 새로운 신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화 속에서 신적인 힘은 이제 더 이상 억압적인 절대 권력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권력 구조를 영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억눌린 자들의 옹호자, 노예들의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는 신적 권위를 만난다.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244-245쪽)


나는 기꺼이 에리직톤이기를 원한다.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해 더 많은 에리직톤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에리직톤들이 결속하여 마침내 신화를 부수게 되는 순간에 얻게 될 빛나는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세이다. 즉 해방자이다. (...)

그러니까 신은 신화를 거부한다. 신화를 창조하고 신화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 신과 신화를 이용해 현실을 유지시키려는 자들이다. 신을 신화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246-247쪽)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고, 그만큼 관념적인 색채가 짙다. 하지만 1부에서 중심을 이루던 신과 인간의 관계는 2부에서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81년에 발표했던 1부에 2부가 붙음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태혁이라는 인물이 추가됨에 따라 관념들이 형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태혁이 에리직톤에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들, 더 큰 악의 제거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 등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수직의 회복과 붕괴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신이 아닌 인간들의 결말은 처참하다. 그들의 이름은 모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석과 델브루케의 교황 암살 시도는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노동운동을 하던 태혁은 방화 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에 끌려갔다.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직의 회복을 지향하던 헤령 역시 경찰들의 수녀원 습격으로 또다시 상처를 입고, 그들을 지켜보던 주변인 병욱도 외압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아원에 들어간 헤령과 그녀를 찾아간 병욱이 보여주는 태도는 수직과 수평의 공존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직 안에서의 수평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의 이면』과도 연결된다. 성(聖)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속(俗)의 한복판에 있다는 태도.


"(...)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깨닫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신앙과 삶을 별개인 양 구별해서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고 해야 할까? 믿음이 삶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잖아요. 삶에서 떨어져 나간 신앙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신 또한 무의미하겠지요." (294쪽)


나는 비로소 성(聖)의 뜻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인도인들은 평범한 바윗덩이에 붉은 고리를 걸어 놓음으로써 그 바위를 성별(聖別)시킨다. 붉은 고리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붉은색의 평범한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붉은 고리는 그 바위를 성역이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거룩한 바위로 화한다. 성은 속(俗)의 한복판에, 하나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이면』, 154쪽)


이는 개혁과 형식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병욱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개혁과 형식의 포섭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기에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지향성.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절대자와의 수직적 관계 아래에서 수평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신화를 전복하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태도가 아닐까. 이는 정 교수에게 주례를 부탁한 뒤 약혼자 희수에게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굳어지는 듯하며, 이후의 병욱은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걸을 것 같다는 암시를 내게 준다. 1부의 결말과 2부의 결말이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지만(정말 다르다. 첫 중편소설인 1부에서 끝났다면 나는 별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유의 끝은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1부의 결말이 수평을 지향하는 자의 몰락을 보여준다면 2부의 결말은 수평마저 포섭해버린 수직의 느낌이랄까... 내 짐작이 맞다면 정말 기독교적인 결말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유는 치밀하면서 치열하고, 관념적인 색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주제와 관념의 무거움을 문장의 힘으로 극복할 줄 안다. 읽으면서 얼마나 밑줄을 많이 그었는지..(물론 원래도 많이 긋는다) 유려하게 읽히는 문장을 빠르게 따라가다 보면, 깊은 사유가 담긴 묵직한 질문들이 에리직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형석의 꿈과 사상, 태혁의 손으로 재해석된 신화, 주변인으로서 고뇌하는 병욱의 시선 등 각각의 사유들은 날카롭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유와 해방의 삶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좌절될 수밖에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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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예전에 읽었던 게 분명한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읽는 장면마다 새로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뫼르소가 사제에게 고함을 치는 장면뿐이었고, 예전에 읽던 책도 이 부분만 접어놓았다. 이전까지 줄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묘사하고 말수가 적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앞에 두고 폭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고, 그래서 내가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의 번역은 개정 전과 후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나는 그의 사제복의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나는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부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2015, 174쪽)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2009, 156-15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너'가 '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란 무엇일까? 김화영 교수의 해설 서두에는 "자유간접화법의 어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변화도 그 일환인 것일까? 네이버 지식백과의 문학용어비평사전에서는 자유간접화법을 "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자의 말과 겹쳐져 이중적 목소리로 서술되는 화법"이라고 정의하는데, 거기서 들고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직접화법 : He said, "I love her now."
간접화법 : He said that he loved her then.
자유간접화법 : He loved her now.


