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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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가들이 부르기 좋게 붙인 말일까. 아니면 정말로 엇비슷한 예술적 경지를 개척한 무리들을 한 묶음으로 분류하다 보니 우연찮게 돌림말로 이름지은 것일까. 우리가 국사에서 배웠듯이 흔히 3원이라 하면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 그리고 혜원 신윤복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네임밸류는 사뭇 다르다. 당연히 단원 김홍도는 조선시대 최고의 화가인 동시에 단군이래 한민족 5천년을 통틀어 또한 최고로 꼽힌다(물론 이의제기자도 있다). 오원 장승업은 조선시대 3대 화가다. 단원 김홍도, 현동자 안견과 더불어서 말이다. 그런데 혜원은 그냥 3원 중 하나이다. 호에 원이라는 공통 글자가 들어가서 다른 대가들과 두루뭉실하게 어울리게 된 흔적이 역력하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어떤 오해에서 빚어진 편견이든 아니면 무지몽매한 중생들의 무식의 소치든 아무튼 우리 일반인들 사이에 각인된 혜원의 보편적인 이미지는 대충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런데 혜원에게 이보다 더 불행한 것은 이러한 시야를 확 바꿔 줄 후대의 자손들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이시대까지는 말이다. 그림 소재가 대체로 이성간 유희, 남성의 관음증, 심야의 불륜 등을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보기에는 흥미로우나 파헤치기에는 별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일까?


게다가 혜원은 워낙이 베일에 가려진 비밀스러운 인물이다. 단원은 졸년을 알 수 없으나 혜원은 졸년뿐만 아니라 그의 사회활동 자체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따라서 그의 예술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오로지 세상에 남겨진 작품뿐이다. 그림의 소재로 인하여 지배계급 또는 사회주류로부터 배척당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동시대의 혜원을 탐구하고자 변변한 평론 한마디 남겼을 리 없고, 당대에 남겨진 게 없으니 후대의 연구성과도 자연 박약할 수 밖에....


본서도 혜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니다. 단지 혜원의 그림을 통해 그 당시 사회상을 개괄적으로 조명해 보는 것에 국한되어 있다. 본디 인물 평전을 기대한 나에게는 그런 점에서 약간은 불만이나 이 땅 혜원에 대한 척박한 인정을 감안할 때 그나마 저자의 이런 성의가 고맙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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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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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뭘 먹고 살 길이 막막함을 느낄 때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수단이 자기 몸이다. 정말 마지막 희망의 한 가닥 끈을 붙잡기 위하여 그러는 경우도 있거니와 더러는 게을러서 또는 손쉽다는 편리함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주 발생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장기를 팔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분 더 나아가 몸 자체를 팔기도 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속에서 살펴보면 몸을 파는 것은 더러운 짓이라 욕을 해대면서도 피를 파는 것은 오죽했으면 그러랴 하면 비교적 관대한 것이 사실이며 여기에 더해 끝간데 없는 동정심을 품기도 한다. 무릇 신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하는 것도 불효요 불경이라 한다면 몸이나 피나 파는 것은 마찬가지로 욕먹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당연히 매혈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장려되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살아가는 국가에서 매혈을 권장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판로가 개척되어 있는 것 보다는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피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피를 파는 사람들이나 도리어 피값을 높은 수준에서 거래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삼관의 경우는 참 여러번 피를 판다. 장가 밑천 마련하기 위해서, 폭행에 휘말린 아들 보상금으로 그리고 아들 생명을 구하기 위한 병원비 목적으로 피를 팔고 또 파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허삼관에게는 매혈 행위 자체에 대한 자기 감정이 없다. 한번쯤은 피파는 내 인생은 왜 요모양 요꼴이냐며 신세 한탄이라도 할 법 한데, 그저 피 팔고 난 뒤의 보신에 관해 걱정하고 피 팔고 난 뒤에 찾아오는 신체적 이상 변화에 대해 육감으로 느낄 뿐이다. 피를 팔면 돈이 생기고 그 돈으로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으니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민초들에게는 그저 그걸로 충분한 것이며 자기 성찰은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매혈이라는 비극적 주제를 희극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작가적 역량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나 매혈 이야기의 외피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면 그 또한 작가의 능력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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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평전 1 (반양장) - 일세를 풍미하는 완당바람, 학고재신서 31
유홍준 지음 / 학고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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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하면 생각나는 것이 추사체요 그래서 그는 붓글씨로 일생을 마감한 글쟁이라 지레 짐작하였다. 사실 우리의 역사교육이라는 것이 그저 학생시절 교과서에서 언급되는 단편적 지식을 주입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으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완당평전 완독 후에는 추사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무관심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김정희는 금석학의 대가요 뛰어나 문장가요 그리고 두말할 필요도 없는 최고의 서예가인 동시에 환쟁이였다. 지금까지 추사체 이외에 김정희를 전혀 몰랐던 본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접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천재형 인간이 가지는 어떠한 경향성을 발견하곤 하는데 이는 주로 인간성 또는 성격 등에 관한 문제로서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천재는 고집이 고래힘줄 같아서 좀처럼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으며 그 잘난 선민의식을 가지고 남을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무릇 모든 사람들과 두루두루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외톨이가 된 채 사회적으로 소외당하기도 하는데 추사 또한 이러한 천재형 인간의 통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천재 꼴값(?)을 한다고 할까!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불현듯 내 의식을 휘어잡는 느낌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완당평전의 주인공 추사 김정희도 천재지만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도 어쩌면 천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말이다. 물론 고집불통이요 사회 부적응자로서의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천재가 아닌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로서의 천재를 말한다. 없는 이야기 꾸며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작업이다. 하지만 오래된 과거사를 오늘날에 재현하기 위한 작업은 정밀한 고증을 거쳐야 하므로 대충대충 해나갈 수 없는 고도의 정신적 집중과 엄청난 시간의 투자를 요구하는 피말리는 작업이며 하물며 그 대상이 다방면에 걸쳐 무수한 업적을 세상에 남긴 인물일 경우에는 저자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지식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므로 과연 유홍준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가 완당에 대해 이렇게 평전을 쓸 수 있을 것인가


