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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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뭘 먹고 살 길이 막막함을 느낄 때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수단이 자기 몸이다. 정말 마지막 희망의 한 가닥 끈을 붙잡기 위하여 그러는 경우도 있거니와 더러는 게을러서 또는 손쉽다는 편리함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벌이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주 발생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장기를 팔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분 더 나아가 몸 자체를 팔기도 한다. 우리의 상식적인 관념속에서 살펴보면 몸을 파는 것은 더러운 짓이라 욕을 해대면서도 피를 파는 것은 오죽했으면 그러랴 하면 비교적 관대한 것이 사실이며 여기에 더해 끝간데 없는 동정심을 품기도 한다. 무릇 신체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머리카락 한 올 다치게 하는 것도 불효요 불경이라 한다면 몸이나 피나 파는 것은 마찬가지로 욕먹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당연히 매혈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장려되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후진국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세우고 인간이 살아가는 국가에서 매혈을 권장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공식적으로 판로가 개척되어 있는 것 보다는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피를 원하는 사람들이나 피를 파는 사람들이나 도리어 피값을 높은 수준에서 거래 가능한 것이 아니겠는가


허삼관의 경우는 참 여러번 피를 판다. 장가 밑천 마련하기 위해서, 폭행에 휘말린 아들 보상금으로 그리고 아들 생명을 구하기 위한 병원비 목적으로 피를 팔고 또 파는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허삼관에게는 매혈 행위 자체에 대한 자기 감정이 없다. 한번쯤은 피파는 내 인생은 왜 요모양 요꼴이냐며 신세 한탄이라도 할 법 한데, 그저 피 팔고 난 뒤의 보신에 관해 걱정하고 피 팔고 난 뒤에 찾아오는 신체적 이상 변화에 대해 육감으로 느낄 뿐이다. 피를 팔면 돈이 생기고 그 돈으로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으니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민초들에게는 그저 그걸로 충분한 것이며 자기 성찰은 한낱 사치에 불과한 것인가?


매혈이라는 비극적 주제를 희극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작가적 역량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으나 매혈 이야기의 외피에만 치중한 나머지 전체적으로 너무 가볍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작가가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면 그 또한 작가의 능력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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