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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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평소에 '삶'과 '생활'이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생활'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삶을 산다는 것은 착각이고, 사실 모든 것이 지리멸렬한 '생활'로 편입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에 실린 아홉 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무기력하다. 실제로는 열심히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의 행동도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제스처가 아닌, 그냥 일상으로 편입되어버리는 소극에 불과하다. 그래서인지 단편 안에서 비슷한 문장 구조가 반복되거나 변주되고 이를 이용한 언어 유희가 종종 등장한다.


영철은 집에만 오면 밥 생각이 없어졌다. 그에 비해 아내는 온종일 밥 생각뿐이었다. 그녀에게는 끼니 해결이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고민이었다. 영철이 출근한 뒤에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었고, 영철이 퇴근한 뒤에 그와 함께 먹는 밥은 더 맛이 없었다. 그녀는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고민을 토로했다. 엄마, 뭘 먹어도 맛이 없어. 나 알지? 뭐든지 맛있게 먹는 거. 김영철이랑 같이 살면서부터 입맛이 죄다 떨어졌나 봐. 어쩌면 좋아? 친정 엄마는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87쪽)


나도 며칠 그랬어. 그럴수록 잘 먹고 잘 자야 돼. 당신 밥은 잘 먹고 살아? 아내가 물었다. 밥맛이 없네. 혼자 먹어도 맛이 없고, 동생 식구랑 같이 먹으면 더 맛이 없으니. 아내는 영철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했다. 

- 「영철이」 (106쪽)


비슷한 문장이나 단어의 반복이 주는 리듬감이나 언어 유희가 단편들을 읽는 하나의 재미이긴 하나, 이것이 가끔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테면 "괜찮찌개" 같은 것들(「그의 사정」). 이런 문장의 반복들이 특징없는 인물들과 결합하면서  무의미함과 덧없음이 증폭되는데, 이런 인물들을 그려내는 데는 작가의 세계관이 한몫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는 "떡이나 개, 가끔은 좆"으로 요약되는, 원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사장이 주는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으며 자아실현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돼지우리의 세계다.


라라 양은 내가 아는 돼지 중에 가장 똘똘하고 예뻐요. 내가 잘 먹이고 잘 키워줄게요. 뭐든지 잘 먹어야 해요. 자, 아아. 사장은 서빙 아줌마가 놓고 간 인절미를 라라의 입 앞에 내밀었다. 그다음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아앙. 라라가 그 개 같고 좆같은 떡을 받아먹은 것이다. 라라는 인절미를 모두 삼킬 때까지 웃고 있었고 행복해 보였다. 저것이 라라가 말하는 직업윤리와 자아실현의 길이라면, 과연 그녀는 돼지였다.

- 「돼지우리」 (28쪽)


떡 이외의 모든 음식에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우라라가 사장이 주는 떡을 넙죽 받아먹는 장면, '나'가 자신의 손이 "돼지 족"이 되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은 '돼지우리'라는 고깃집 이름과 연결되며 작가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우라라와 '나'는 사장에 대한 강한 거부감도, 번듯한 직업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자괴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우라라는 의식주 중 '식'만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고기만 먹으면 되는 (비)정규직에 지원했을 뿐이고, '나' 역시 불어오는 살을 바라보며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돼지우리 속에서 살아가는 돼지족(族)의 자화상이라고 해야 할까.


