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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오웰의『1984』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두 작품은 디스토피아 소설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고,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정치사회적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두 작품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감독관들, 설계자들, 감시자들이 없이는 미래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각본과는 정반대로, 이러한 결과는 독재나 종속, 억압이나 노예화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체제'가 사적 영역을 '식민화'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오늘날의 상황은 선택하고 행동할 개인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혐의를 (옳게 혹은 그릇되게) 받고 있는 족쇄와 사슬이 근본적으로 녹아버린 데서 발생하였다. 질서의 경색은 인간 주체의 자유가 만든 인공물이자 침전물이다. 이 경색은 '브레이크를 푼' 전반적 결과이며 규제 철폐, 자유화, '유연화', 증가된 유동성, 재정·부동산·노동시장을 풀고 조세 의무를 풀어준 결과이다. (13쪽)
바우만은 우리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액체근대, 또는 유동하는 근대로 규정한다. 그가 바라본 현대 사회는 단단하고 굳건했던 질서들이 액화된 사회, 공적인 것들이 사적 문제에 침식된 사회, 그로 인해 대문자 정치(Politics)는 사라지고 생활정치만 남은 사회, 아고라가 없는 사회다. 과거 비판이론은 사적인 자율성을 공공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지만, 이제는 역으로 사적인 것이 넘쳐나는 생활세계에서 공공 정치가 자신의 기능을 되찾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오웰과 헉슬리의 시대를 지배했던 여호수아 담론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것이다.
『액체근대』에서는 해방, 개인성, 시/공간, 일, 공동체라는 다섯 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유동하는 근대를 고찰한다. 각각의 테마가 명료하게 나뉘어 논의되는 것은 아니어서, 각 장의 테마가 아닌 다른 테마들이 함께 언급되기도 한다. 구성이 허술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다섯 개의 테마가 서로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체 근대의 질서가 액화되면서 해방된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의 개인적 부담, 이 두 가지는 생산자 주체가 소비자로 전환되면서 도래한 소비자주의와 연결된다. 이는 일이 갖고 있던 위상이 훼손되어 "소비자의 미학적 필요와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겁게 해주는 능력 여부로 평가"되는 현실과도 관련되며, 자유와 책임의 무제한적 제공 아래 불안에 빠진 개인을 유혹하는 공동체주의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왜 현대 사회의 개인은 소비(쇼핑)에 집착하는가? 그것이 불확실성의 시대와 범람하는 사적 자유, 그리고 무한한 기회 속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본보기, 생계에 필요한 기술과 같은 자기계발의 방법들도 쇼핑한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조만간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며, 세상에 "무한한 목표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소비는 멈추지 않고 만족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바우만이 비유한 대로, 고체 근대(생산자 사회)가 지향했던 것이 "건강"이라는 기준이었다면, 액체 근대(소비자 사회)가 지향하는 것은 "균형 잡힌 몸매(fitness)", 즉 콕 집어 정의내릴 수 없기에 도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액화되고 이동성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공간은 여전히 무겁고 부동적(不動的)이며, 그로 인해 한때 정복의 상징이었던 공간의 가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동 역시 마찬가지다. 고체 근대 시기에 자본과 상호 결속을 유지했던 노동은 몸이 한결 가벼워져 전지구적으로 노는 자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늘날 자본은 여행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에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고정되어 있을 곳으로 예상되었던 그 장소는 예전의 확고함을 상실하였다. (95쪽)
이런 점에서 무거운 근대에서 가벼운 근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러나 그 골조는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좀더 정확하게는, '불확실성의 원천에 근접함'을 추구하는 일은 하나의 단일한 목표인 즉시성으로 좁혀지고 집중되었다. 더 빨리 움직이고 행동하는 사람들, 운동의 순간성에 가장 근접한 이들이 이제 세상의 지배자들이다. 그들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나, 자유자재로 떠나지 못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피지배자들이다. 지배는 도망가고, 결속을 끊고, '다른 어딘가에 있을' 능력과 이것들을 실행하는 속도를 결정할 권리에 있다. (193쪽)
그러니까 즉시성에 근접한 지배자란 소프트한 자본을 쥔 자를 말하며, 자본을 쥔 지배자는 더욱 더 가벼워지기 위해 노동이 소요를 일으킬 힘을 빼앗고 이동을 막아버린다. 대표적인 것이 합병, 감원 전략 같은 것들이다. 이를 막을 굳건한 질서는 이제 없다. 설령 누군가 막으려고 해도, 신속하게 빠져나가면 그만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본과 이에 근접한 자가 도망가지 않을까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 이 책이 출간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과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비슷하다.
