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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외곽주의자’ 검사가 바라본 진실 너머의 풍경들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다. 그러니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해 리얼하면서도 살벌하다는 편견이 자리 잡게 되고 그래서 나는 때로는 염세주의자로 때로는 비관주의자로 그렇게 세상을 바라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언어 중 '사랑'만큼 가치 있는 단어이며, 이런 생각을 안겨준 책의 만남을 나는 '행운'이라 말하고 싶다.
이 책은 검사가 쓴 책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검사들의 모습은 괴물이다.(너무 심한 표현이라면 양해 바란다. 그런데 현재로썬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는다.) 그들은 합리적 판단과 정당성이란 이름으로 기득권에 아첨하고 입신양명에 몰두하며 민주주의의 가치를 나 몰라라 하는 집단들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들에 대한 정의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불식시킨 이가 나타났으니 그녀의 이름은 정명원 검사다. 그녀는 현재 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부 부부장 검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 이런 검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좀 놀랍다. 내가 너무 암흑의 세계만 봐 온 것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나의 탓이 아니다. 언론의 탓이 크고 그 책임도 막중하다. 내가 얻은 정보의 9할은 언론 보도였으니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독자인 내가 한눈팔지 않도록 흐름을 숨겨 놓았다. 문맥이 있다는 뜻이다. 어떤 책은 멋지고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책은 뭔가 심오한 내용을 언급하는 듯한데 머릿속에 도통 남는 게 없는 책도 있다.(이것 역시 나의 탓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수록 뭐지? 양판가? 하는 생각이 든다. 꾸밈없는 화법과 일상 속 에피소드에서 느닷없이 표출된 그녀의 의지와 맞닥뜨리게 된다. 그 맞닥뜨림에서 나는 놀라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우선 놀라운 이유로는 그녀의 의지가 늘 자기성찰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놀랍고,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자기 겸손이 고맙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앞으로 그녀는 더 뿌리를 내리고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지 않을까?
그녀의 소박한 이야기가 나는 참 좋았다. 유부남의 꼬임에 넘어가 두 집 살림을 자청한 어머님의 하소연을 긴 인내심으로 들어주던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초임자의 자세도 인상적이었다. 그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언급한 에피소드는 그녀 고유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해준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적어도 독자인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또한 자연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과는 친구 삼지 마라는 그녀의 어머님 말씀에 깊은 공감을 한 독자라고도 말하고 싶다.
이런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어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력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녀는 온갖 핑계를 들이대며 외곽주의자를 자청한다. 개인의 삶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는 꽤 받는 월급으로 그냥저냥 개인의 행복만 보며 살아도 전혀 손해 볼 인생이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안타까운 이들의 삶으로 향해 있다. 어머니에게 방치되고 그녀의 학대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소녀가 도움을 청한 삼촌으로부터 성적 위협을 당한 사건을 들려주면서 그녀는 이성에 치우치지도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나는 늘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해 묻고 답해왔다. 이런 나의 물음에 생각을 더해준 그녀의 말들이 있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결국 세상이 설정한 표준 사이즈가 뭣이든 간에 사람들은 각자 자기만의 굽 높이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굽 높이는 세심히 살피지 않고 남들 하는 대로 맞추다 보면 어느 순간 절뚝거리며 걷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절뚝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게 되는 것이다. ...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를 추상적으로 말고,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씩 따져보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나의 외곽은 스스로 형태를 갖추었다. 스스로 형태를 갖춘 외곽이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어디를 중심이라고 하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외곽주의자는 다만 원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주변인이 아니라 스스로 찾은 외곽의 어느 지점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자다. 271쪽
외곽주의라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라기보다 어떤 취향에 가깝다. 중심을 거부하겠다는 높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체질적으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복잡한 곳, 핫한 곳, 관심이 집중되는 곳, 가장 높고 가장 비싼 곳이 좀 불편할 뿐이다. 그 불편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겠다는 다소간의 고집이 외곽주의의 실체다. 273쪽
누군가를,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존재하였으되 인식해보지 못한 세계를 인식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그가 나의 세계로 들어오고, 나의 우물이 조금 더 깊어지는 것이다. 283쪽
-한겨레문학상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