결국 이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현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루하루를 들여다보면 제각기 다른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이 삶의 전환점이 되거나 의미를 획득하지 않고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듯이, 그들이 도박장에서 운수 좋게 삼뻑을 하거나, 바다로 갑자기 떠나거나, 어떤 새 폴더도 아닌 '느시' 폴더에 매뉴얼을 저장하기로 하는 행동들도 어떤 전환점이 되지 않고 일상에 포섭된다. 그러므로 Y에게 사기를 친 김수동이 누군지(「어느 겨울날」), 왜 하필 '느시' 폴더인지(「느시」), 왜 E가 발목을 돌리는 습관을 갖게 되었는지(「고산자로12길」)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어차피 작가는 해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단편들은 발표된 순서대로 실려있는데, 뒤로 갈수록 안 그래도 약했던 인물들의 활동은 점점 더 축소되는 모습을 보이고, 점점 더 무기력해진다. 심지어 「고산자로12길」과 「느시」로 가면 인물들은 이름마저 상실하고 a, b, c 같은 이름으로 불리며, 회사에서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일상을 보내는, 일하다가 다른 듯 비슷한 메뉴의 점심을 먹고 뒤풀이를 하는 패턴만 보여줄 뿐이다. 단편집을 처음 읽을 때는 충격적일 만큼 단조롭고 무기력해서 흥미있게 읽었지만(무사건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신선함에 익숙해진 뒤에도 이런 작법이 의미있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시의성은 가질 수 있겠으나, 삶과 생활의 경계마저 붕괴된 인물들의 무기력한 삶을 그려낼 뿐 질문을 품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평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그래서 등단작인 「돼지우리」가 제일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장편소설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쨌건 나는 이제 직업을 가진 거야. 여기가 내 첫 직장이니까 축하나 해줘. 나는 직업윤리를 엄수하는 성실한 일꾼이 되겠어. 라라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짜 내가 돼지가 되었다 치자. 너도 들었지? 본연의 모습을 찾는 거래. 자아실현이야.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거야. 이제 떡 같은 면접은 집어치우는 거야. 자유야 자유. 나는 내가 되는 거야. 돼지가 되는 거라고. 라라는 입을 크게 벌리고 괴상스럽게 웃었다. (「돼지우리」, 27쪽)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냐? 대뜸 영철이 팔광에게 물었다. 테트리스요. 팔광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테트리스? 벽돌 쌓는 게임 말이냐? 영철이 소주를 홀딱 원샷하며, 되물었다. 그냥 쌓기만 하는 거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예요. 팔광은, 테트리스를 신앙 삼은 듯, 허공에 대고 빠르게 이야기했다. 미친놈, 그게 왜 인생이야? 영철이 헛웃음 치며 물었다. 죽으면 열 받거든요. 팔광이 단호히 대답했다. (「삼뻑의 즐거움」, 42-43쪽)

행복이 뭐예요? 다섯 살 된 영철의 조카는 TV를 보다가 이것저것 영철에게 자주 물어보았다. 행복이 뭔지 모르니? 영철이 조카에게 되물었다. 몰라요. 조카가 대답했고, 나도 몰라, 너도 죽을 때까지 모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제 너희 아버지가 케이크를 사 와서 네 기분이 어땠니? 조카에게 물어보았다. 빨리 초 켜고 싶었어요. 불 끄고 먹고 싶었어요. 빨리 먹고 싶었어요. 조카는 어제 먹은 케이크의 기억이 생생했는지 양팔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게 행복이란다,라고 영철은 말해주려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 어쩌면 조카에게는 그것이 행복일 텐데 싶어서, 그게 행복이란다, 말해주려다, 아무래도 영철이 생각하기에 행복이란, 행복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렇게 그런 게 아닌데 싶어서, 그랬구나, 케이크를 좋아하는구나,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영철이」, 103-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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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소설집 읽었씁니다. 말장난 같다고나 할까요. 적당히 쓰면 좋은데
과도하게 쓴 느낌.. 오히려 말장난을 위해서 서사를 비튼 것 같기도 한 작품 읽은 듯한 느낌..
뭐야. 이거 이런 생각이들더군요..

아무 2016-07-21 13:47   좋아요 0 | URL
말장난이 과하다는 느낌이 분명히 있죠. 사실 뒤로 갈수록 서사도 별로 중요해지지 않는 작품이라.. 언급하지 않은 작품은 개인적으로 정말 별로여서 할 말이 없었던 작품입니다. 표제작이라든가.. 기타 등등..
한번쯤은 읽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른 작품도 계속 볼지는 잘 모르겠네요 ^^;;

cyrus 2016-07-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장난은 곰발님처럼 읽는 사람 마음을 밀당하면서 써야 재미있습니다. 이 책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괜찮찌개’는 억지스러운 표현으로 느껴집니다.