그러나 자본은 전례 없이 초지리적이고, 가볍고, 모든 짐을 훌훌 벗어던진 채 실물 기반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이미 달성한 공간적 이동성은 지리적 구속을 받는 정치집행 주체들을 위협하여 순순히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도록 굴복시킬 정도가 되었다. 지역적 유대를 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는 위협(암묵적이어서 그저 추정만 되는)에 대해, 책임감 있는 정부라면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정부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자본이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위협을 거두어들이도록 가능한 모든 정책을 실시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 역설적이게도, 정부들은 자본이 떠나겠다는 사전통고를 촉박하게 하거나 아예 통고조차 없이 훌쩍 떠날 자유를 확연히 보장해주어야만 자본을 제자리에 붙들 희망이 있다. (240-241쪽)
모든 것이 영구적 불확실성으로 귀결되고, 유대와 동반 관계마저 소비되는 사회에서 개인은 불안에 떨고, 자신에게 부과된 선택의 책임에서 회피하고자, 그리고 소속감을 통해 불안에서 해방되고자 공동체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바우만이 보기에 현대(아마 90년대 후반일 것이다)의 공동체주의와 공동체들은 자기 주변에 산재한 문제들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개인의 부담을 잠시 벗게 해주는 "짐 보관소"로서의 공동체 또는 "카니발 공동체"이며, 개인의 고독을 해소해주기 위해 희생양을 찾는 "화약고 공동체"다. 이러한 (가짜) 공동체들은 '민족성'과 결합하여 희생양을 찾고, 폭동을 통해 카니발 의식을 치른다(바우만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예로 든다).
짐 보관소/카니발 공동체 들이 지닌 한 가지 효과는, 이것들이 흉내내고 있고(오도하는 방식으로) 맨 처음부터 복제하거나 만들어보겠다고 약속한 '진짜'(즉, 포괄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공동체로 모아지는 것을 제법 효과적으로 피해간다는 점이다. 이것들은 미처 분출되지 못한 사회성의 충동들을 집약하는 대신 분산시킴으로써, 극히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일어나는 조화롭고도 합심을 이룬 집단적 행동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그러나 허망하게 구제책을 찾으면서 고독을 영구화하는 데 기여한다. (319쪽)
그렇다면 이미 막을 수 없을 만큼 액화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무엇인가? 바우만은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제시하는 사회학의 임무를 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 그리고 "장차 닥칠 숙명을 초래하는 복잡한 원인의 그물망을 알아내는 것"이다.
몇 달 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한 채 저지르는 행동을 악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아마 '악의 평범성'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나는 그때 프리모 레비의 말을 인용하면서 모르는 것,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논지의 발언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죄'라는 말이 너무 격했던 것 같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그때와 지금의 내 생각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 세상에 던져졌다면, 그리고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 주변의 문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두고 지켜보아야 하지 않을까. 비록 '즉시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문제들, 뉴스들은 "가장 빨리 상하는 상품"이 되었지만, 적어도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문제에 대한 자기 주관을 세울 만큼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바우만이 생각하는 '사회학의 쓸모'일 것이고,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 수도 없이 보도되는 현실에서 사회학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되는 이유일 것이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질문 없이 "TINA(There is no alternative)라는 주문"을 외우는 행위는 오늘날의 액체 근대 사회에서 겪게 되는 불행들을 보지 않겠다는 안이의 소치다.
사회학을 하는 길에서 `참여`와 `중립`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참여하지 않는 사회학은 아예 불가능하다. 대놓고 밝히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부터 철두철미한 공동체주의적 입장까지 오늘날 통용되는 수많은 사회학 상표들 한가운데서 도덕적 중립 입장을 취하려 한다면 이는 헛된 노력이다. 사회학자들은 자신들의 글이 지닌 `세계관`의 효과나, 인간의 개별적 혹은 연대의 행동에 그 세계관이 미치는 여파를 부정하거나 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모든 다른 인간들이 나날이 직면하고 있는 선택의 책임을 저버리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사회학이 하는 일은 그러한 선택들이 진정 자유로운지, 인류가 지속되는 동안 그 자유가 유지되는지, 더욱 더 자유로워지는지 잘 살펴보는 일이다. (3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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