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지 않아도 대충 어떤 내용의 영화이겠거니 짐작이 가는 영화. 그리고 영화를 본 뒤에도 역시 그랬군 하고 영화보기전의 예상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 <우리형>은 그런 영화다. 잔잔한 감동을 기대했고, 역시 영화는 튀지 않고 무난하게 잔잔했다. 함께 영화를 본 무리 중 어떤 이는 사람이 죽기 때문에 다소 놀랬다 라고 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냥 그렇게 잔잔했다. 그래서 특별함이 없기에 대박날 영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감성을 건드리는 영화이기에 실패할 위험부담도 적은 영화다. 신인영화감독 안권태는 그래서 무난한 출발한 셈이 됐다.

 감독이 신인이기에 감독은 위험부담이 적은 영화를 만들어야했고, 무난한 줄거리에, 영화 친구를 연상케하는 구수한 부산사투리, 그리고 원빈과 신하균이라는 뛰어난 배우를 집어넣음으로써 안전빵에 들었다.

 흔히 '언청이'라고 불리우는 선천성 기형아인 형은 항상 공부 1등을 도맡아 한다. 하지만 그의 동생 종현이는 싸움이 1등이다. 그래서 학교에서의 이들의 별명이 '형제는 용감했다'다. 둘이서 공부와 싸움으로 학교를 주름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맞짱대결에서 종현에게 모래를 뿌려 비겁한 술수를 쓴 상대방에게 종현이 두들겨맞자 싸움도 못하는 성현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물씬 두들겨 맞는다. 이 장면에서 정말 '형제는 용감했다'.

 이들의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억척스럽게 살아가며 둘을 키워냈다. 형인 성현이 수술을 정기적으로 받아야하기에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형을 끔찍이 아끼지만 동생에겐 차갑다. 종현은 언제나 그런 어머니가 밉다.

 하지만 성현은 자기가 먼저 좋아하기 시작한 미령이를 종현이가 찜하고, 자기가 그리고 써놓은 시를 찢어가 미령이에게 주며 둘이 친하게 되자 화가 난다. 종현은 성현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자신을 좋아하는 미령이를 떠나보낸다.

 성현은 고교졸업후 서울대 의대에 들어갔고, 종현은 재수를 하다 때려치고 깡패인 미령의 오빠 밑으로 들어가 동네 사람들이 빌린 돈을 받아내는 일을 한다. 친했던 두식이네 집을 발칵 뒤집어 놓고 돈을 받아냈지만 마음은 너무 아프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지만 미령오빠가 그냥 놔둘리 없다. 비오는 날 실컷 두드려맞고, 한편에서는 종현에게 맞았던 두식이가 종현이 즐겨입었던 옷을 입고 걸어가던 성현의 머리를 돌로 내리찍어 죽인다. 성현이가 종현인줄 알았던 것이다. 두식이는 결국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인 성현이를 자기손으로 죽여버린 셈이 되었다.

  결국 성현이는 종현이로부터 "형"이라고 듣고싶었던 하나뿐인 소원을 듣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종현이는 비로소 종현이가 죽은 뒤에야 "형"이라고 부른다... 우리...형...

P.S.

  <우리형>에서는 로맨스의 비율은 그다지 크지 않다. 종현이 미령을 떠나보낸 뒤 언젠가 다시 등장할 것 같았던 미령은 이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의 구도는 순전히 형제에게 집중된다. 로맨스는 그냥 양념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미령의 역을 맡은, 장길산 귀례아기씨 이보영은 첫 영화출연을 무난하게 소화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는데 장길산의 귀례아기씨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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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4-10-10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곽경택 일파가 만드는 부산 사투리 시리즈는 정말 싫답니다.

마늘빵 2004-10-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오랫만에 오셨네요. 부산 사투리에 대한 안좋은 기억이 있으신가요..? 좋고 싫고는 취향문제인듯... 지역의 정치적 성격과는 달리. 아마도 님은 정치색때문에 그런것 아닌지... ^^;

노부후사 2004-10-11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색깔이니 하는 거창한 이유와는 무관하고요. 저는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이 무섭답니다. ^^;
 

 

 

 

 

영화 <빌리지>를 봤다. 이 영화에 대해 알고 있던 사전지식은 영화 <식스센스>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것 하나! 그 영화에서의 의미심장함, 반전 등을 기대하고 관람에 임했다. 그리고 결과는 그럭저럭 만족한다. 이 영화를 이미 본 다른 관객들의 평을 보면 '최악 중의 최악'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영화에 어떤 극적인 반전이나 긴장감 등이 살아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이 영화는 영화 <도그빌>을 보는 듯 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빌리지>를 통해 <도그빌>을 떠올리다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다. 도그빌에서는 영화촬영의 배경이나 장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공간에 하얀색으로 선을 그어 영역을 표시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이루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빌리지>의 공간적 영화배경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영화자체가 고립된 숲속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이상 공간확장을 한다면 이 영화는 전제를 무시해버리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사방이 모두 숲으로 덮힌 코빙톤 우즈라는 마을에는 소수의 가족들이 각자 자녀를 낳고 자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만 그 어느것 하나 부족함을 느끼거나 심리적으로 불행하거나 하지는 않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인 것이다. 이 지상낙원은 1897년 산업화가 진행된 19세기 후반 사람들의 이기심과 정신의 황폐화, 사회부패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상처를 받은 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하지만 이 숲을 벗어나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단 한번도 숲의 경계를 넘어선 적이 없다. 이 괴물은 '빨갱이'는 아니지만 붉은 색을 좋아해서 마을에서는 절대 붉은 꽃을 기를 수 없고, 어떤 붉은 색도 용납되지 않는다. 마을의 대소사는 마을의 원로들이 모여 결정한다.
 