쓰고나니 '너'와 '그'의 차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애초에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설에서 그 단어만 보고 '이 변화가 자유간접화법의 반영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어제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생각해보면 '너'로 표현된 전집판의 경우는 직접화법에 가깝지만, 개정판의 경우는 뫼르소가 하는 말이 뫼르소의 의식이라는 "유리창"을 거쳐 전달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구성이 갑작스레 직접화법이 등장하는 것보다 일관성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공들였던 부분은 전에 미처 읽지 못했던 해설 읽기였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르트르는 『시지프 신화』의 철학이 옮겨진 것이 『이방인』이라 간주하고 해설을 썼는데, 상당 부분 연결이 되긴 하지만 기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뫼르소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부조리의 인간'의 한 전형이라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 두 번째로 읽는 것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면 그런 애매성이야말로 『이방인』이 지금까지 논의되고 고전이 된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딱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남겨둔 채 그냥 마무리해야 될 것 같다. 재독의 감상을 정리하자면, '그때도어렵고지금도어렵다'.


+)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개정판에도 그대로 남았다. 이 단어의 어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데, 가운데 쉼표를 넣어봐도 매한가지다. 개정판을 내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손보았는데도 이 부분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자의 설명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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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예 기억이 안 나네요..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역시 책은 다시 읽어야 제맛인 것 같습니다..

아무 2016-07-04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읽는데 다시 읽는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더라구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니 조금 낫긴 하지만, 난해한 건 여전합니다 ㅎㅎ...

cyrus 2016-07-0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과 개정판을 같이 읽으면서 번역의 차이점을 확인하셨군요. 정말 대단한 집중력입니다. ^^

아무 2016-07-04 19:15   좋아요 0 | URL
정말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번역비평하는 분들에게 존경심이..^^;; 저도 처음엔 전부 비교하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핵심 장면들만 골라서 비교했습니다. 저 장면은 워낙 차이가 많이 나서 찾아보기도 하고..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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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이상주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학교에서 자유를 찾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공부나 기타 행동에 대한 강요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낭만을 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진정한 앎의 세계를 찾아 헤매며 글을 쓰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때의 나는 아마 주변 또래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달리 수능을, 좋은 대학을 넘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저 책 몇 권을 더 읽었던 사람이었지만.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요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성전처럼 떠받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나도 요조가 품었던 질문 중 일부를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가 아니어서, 그의 삶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종의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의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타자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다. "음산한 도깨비 같은"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낮추는 익살이라는 연기였다. 하지만 요조가 동질감을 느꼈던 다케이치는 그의 연기를 알아채고, 그 앞에서 요조는 자신과 가까운 모습을 내보인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40쪽)


그리고 호리키가 있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으로 다케이치와 검사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리키도 요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인간"답게 요조를 이용했을 뿐. 어쨌든 호리키와 만난 덕분에 요조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이 세상의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질책하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파멸로 치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파멸은 끊임없이 죄가 쌓이는 과정이다.


요조의 여성 편력은 그가 여자를 다른 인간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생물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 세상의 원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창녀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 항상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남성성이 그를 여자와 "동류"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인간과 세상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요조가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부터다. 호리키와의 대화 도중 그는 문득 세상이 실체 없는 것이 아닌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비한 술꾼"으로 전락해 무뢰한으로 파멸해간다. 세상이 부여하는 억압과 멸시를 못 이긴 나머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가 무뢰한이 되어가는 과정 역시 자신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요조의 파멸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은 인간에 대한 도피 또는 반항처럼 읽히기도 하고, 소속될 수 없음에 대한 죄의식이 쌓이는/쌓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요조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죄의식의 밑바탕에 나르시시즘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요조가 아니라 요조 너머에 보이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다자이 오사무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와 벌을 반의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요조의 죄의식과 그의 삶에 부과된 비극은 별개라는 뜻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뒤엉키지만 명료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에게 커다란 벌이 닥쳤다는 것, 그에게 있어 "무구한 신뢰"의 상징이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의탁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더럽혀지면서 그의 몰락은 끝을 향해 간다. "신뢰는 죄인가요?"부터 "무저항은 죄입니까?"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 실격"의 낙인을 찍는 정신병원이 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요조를 바라보며, 요조가 끝내 속할 수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 세계에 의문을 갖는 순간이 오지만(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요조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민감해지고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에 고통받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요조처럼 앓는 듯하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신을 별개의 종으로 인식했던 요조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리시켜 버린 세상과 인간이 과연 옳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요조가 아닌, 그를 끝없이 낙하하게 만드는 세상, 인간, 나, 우리다.