아무 2016-07-21 14:47   좋아요 0 | URL
`괜찮다`는 말을 반복, 변주하면서 나왔던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밑줄에 적으려다 그냥 안 적었는데.. 말장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밀당이죠. 제가 매번 곰발님 글을 보며 감탄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요즘 마음속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 중 가장 큰 것은 당연히 사드 배치 문제와 개돼지 발언이다. 하지만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는, 언론에서 '문학동네발(發) 공급률 인상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출판사와 서점 사이의 문제다. 나는 이 소식을 문학동네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처음 접했는데, 여기에는 온라인서점과 도매 유통사에 대한 공급률을 인상하면서 보낸 공문과 이로 인해 타격받을 수 있는 중소형서점에 직접 거래를 제안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https://www.facebook.com/munhak/posts/1740862802595651)


인상과 관련해서 국민일보에 기사가 났고[(링크)문학동네, 공급률 인상서점계 동네서점 죽이기반발], 문학동네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반박문을 다시 페이스북에 올렸다(홈페이지에도 올라갔을 것이다). 요지는,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의 공급률 인상을 위해서는 도매 유통사 공급률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것. 국민일보의 기사는 오보이며 한쪽의 입장만 들은 악의적인 기사라는 것. 인상으로 인해 운영이 어려워진 동네서점의 경우 직접 주문해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것(입장 전문 링크). 결국 갈등 끝에 문학동네는 공급을 중단했다. [링크_문학동네, 서점에 책 공급중단]


페이스북에서 이 게시물을 읽기 전까지 나는 공급률이라는 단어의 의미도 몰랐기 때문에 출판 관련 이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이것이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급속하게 추락하고 있는 출판업계의 실태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알 것 같다. 소위 대형 출판사라고 불리는 문학동네도 몇 년째 신규 사원 채용을 못한다는 사실은 참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문학동네가 취한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지지하기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다.


1) 문학동네는 중소형서점이 주문할 경우 선입금 조건을 걸었으며, 10권 이상 주문할 것을 요구했고, 반품률을 8% 이내로 고정시켰다. 이는, 중소형서점이 직접 거래를 하기 위해서 항상 일정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함을, 그리고 책의 판매율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 소위 3대 문학 관련 출판사 중 가장 규모가 큰 문학동네의 책을 모두 현금으로 구매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력이 중소형서점에 있을지, 작금의 출판 현실을 고려해보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2) 두 번째 입장을 발표하면서 문학동네는 글 말미에 '본 게시글에 공감해주시고 공유해주신 분들 중 500분을 추첨해서 문학동네가 역량 있는 신예작가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정 시행하고 있는 ‘젊은작가상’ 올해 수상작품집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달았다. 이건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대형 출판사가 논란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한국의 역량 있는(적어도 문학동네에서 있다고 판단한) 신예작가들의 작품이 이런 언론 플레이에 이용할 수단밖에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도서정가제가 출판업계에 미친 영향으로 옮겨간다. 나는 보통 기사들을 볼 때 댓글을 꼼꼼히 보는데(보고나면 마음이 항상 좋지 않은데도 계속 본다), 책값이 왜 이렇게 비싼가, 도서정가제 단통법 폐지 안하냐는 댓글이 대다수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책이 그 가치에 비해서 헐값에 취급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다른 문화생활에 비해 책 소비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출판업계도 지금 상황에서 책값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종이의 재질 문제나 양장본 남용 문제 등등. 물론 이런 걸로는 새발의 피겠지만.


출판업계도 억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출판사의 리퍼브 도서 판매는 금지시키면서 중고서적 판매는 허용하는 등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에 유리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으니까. 그런 불만이 쌓여서 문학동네가 총대를 멘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도매 공급률을 올리는 것이 인터넷서점 및 대형서점에 영향을 줄 것인지, 아니면 중소형서점만 덤태기를 쓰고 사장(死藏)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내 좁은 소견으로는, 문학동네가 지금 취하는 행동은 '아니다'라고 말할 것 같다.


법에 대해서도, 출판계 사정에 대해서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입장이라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섣불리 판단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일개 독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워낙 굵직굵직한 일들이 터지고 있는 요즘이라 중요한 일임에도 그들만의 리그로 묻히는 것 같아 안타까워 몇 자 적었다. 물론 나는 무슨 이슈를 가리려고 이걸 터뜨렸네 하는 음모론을 믿지 않는다(너무 속이 빤히 보이는 북풍은 제외하고). 다만 하루에도 잊지 말아야 할 일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사건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아수라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든 일에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것뿐인데, 이것은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힘도 필요하다..