항상 유홍준의 책은 그의 정신과 정력이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것임을 온몸으로 느끼곤 하였는데 완당평전 또한 그의 기존 작품 못지 않은 역작임에 틀림없다. 내 사는 이 시대에 유홍준같이 성실한 저자이자 동시에 천재적인 학자와 살면서 그의 숨결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행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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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 전21권 세트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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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는 문단에서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대한민국의 대표소설 중 하나이다. 나 역시 익히 그러한 명성을 가진 토지를 읽어보지 못한 것에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빚을 해결하고자 작심하던 중 비로소 근래에 그 부채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의 독서쟁이가 될려면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그 자격을 얻을 수 없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터였는데 드디어 나는 스스로 독서쟁이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였다고 자부해본다


하지만 토지를 다 읽고 난 다음에 밀려드는 감정은 역시나가 아닌 소설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먼저다. 우선 왜 제목이 토지인지 솔직히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고 난 뒤 토지란 도대체 무슨 장르에 속하는 소설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독립운동 이야기도 있고 이념적 갈등에속에서 방황하는 지식인의 이야기 그리고 밑바닥 민초들의 적나라한 삶이 소개되기도 하며 그 시대 젊은이들의 애정이야기도 나온다. 그런데 왜 하필 소설 제목이 토지인가? 나의 의문은 소설 토지의 모든 내용을 담기에는 제목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소설의 내용과 제목과는 어떤 일치성 또는 연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잇는 곳이 땅이니 그래서 토지라고 명명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될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면 우리는 또한 자주 하늘도 쳐다보니 소설 제목을 하늘이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그 다음으로 토지를 얘기할 때 항상 화두의 선두에 위치하는 것이 최서희라는 인물이다. 유년기부터 장노년까지 우리민족 질곡의 근대사와 궤를 같이하는 인물 최서희는 영상매체나 문단의 평론속에서도 대단히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게 사실이어서 나 또한 최서희의 진면목을 접하게 되리라는 기대감과 설레임에 적지 않은 조바심을 가지고 있었다 . 하지만 사실 이러한 세간의 평가가 구축해 놓은 이미지서의 최서희를 만나기가 좀처럼 어려웠다. 그 이유는 최서희가 명실공히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소설의 50% 정도의 이야기는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여지나 어림짐작으로 볼 때 토지에서의 최서희는 30% 정도의 비중밖에 없다. 게다가 분량적인 면보다 더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최서희다 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장면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그냥 최서희는 이런 인물이라고 설명, 묘사, 소개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 독자로 하여금 소설가의 생각과 동일시하도록 하는 주인공 최서희 의 인생역정을 정밀하게 펼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언하건데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최서희는 토지속에 없다. 한번 확인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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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책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책에 흠집을 내거나 낙서를 하는 사람은 무척 혐오한다

심지어 참고서도 밑줄 같은 것은 잘 긋지 않는다

애지중지 금이야옥이야 하며 정말 조심해서 보다듬는다

그러므로 내책이 타인에 의해 더럽혀지는 것은 나로서는 참기 힘든 괴로움이다

알라딘에서 종종 배달되어 오는 책 중에 내 기분을 망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책 자체가 아주 헌것이 배달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정말 불친절하게 다루어 손때가 시커멓게 묻어있는 책이 전해지곤 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정말이지 기분 안좋다

택배사 직원한테 뭐라고 해봐야 해결책도 없을 것 같고

알라딘에 이렇게 하소연해본다.

책 좀 깨끗하게 취급할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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