요조의 수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었던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요조의 깨달음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진리지만, 지나가기만 할 뿐 세상의 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는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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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어빙 고프만의 저서를 보면서 오사무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고프만이 하고 싶은 페르소나 얘기....이미 오사무가 이 책에서 요조를 통해 극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첨에는 왜 이따위 책을 작가가 썼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책의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아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새롭네요!^^

아무 2016-08-28 01: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가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고프만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인간실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별점이 더 올라갈 수도..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독서 모임에서 다음에 다룰 책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선정했는데, 나는 이미 한 번 읽은 책이어서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방인』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대략 6~7년 전에 읽고 처음 읽는 것인데, 줄거리도 가물가물해서 몇몇 장면들만 기억하고 있고, 엄청 읽기가 어려웠다는 기억만 남아있다(그래서 난 지금도 『이방인』보다 『페스트』를 더 좋아한다). 이후 개정판이 나왔을 때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해서 사두긴 했지만 여태껏 한 장도 읽지 않았었다.
















1) 오늘의 한국어가 허용하는 한 가장 간결하고 단순한 문장과 단어로 번역하도록 노력했다. 가장 단순한 것이 항상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은 결코 아니므로 그에 따르는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2) 독자의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가능한 한 피하고 원문의 탈색된 문체를 그대로 유지, 표현하고자 했다.

3) 카뮈의 원문이 가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 한,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 관계나 시간적 선후 관계에 대한 해석을 임의로 추가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 '2015년 새 번역에 부치는 말' (2015, 8쪽)


얼마나 바뀌었는지 비교해보자는 마음에 두 가지 판본을 대조하며 읽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읽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져서 1부의 1절,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부분까지 비교해본 뒤 포기하고 개정판에 집중했다. 앞 부분을 비교해보면서 눈에 띄었던 차이점은 이렇다. 1) 기존 전집판에서 "엄마"와 "어머니"가 혼용되어 쓰이던 것을 "엄마"로 통일했다(현재 2부의 앞부분까지 읽었는데, 뫼르소가 "어머니"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딱 한 번 나왔다). 2) 기존에 한 문장으로 번역했던 문장을 둘로 쪼개어 번역한 것이 많았다. 3) 기존 판본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던 이중 부정문을 많이 없앴다. 4) 부사어, 관형어 등의 수식어가 줄었다. 5) 기존에 한 문단으로 처리한 것을 둘로 나눈 것이 종종 있다. 기타 등등. "가독성을 돕는 의역을" 피했다고 하지만, 나는 개정판이 훨씬 잘 읽히고 눈에 잘 들어온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카뮈가 『이방인』에서 구사하는 구어체 느낌을 더 잘 살리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방인』은 소설에서 흔히 구사하는 문어체(단순과거)가 아닌 구어체(복합과거)로 쓰여졌다. 자세한 것은 네이버 지식백과(링크) 참조)


특이했던 것은, 영안실 안에 있는 여자 간호사를 '아랍인' 여자 간호사라고 밝힌 점, 그리고 양로원 원장이 뫼르소에게 반말(정확하게는 하게체)을 하는 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간호사의 경우는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레몽의 여자도 무어인(전집판은 아랍인이라고 썼다)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런지 무슨 의미가 있지 않을까 고민되는 부분이다. 반말의 경우, 뫼르소와 원장이 이미 서로 아는 사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존대에서 반말로 바꾸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음 부분은 조금 마음에 걸린다.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그만 영안실로 어머니를 옮겨놓았네. 다른 원생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원생이 하나 죽을 때마다 이삼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든. 그렇게 되면 일하기가 어려워져." (2015, 28쪽)