+) 정가제 시행 이후 도서 매출이 전체적으로 급감했다고 하는데, 인터넷서점은 10% 할인 + 5% 적립금까지 주면서 무슨 돈으로 굿즈에 사은품까지 이것저것 주는지 내 좁은 소견으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알라딘 17주년 이벤트에 참여해 굉장히 많은 상품을 받았다. 본투리드 에코백, 『가만한 당신』 신문, 부채, 마음산책 스티커, 엽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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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3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1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7-13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번 상황은 씁쓸하네요. 뭐 저도 상품에 욕심이 많은 놈이지만, 저런 출판사의 홍보는 불편하게 느껴져요. 선물을 내세워서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동시에 출판사를 옹호하는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시키는 고도의 전략 같습니다. 이러면 독자들은 일방적으로 출판사의 편을 들어주게 됩니다.

아무 2016-07-13 16:56   좋아요 0 | URL
페이스북 댓글 반응은 8대2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꼭 사은품 때문이라고 볼 순 없겠지만, 너무 저급한 전략이라 말이 안 나왔습니다..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수작으로도 보이고.. 공급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듯 싶습니다..

samadhi(眞我) 2016-07-1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 하는 짓이 꼭 남양유업 행태랑 비슷하군요. 제가 무척 좋아했던 출판사인데 정말 씁쓸합니다. 누구를 위한 도서정가제인지. 언 놈 뱃속으로 눈 먼 돈이 들어간 건지...

아무 2016-07-14 08:51   좋아요 0 | URL
남양우유는 지금도 안 먹습니다. 문학동네 저도 참 좋아했는데,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몰랐네요. 다 어렵다고 하면 돈 챙기는 왕 서방은 대체 누구인지 참...

Aid. 2016-07-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인터넷 서점 같은 경우에는 할인율이 고정되면서 예전 할인해주던 금액이 수입으로 들어오니 그 금액으로 굿즈 등 이벤트에 더 힘을 쏟고 있는거 같아요.

아무 2016-07-20 17:33   좋아요 0 | URL
아마 그렇겠죠? 여러모로 적립금 혜택이나 굿즈의 비중이 많이 늘었습니다. 전 차라리 그 돈이 책의 품질에 갔으면 하는데요.. 이 글을 쓴 이후에도 몇 번의 입장발표와 기사가 있었는데, 볼 때마다 답답한 건 똑같습니다. 전국서점조합연합회도 그렇고, 문학동네도 그렇고...

cyrus 2016-07-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문학동네가 서점 공급률 인상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를 했더군요.

아무 2016-07-21 14:23   좋아요 0 | URL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아직 문학동네 페이스북에는 안 올라왔더군요. 요 며칠 동안 계속 확인하다가 `서점연합회와 문학동네에 고함`이라고 쓸까 하다 참았는데.. 감시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며칠 간 이루어진 논의에 독자는 안중에도 없더군요. 결국 독자층이 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문제겠죠..
 
에리직톤의 초상 이승우 컬렉션 1
이승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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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여신 데메테르의 신성한 정원에는 숲의 요정들이 둘러싸며 놀던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에리직톤은 요정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를 도끼로 쓰러뜨렸다. 분노한 데메테르는 리모스를 보내 그에게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느끼는 저주를 내렸다. 그는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지만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다. 부자였던 그는 음식을 구할 돈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자신의 딸까지 팔았다. 아버지에 의해 팔려진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순결을 앗아갔던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다포세이돈은 그녀에게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변신의 능력을 주었다. 그녀는 모습을 바꾸어 그녀의 주인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된 에리직톤은 되돌아오는 딸을 다시 팔아가며 허기를 채워나갔다. 그러나 그의 끝없는 배고픔은 자신의 몸을 모두 뜯어먹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설은 데메테르가 아닌 시어리어스의 숲이라고 적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저격사건을 모티프로 창작된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병욱('나')를 제외하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정상훈 교수와 그의 딸 혜령으로 대표되는 수직지향적 인물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며, 수직적 관계의 회복 없이 수평적 관계의 개선이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혜령은 후반부에 가서야 이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듯 보이지만 이전의 모습에서도 이런 세계관을 지니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상훈 교수의 설교를 잠시 보자.


