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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 온 스노우 ㅣ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평점 :
요 네스뵈의 신간 <블러드 온 스노우>가 나왔다. 지금까지 나온 그의 소설답지 않게 200페이지밖에 안 돼서
의아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미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12시간만에 쓴 거라고 한다. 하... 12시간...; 주인공 올라브에 완전
빙의된 상태에서 자기 안에 있는 올라브의 성격이 사라질까봐 미친듯이 썼다고.
1970년대의 오슬로가 배경인데 재미있는 것이, 이 책은 원래 요 네스뵈의 다른 소설 <납치>의 주인공인 소설가 톰 요한센의
작품으로 설정된 가상의 소설이었다고 한다. 톰 요한센은 1970년대 <블러드 온 스노우>와 <미드나잇 선>이라는 두
작품으로 반짝 인기있었다가 한물 간 작가로 설정이 되었는데, 요 네스뵈가 <납치>를 계속 쓰다보니 이 가상의 작품들에 관심이 깊어져서
실제로 써보기로 했던 것. 나아가 마치 톰 요한센이 실존인물이었던 것처럼 <블러드 온 스노우>를 그의 이름으로 해서
<납치>와 함께 출간하려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ㅎㅎ 결국엔 법적인 문제때문에 이 흥미로운 '사기'는 실패했지만 요 네스뵈의
장난꾸러기같은 웃음만큼이나 아이디어가 재기발랄하다.
정말 톰 요한센의 이름으로 나왔다면 이것이 요 네스뵈의 작품인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의 작품들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다양한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는 과정없이 시종일관 독백처럼 써내려간 이 짧은 이야기가 그의 소설일 줄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 네스뵈인 걸 알고 봐서 그런지 정말 요 네스뵈가 올라브를 뒤집어 쓴 듯, 혹은 요 네스뵈의 잠재된 어떤 모습들이 뒤섞여 올라브로
분출되는 듯, 소설 주인공과 작가 사이를 수없이 왔다갔다 하게 된다. 종종 책 이야기를 한다던가 다큐멘터리 장면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던가 할 때 요 네스뵈가 좋아하는 책이구나, 그가 다큐멘터리를 잘 보는구나, 하게 되는 거. 짧은 시간 쓴 소설이니 요 네스뵈 자신 본연의 모습이
어쩔 수 없이 투영됐을 거라는 생각도 한다.
스토리라고는 살인청부업자인 주인공이 보스의 아내를 죽이려다 사랑에 빠지고, 보스의 아내를 위해 보스를 죽이고, 결국엔 보스의 아내 때문에
본인이 죽게 되는 시시껄렁한 줄기가 전부다. 그런데 그 줄기 사이사이가 더할 수 없이 매혹적으로 빛난다. 요 네스뵈가 만들어낸 주인공의 스토리와 캐릭터 때문이다. 가정사로 인한
트라우마, 유전의 굴레, 난독증과 정신분열, 엉뚱한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기질, 더욱더 엉뚱한 측은지심... 금전적인 셈법에도 약하고
인간적인 셈법에는 더 약한 바보, 그러나 킬러로서의 자질은 누구에게도 지지않는 살인전문가. 이 차갑고도 따뜻한 남자의 의식이 흐르는대로 써내려간
몽롱하고 긴박하며 애처로운 문장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설로 완결되었다. 그가 좋아했던 책 [레 미제라블]의 모습으로.
12시간 동안 어떻게 이렇게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예의 그 스케일 크고 복잡했던 플롯은 허전할 정도로
간결해졌지만 구석구석이 교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반전까지 만들어내는 능력에는 절로 찬탄이 흘러나왔다. 1970년대 오슬로의
모습 중에서도 특유의 음울함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래서 이렇게 플롯이 아닌 하나의 이미지로 떠오르게끔 이야기를 만든 것도 같다.
후속작으로 나온다는 <미드나잇 선>도 벌써 두근두근한다. 그러게, 어째서 북유럽의 스릴러 대가가 아직 한번도 백야를 다루지 않았던
거지. 새삼스러움을 느끼며 다시 또 오매불망 기다림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