층계로 나서자 그는 설명을 덧붙였다. "시신은 조그만 영안실로 옮겨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원내에서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2, 3일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일하기가 어려워진답니다." (2009, 24쪽)


원장에 대한 서술이 많지 않아서 성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무적이고 인정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하나 죽을 때마다"라는 표현에는 사무적이고 비정한 느낌, 원생들의 죽음을 귀찮은 일로 인식한다는 인상이 실린 것 같다. 과잉해석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몇 가지를 제외하면 개정판의 번역이 훨씬 나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구성인데, 전집판에는 사르트르의 해설, 피에르-루이 레의 카뮈 입문서 전문, 로제 키요의 논문이 함께 실려 있지만, 개정판은 김화영 교수의 해설만 실렸다. 해설이 감상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해설이나 부록을 다 읽어보는 입장에서 다양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그만큼 줄어 아쉽다. 김화영 교수의 해설도 60여 쪽에 이르는 분량을 자랑하고 나 역시 신뢰하는 편이지만, 민음사판에 실은 해설을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아 자료를 상쇄할 만한 만족감을 주는 건 아니다. 나 같으면 양장본으로 안 만들고 저 자료를 넣었을 텐데... 괜히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가격만 올랐다.


다시 읽으면서 눈에 띄는 점은, 햇살이나 빛에 대한 뫼르소의 서술이 상당히 안 좋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읽을 때는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인데, 문제의 총살 장면 이전에도 햇살/빛은 따귀를 때린다거나, 머리를 쿡쿡 찌른다거나, 눈이 피로해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이런 것들이 일종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미국판 서문'이나 '《이방인》에 대한 편지'에서 카뮈가 생각하는 『이방인』의 의미가 생각보다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도 이번에 읽으면서 알았다. 예전에 나는 대체 무엇을 읽은 것인가... 이번에 다 읽고 나면 예전에 읽다 포기했던 사르트르의 해설부터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내용이 기억에서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장면, 뫼르소의 일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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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6-06-3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읽었는데 그 부분이 가장 인상깊었지요. 햇살이 따가웠다는 것. 거의 그 장면만 기억납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좋았구요.

아무 2016-06-30 09:5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방인에서 기억나는 게 따가운 햇살과 마지막 부분에서 뫼르소의 일갈이에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다시 읽으니 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이 눈에 많이 띕니다. 이런 게 재독의 즐거움...^^

북깨비 2016-06-30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뮈 전집을 내고 나서 다시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냈어요? 그럼 카뮈전집 시지프 신화를 샀는데 그것도 개정판이 나왔나요? 아흐응~ 전집본 하나씩 천천히 사모으려고 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일까요 ㅠㅠㅠ

아무 2016-06-30 11:03   좋아요 0 | URL
이방인 개정판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되어 있네요. 시지프 신화는 이번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다시 나왔는데(번역자는 똑같이 김화영 교수) 많이 수정했다고 합니다. (http://blog.aladin.co.kr/m/mramor/8583402) 저도 새로 사진 않을 거 같긴 한데..ㅠㅠ 이미 갖고 있는 책의 전면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마음이 휘청하죠. 다시 사야하나 하는 마음에..ㅠㅠ

북깨비 2016-06-30 11:47   좋아요 1 | URL
흑흑 아무님 제 심정을 정확히 아시는군요. 시지프 신화를 불과 몇달전에 구입해서 더 휘청했어요. 그나마 표지가 새로나온 민음사 것보다 전집본 것이 맘에 들어서 위안이 됩니다.

cyrus 2016-06-3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정판이 나올 때 저는 구판은 책장 장식품으로 사용하고, 개정판은 도서관에서 빌려 봅니다. 구판과 개정판의 번역 차이가 크지 않으면 개정판을 사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사실 책 살 돈이 있으면 개정판도 장만하고 싶습니다. ㅠㅠ

아무 2016-06-30 17:23   좋아요 0 | URL
저도 웬만해선 개정판을 사지 않는데(아무래도 돈의 압박이..) 이방인은 번역 논란이 불거진 적도 있고 해서 궁금한 마음에 샀어요. 근데 생각보다 차이가 큽니다.. ㅎㅎ 시지프 신화는 못 살 거 같아서 도서관에 신청만 했어요. 언제 올진 모르겠지만..ㅠ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오웰의『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감독관들, 설계자들, 감시자들이 없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 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풀어준 결과이다. (13쪽)