그런데 눈치채셨겠지만 인간이 인간을 향해 저지르는 이런 수평적 폭력은 신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 폭력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아벨이 카인에게 무슨 짓을 해서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둘 사이에 분리가 일어났을 뿐입니다. 아벨은 카인이 아니고 카인은 아벨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뿐입니다. 신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이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의 궤멸을 불러냅니다. (...) 절대자와의 비뚤어진 수직 관계를 방치하고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만을 기획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21쪽)


이와 반대로 형석과 태혁, 델브루케로 대표되는 수평지향적 인물들이 있다. 이들의 눈에 신이나 신화로 대변되는 수직과 초월의 논리는 현상 구조의 영구화에 기여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들의 동기는 각각 달랐지만, 절대자의 논리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닮아있고, 에리직톤의 초상(肖像)들이다. 결국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신화의 해체이며, 그를 통해 실현되는 해방이다. 태혁이 쓴 글처럼.


이 에리직톤의 신화와 기본적으로 구조가 같은 설화가 「출애굽기」에서 발견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에리직톤의 다른 이름으로 읽을 수 있다. 에리직톤이 실패한 싸움에서 모세는 승리한다.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두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이다. (...) 그리하여 비로소 인간을 억압하는 잘못된 신화가 해체되면서 경이적인 새로운 신화가 싹트기 시작한다. 새로운 신화 속에서 신적인 힘은 이제 더 이상 억압적인 절대 권력을 후원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권력 구조를 영속적으로 보장해주는 대신 억눌린 자들의 옹호자, 노예들의 구원자로 다시 태어나는 신적 권위를 만난다. 신화에 기댄 권력은 사실상 붕괴되고, 안정과 질서의 신화는 자유와 해방의 삶으로 대치된다.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에리직톤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니까 모세는 비신화화한 에리직톤이다. (244-245쪽)


나는 기꺼이 에리직톤이기를 원한다. 에리직톤의 신화를 부수기 위해 더 많은 에리직톤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에리직톤들이 결속하여 마침내 신화를 부수게 되는 순간에 얻게 될 빛나는 이름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모세이다. 즉 해방자이다. (...)

그러니까 신은 신화를 거부한다. 신화를 창조하고 신화 속에 안주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 신과 신화를 이용해 현실을 유지시키려는 자들이다. 신을 신화 속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246-247쪽)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근거한 작품이고, 그만큼 관념적인 색채가 짙다. 하지만 1부에서 중심을 이루던 신과 인간의 관계는 2부에서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며 새로운 의미들을 파생시킨다. 81년에 발표했던 1부에 2부가 붙음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태혁이라는 인물이 추가됨에 따라 관념들이 형체를 갖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태혁이 에리직톤에 새롭게 부여하는 의미들, 더 큰 악의 제거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볼 수 있는지의 문제 등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고민하게 되고 의문을 던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수직의 회복과 붕괴를 놓고 끊임없이 대립각을 세운다.


신이 아닌 인간들의 결말은 처참하다. 그들의 이름은 모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석과 델브루케의 교황 암살 시도는 두 번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노동운동을 하던 태혁은 방화 사건의 주범으로 경찰에 끌려갔다. 수녀원으로 들어가 수직의 회복을 지향하던 헤령 역시 경찰들의 수녀원 습격으로 또다시 상처를 입고, 그들을 지켜보던 주변인 병욱도 외압으로 인해 신문사에서 해고를 당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고아원에 들어간 헤령과 그녀를 찾아간 병욱이 보여주는 태도는 수직과 수평의 공존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직 안에서의 수평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생의 이면』과도 연결된다. 성(聖)이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속(俗)의 한복판에 있다는 태도.


"(...)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이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를 깨닫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모르겠어요. 애초에 신앙과 삶을 별개인 양 구별해서 생각한 게 착각이었다고 해야 할까? 믿음이 삶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잖아요. 삶에서 떨어져 나간 신앙이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간 신 또한 무의미하겠지요." (294쪽)


나는 비로소 성(聖)의 뜻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인도인들은 평범한 바윗덩이에 붉은 고리를 걸어 놓음으로써 그 바위를 성별(聖別)시킨다. 붉은 고리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그냥 붉은색의 평범한 고리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붉은 고리는 그 바위를 성역이라고 선언한다. 그리하여 그 바위는 거룩한 바위로 화한다. 성은 속(俗)의 한복판에, 하나의 문으로 구별되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생의 이면』, 154쪽)