바우만은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액체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다. 그가 바라본 현대 사회는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화된 사회, 공적인 것들이 사적 문제에 침식된 사회, 그로 인해 대문자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생활정치만 남은 사회, 아고라가 없는 사회다. 과거 비판이론은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사적인 것이 넘쳐나는 생활세계에서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웰과 헉슬리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호수아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액체근대』에서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유동하는 근대를 고찰한다. 각각의 테마가 명료하게 나뉘어 논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각 장의 테마가 아닌 다른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이 허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섯 개의 테마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체 근대의 질서가 액화되면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개인적 부담, 이 두 가지는 생산자 주체가 소비자로 전환되면서 도래한 소비자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일이 갖고 있던 위상이 훼손되어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는 현실과도 관련되며, 자유와 책임의 무제한적 제공 아래 불안에 빠진 개인을 유혹하는 공동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의 개인은 소비(쇼핑)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대와 범람하는 사적 자유, 그리고 무한한 기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본보기, 생계에 필요한 기술과 같은 자기계발의 방법들도 쇼핑한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조만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세상에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소비는 멈추지 않고 만족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바우만이 비유한 대로, 고체 근대(생산자 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건강"이라는 기준이었다면, 액체 근대(소비자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fitness)", 즉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기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액화되고 이동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여전히 무겁고 부동적(不動的)이며, 그로 인해 한때 정복의 상징이었던 공간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고체 근대 시기에 자본과 상호 결속을 유지했던 노동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전지구적으로 노는 자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에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었던 그 장소는 예전의 확고함을 상실하였다. (95쪽)


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좀더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근접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의 단일한 목표인 즉시성으로 좁혀지고 집중되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193쪽)


그러니까 즉시성에 근접한 지배자란 소프트한 자본을 쥔 자를 말하며, 자본을 쥔 지배자는 더욱 더 가벼워지기 위해 노동이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이동을 막아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합병, 감원 전략 같은 것들이다. 이를 막을 굳건한 질서는 이제 없다. 설령 누군가 막으려고 해도, 신속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과 이에 근접한 자가 도망가지 않을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은 전례 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지역적 유대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위협(암묵적이어서 그저 추정만 되는)에 대해, 책임감 있는 정부라면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위협을 거두어들이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실시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 역설적이게도, 정부들은 자본이 떠나겠다는 사전통고를 촉박하게 하거나 아예 통고조차 없이 훌쩍 떠날 자유를 확연히 보장해주어야만 자본을 제자리에 붙들 희망이 있다. (240-241쪽)


모든 것이 영구적 불확실성으로 귀결되고, 유대와 동반 관계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부과된 선택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그리고 소속감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공동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보기에 현대(아마 90년대 후반일 것이다)의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들은 자기 주변에 산재한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부담을 잠시 벗게 해주는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 또는 "카니발 공동체"이며, 개인의 고독을 해소해주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화약고 공동체"다. 이러한 (가짜) 공동체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희생양을 찾고, 폭동을 통해 카니발 의식을 치른다(바우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로 든다).


짐 보관소/카니발 공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319쪽)

 

그렇다면 이미 막을 수 없을 만큼 액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바우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사회학의 임무를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장차 닥칠 숙명을 초래하는 복잡한 원인의 그물망을 알아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르는 행동을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아마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나는 그때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르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라는 말이 너무 격했던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즉시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들, 뉴스들은 "가장 빨리 상하는 상품"이 되었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제에 대한 자기 주관을 세울 만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우만이 생각하는 '사회학의 쓸모'일 것이고,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현실에서 사회학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질문 없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는 오늘날의 액체 근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불행들을 보지 않겠다는 안이의 소치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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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웰과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이 있었던 건, 예브게니 짜마친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 <우리들>을 보면 오웰과 헉슬리가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 대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무 2016-08-28 01:09   좋아요 0 | URL
저도 짜마친의 <우리들>이 그 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를 듣고 진짜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아마 9월에는 구입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