이는 개혁과 형식 사이에서 "팽팽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병욱의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개혁과 형식의 포섭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기에 둘 사이의 긴장을 항상 유지하는 지향성.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국 절대자와의 수직적 관계 아래에서 수평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신화를 전복하지 않고 유지하겠다는 태도가 아닐까. 이는 정 교수에게 주례를 부탁한 뒤 약혼자 희수에게 전화를 거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굳어지는 듯하며, 이후의 병욱은 결국 목회자의 길을 걸을 것 같다는 암시를 내게 준다. 1부의 결말과 2부의 결말이 주는 느낌은 분명 다르지만(정말 다르다. 첫 중편소설인 1부에서 끝났다면 나는 별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 사유의 끝은 비슷한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을 준다. 1부의 결말이 수평을 지향하는 자의 몰락을 보여준다면 2부의 결말은 수평마저 포섭해버린 수직의 느낌이랄까... 내 짐작이 맞다면 정말 기독교적인 결말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까..


그의 다른 소설이 그렇듯,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사유는 치밀하면서 치열하고, 관념적인 색채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주제와 관념의 무거움을 문장의 힘으로 극복할 줄 안다. 읽으면서 얼마나 밑줄을 많이 그었는지..(물론 원래도 많이 긋는다) 유려하게 읽히는 문장을 빠르게 따라가다 보면, 깊은 사유가 담긴 묵직한 질문들이 에리직톤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형석의 꿈과 사상, 태혁의 손으로 재해석된 신화, 주변인으로서 고뇌하는 병욱의 시선 등 각각의 사유들은 날카롭게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려는, 기존의 신화를 해체하고 자유와 해방의 삶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좌절될 수밖에 없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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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을 다시 읽으면서 느낀 점은 예전에 읽었던 게 분명한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로 정리할 수 있겠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져서 읽는 장면마다 새로웠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은 뫼르소가 사제에게 고함을 치는 장면뿐이었고, 예전에 읽던 책도 이 부분만 접어놓았다. 이전까지 줄곧 눈에 보이는 것만을 묘사하고 말수가 적었던 뫼르소가 죽음을 앞에 두고 폭발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고, 그래서 내가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의 번역은 개정 전과 후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


나는 그의 사제복의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솟구쳐 오르는 가운데 나는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부었다. 그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군, 안 그래? 그러나 그의 신념이란 건 죄다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도 못해.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셈이지.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신부 이상의 확신이 있어. 나의 삶에 대한, 닥쳐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래, 내겐 이것밖에 없어.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굳세게 붙들고 있어. 그 진리가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만큼이나. (2015, 174쪽)


나는 그의 신부복 깃을 움켜잡았다. 기쁨과 분노가 뒤섞인 채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 마음속을 송두리째 쏟아버렸다. 너는 어지간히도 자신만만한 태도다. 그렇지 않고 뭐냐? 그러나 너의 신념이란 건 모두 여자의 머리카락 한 올만한 가치도 없어. 너는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조차 너에게는 없지 않느냐? 나는 보기에는 맨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너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그렇다, 나한테는 이것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2009, 156-157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내가 주목한 부분은 '너'가 '그'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 둘 사이의 차이란 무엇일까? 김화영 교수의 해설 서두에는 "자유간접화법의 어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변화도 그 일환인 것일까? 네이버 지식백과의 문학용어비평사전에서는 자유간접화법을 "인물의 생각이나 말이 서술자의 말과 겹쳐져 이중적 목소리로 서술되는 화법"이라고 정의하는데, 거기서 들고 있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직접화법 : He said, "I love her now."
간접화법 : He said that he loved her then.
자유간접화법 : He loved her now.


쓰고나니 '너'와 '그'의 차이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애초에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해설에서 그 단어만 보고 '이 변화가 자유간접화법의 반영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어제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생각해보면 '너'로 표현된 전집판의 경우는 직접화법에 가깝지만, 개정판의 경우는 뫼르소가 하는 말이 뫼르소의 의식이라는 "유리창"을 거쳐 전달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구성이 갑작스레 직접화법이 등장하는 것보다 일관성 있는 형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자유간접화법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다시 읽으면서 공들였던 부분은 전에 미처 읽지 못했던 해설 읽기였는데, 딱히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사르트르는 『시지프 신화』의 철학이 옮겨진 것이 『이방인』이라 간주하고 해설을 썼는데, 상당 부분 연결이 되긴 하지만 기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뫼르소가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부조리의 인간'의 한 전형이라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 두 번째로 읽는 것이지만 여전히 이해가 미진한 부분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면 그런 애매성이야말로 『이방인』이 지금까지 논의되고 고전이 된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딱 규정하기 어려운 것을 남겨둔 채 그냥 마무리해야 될 것 같다. 재독의 감상을 정리하자면, '그때도어렵고지금도어렵다'.


+) "오래간만에 처음으로"는 개정판에도 그대로 남았다. 이 단어의 어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데, 가운데 쉼표를 넣어봐도 매한가지다. 개정판을 내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손보았는데도 이 부분을 유지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자의 설명이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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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7-04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예 기억이 안 나네요.. 워낙 오래 전에 읽어서.. 역시 책은 다시 읽어야 제맛인 것 같습니다..

아무 2016-07-04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읽는데 다시 읽는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들더라구요.. 시지프 신화를 읽고 나니 조금 낫긴 하지만, 난해한 건 여전합니다 ㅎㅎ...

cyrus 2016-07-0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판과 개정판을 같이 읽으면서 번역의 차이점을 확인하셨군요. 정말 대단한 집중력입니다. ^^

아무 2016-07-04 19:15   좋아요 0 | URL
정말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더라구요. 번역비평하는 분들에게 존경심이..^^;; 저도 처음엔 전부 비교하려다가 금방 포기하고 핵심 장면들만 골라서 비교했습니다. 저 장면은 워낙 차이가 많이 나서 찾아보기도 하고..
 
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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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렬한 이상주의자였던 적이 있었다. 정답만을 강요하는 사회/학교에서 자유를 찾고,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시절. 스무 살이 되면 공부나 기타 행동에 대한 강요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며 낭만을 쫓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시절. 교과서 속 지식이 아닌 진정한 앎의 세계를 찾아 헤매며 글을 쓰겠다는 신념으로 충만했던 시절. 그때의 나는 아마 주변 또래들과 내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남들과 달리 수능을, 좋은 대학을 넘는 진정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믿음이 있었으니까. 돌이켜보면 그저 책 몇 권을 더 읽었던 사람이었지만.


『인간 실격』을 읽으면서 그 시절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때의 내가 요조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성전처럼 떠받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그때의 나도 요조가 품었던 질문 중 일부를 앓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가 아니어서, 그의 삶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종의 질서에 편입되었기 때문일까?


늘 인간에 대한 공포에 떨고 전율하고 또 인간으로서의 제 언동에 전혀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고뇌는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작은 상자에 담아두고 그 우울함과 긴장감을 숨기고 또 숨긴 채 그저 천진난만한 낙천가인 척 가장하면서, 저는 익살스럽고 약간은 별난 아이로 점차 완성되어 갔습니다. (19쪽)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자신이 '인간'과 다른 종(種)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요조는 인간에 대한 "최후의 구애"의 방법으로 익살을 선택한다. 익살은 스스로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 타자의 경계심을 풀어주는 것이다. "음산한 도깨비 같은" 자신을 받아줄 수 없는 인간 세계에서 요조가 살아남는 방법은 스스로를 낮추는 익살이라는 연기였다. 하지만 요조가 동질감을 느꼈던 다케이치는 그의 연기를 알아채고, 그 앞에서 요조는 자신과 가까운 모습을 내보인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40쪽)


그리고 호리키가 있다. 요조는 자신의 정체를 알아챈 사람으로 다케이치와 검사를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호리키도 요조의 정체를 알고 있었을 것 같다. 다만 그는 "인간"답게 요조를 이용했을 뿐. 어쨌든 호리키와 만난 덕분에 요조는 자신에게 공포를 주는 "이 세상의 합법"에서 "비합법"으로 도피한다. 하지만 세상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질책하고, 이때부터 그의 인생은 파멸로 치닫는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파멸은 끊임없이 죄가 쌓이는 과정이다.


요조의 여성 편력은 그가 여자를 다른 인간만큼, 아니 그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생물로 여겼다는 점에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인간 세상의 원형이 아버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창녀를 묘사한 부분을 보면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에게 항상 실체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남성성이 그를 여자와 "동류"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인간과 세상에 몸을 움츠리고 있던 요조가 변한 것은 세상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부터다. 호리키와의 대화 도중 그는 문득 세상이 실체 없는 것이 아닌 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야비한 술꾼"으로 전락해 무뢰한으로 파멸해간다. 세상이 부여하는 억압과 멸시를 못 이긴 나머지 세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가 아니었을까. 그가 무뢰한이 되어가는 과정 역시 자신을 '인간'으로 받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저도 그럭저럭 그것을 희미하게 알게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세상이란 개인과 개인 간의 투쟁이고, 일시적인 투쟁이며 그때만 이기면 된다. 노예조차도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오로지 그 자리에서의 한판 승부에 모든 것을 걸지 않는다면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럴싸한 대의명분 비슷한 것을 늘어놓지만, 노력의 목표는 언제나 개인. 개인을 넘어 또다시 개인.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大洋)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이다, 라며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의 환영에 겁먹는 데서 다소 해방되어 예전만큼 이것저것 한도 끝도 없이 신경 쓰는 일은 그만두고, 말하자면 필요에 따라 얼마간은 뻔뻔하게 행동할 줄 알게 된 것입니다. (97쪽)


요조의 파멸은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은 인간에 대한 도피 또는 반항처럼 읽히기도 하고, 소속될 수 없음에 대한 죄의식이 쌓이는/쌓는 과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요조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요조가 보여주는 끊임없는 자기비하와 죄의식의 밑바탕에 나르시시즘이 깔려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요조가 아니라 요조 너머에 보이는, 자의식으로 충만한 다자이 오사무를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 아아, 알 것 같다. 아냐, 아직...... 하며 머리에서 주마등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115쪽)


죄와 벌을 반의어라고 생각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신에게 내려진 벌이 자신의 죄와 무관하다는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요조의 죄의식과 그의 삶에 부과된 비극은 별개라는 뜻인가? 여러가지 생각들이 뒤엉키지만 명료한 답을 내기는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생각을 하던 찰나에 그에게 커다란 벌이 닥쳤다는 것, 그에게 있어 "무구한 신뢰"의 상징이었던 요시코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그가 의탁했던 마지막 희망마저 더럽혀지면서 그의 몰락은 끝을 향해 간다. "신뢰는 죄인가요?"부터 "무저항은 죄입니까?"까지. 그리고 그 끝에는 "인간 실격"의 낙인을 찍는 정신병원이 있다.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를 내뱉는 요조를 바라보며, 요조가 끝내 속할 수 없었던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구나 이 세계에 의문을 갖는 순간이 오지만(카뮈의 말을 빌리면,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순간이다), 요조처럼 세상의 모든 것에 민감해지고 그들과 어울릴 수 없음에 고통받다가 결국 파멸에 이르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요조처럼 앓는 듯하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신을 별개의 종으로 인식했던 요조를 자의식 과잉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리시켜 버린 세상과 인간이 과연 옳았는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 보게 되는 것은 끝없이 추락하는 요조가 아닌, 그를 끝없이 낙하하게 만드는 세상, 인간, 나, 우리다.


요조의 수기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오랫동안 그를 불안과 공포 속에 가두었던 세상이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하지만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세상이라는 이름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다. 요조의 깨달음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이 '인간' 세상의 진리지만, 지나가기만 할 뿐 세상의 폭력은 나아지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향해 작가는 말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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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6-08-27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자이 오사무의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습니다. 어빙 고프만의 저서를 보면서 오사무가 새삼 대단해 보였습니다. 고프만이 하고 싶은 페르소나 얘기....이미 오사무가 이 책에서 요조를 통해 극명히 보여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저는 이 책을 3번 읽었는데, 첨에는 왜 이따위 책을 작가가 썼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 책의 가치가 돋보였습니다. 아무 님의 리뷰로 다시 보니 새롭네요!^^

아무 2016-08-28 01: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읽으면서 고등학생 때가 많이 생각나더라구요 ㅎㅎ 고프만의 책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으면서 인간실격과 비교해보면 이 책이 새롭게 보일 것 같아요. 별점이 더 올라갈 수도..ㅎㅎ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