  그러던 어느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노아를 치료하기 위해 루시우스는 인근 마을로 가서 치료약을 가져오겠다고 자청한다. 숲을 가로질러서 말이다. 하지만 원로들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루시우스는 단독으로 경계선을 넘었다가 두려움에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후 마을에 괴물이 나타나 집집마다 문에 빨간색으로 선을 그어 경고를 하고, 가죽을 벗겨 죽인 산짐승들을 각집의 문에 걸어놓기까지한다. 사람들은 괴물이 마을을 해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한편 아이비와 루시우스가 결혼을 하기로 약속하자, 아이비를 짝사랑했던 노아는 루시우스를 칼로 찌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인근마을로 가 루시우스를 살릴 약을 구해오겠다고 자청한다. 원로들중 한명인 아이비의 아버지는 괴물에 대한 소문은 모두 거짓이며 지금까지 원로들이 아무도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했음을 밝힌다. 하지만 아이비가 가는 숲길에서 괴물은 나타나고 아이비에 의해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다. 그러나 그 괴물은 노아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비는 그것이 노아라는 사실을 모른채 약을 구해 돌아오고, 결국 실제 거짓이었던 괴물의 존재는 사실이 되어버린다.
 
 왜 워커는 아이비가 다른 마을에서 약을 구해오는 것을 허락했는가? 이 마을에 정착한 1세대는 각자 산업사회와 문명의 폐해를 피해 이곳으로 왔지만, 결국 이곳에서도 노아에 의해 살인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저 평화롭기만 할줄 알았던 고립된 이 숲에서 살인이 일어나자 자신들이 세운 지상낙원이 더이상 '지상낙원'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루시우스를 치료할 약을 구해오도록 허락했던 것이다. 계속해서 이 마을이 지상낙원으로서 독립된 공간으로 유지되려면 말이다.

 <빌리지>는 단지 문명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는 아닌듯 하다. 오히려 그에 반해 세워진 독립된 지상낙원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고난끝에 이 마을은 계속해서 지상낙원으로서 존재하게 되지만, 지상낙원에서 조차도 문명사회의 폐해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는 매우 단조롭고 지루하기까지하며 특별한 긴장감을 주지는 않지만 많은 의문을 품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의문에 관객 스스로가 대답하면서 깊은 사유로 나아가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화려하고 웃기고 감동적인 영화일수도 있지만, 학문에서의 '철학'과도 같이 새로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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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표현.이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4
빌헬름 딜타이 지음, 이한우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체험, 표현, 이해>는 해석학 철학자 빌헬름 딜타이의 해석학 일부를 떼어다 번역한 책이다. 단 일부이지만 딜타이의 해석학이 제대로 번역된 것이 이 책이 처음이다. 그동안 딜타이는 그가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다뤄지지 않은 잊혀진 철학자였다. <체험, 표현, 이해>의 번역이 딜타이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딜타이는 정신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철학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데에 온갖 정력을 쏟아부었다. 그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본따 자신의 철학을 '역사이성비판'이라 하였고, 칸트는 물론 헤겔까지도 포괄, 종합하는 철학을 만들어냈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감행했고, 헤겔이 처음으로 '역사'개념을 도입해 절대정신의 구현을 꿈꿨다면, 딜타이는 헤겔의 역사를 통해 칸트와 같이 역사이성의 한계를 찾는 실험을 했다.

 해석학은 본래 성서를 해석하는데서부터 출발했고 이후 슐라이어마허를 거치면서 딜타이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해석학의 마지막 철학자 폴 리꾀르는 슐라이어마허와 딜타이의 해석학을 일컬어 '인식론적 해석학'이라고 명명하기에 이른다. 물론 딜타이에서 리꾀르에 이르기까지는 베티와 하이데거, 가다머가 끼어있다.

 딜타이의 해석학은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비록 책세상문고의 문고판 시리즈라고는 하지만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스스로 칸트와 헤겔을 종합했다고 하기때문에 칸트와 헤겔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의 어려움들이 그대로 딜타이에게 전해진다. 독일 관념철학은 오로지 머리로만 하는 철학이기때문에 언어와 표현이 매우 어렵고, 문단 가운데서 핵심을 찾기도 힘들다. 이 책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에서 혼자 고민하면서 정독해서 읽어야할 이론서다. 그리고 해석학에 대한 아무런 배경없이 읽는다면 절대 이해못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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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년이나 된 영화이지만 정말 감동적인 영화다. 영화내용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알고 있을 것이다. 텔레비젼 코미디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등에서 각색해서 수없이 우려먹었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리처드 기어가 줄리아로버츠가 사는 허름한 할리우드가에 리무진을 몰고와 프로포즈하는 장면-은 유명하기 때문이다.

 현대판 신데렐라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영화는 대단한 부자이자 엘리트이지만 인간적인 면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 냉정한 사업가 에드워드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창녀 비비안 두 사람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에드워드는 비비안을 돈으로 사서 일주일간 함께 생활하지만 그 일주일이 에드워드를 바꾸어 놓았다. 비비안과 함께 하며 인간적인 면을 배우고 파산직전의 회사를 사서 조각내 되파는 자신의 일이 비생산적임을 깨닫고 마지막 계약순간에 그는 오히려 회사를 지원하는 후원자가 되기로 한다. 그는 돈으로 비비안을 샀지만 비비안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줄리아로버츠의 창녀차림의 모습과 에드워드를 만난 이후의 우아한 고급스러운 모습이 대비되면서 어쩜 두 가지 모습을 저렇게 잘 소화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영화다. 줄리아로버츠의 연기는 대단해서 그녀가 오페라를 처음 구경하며 감동해 눈물을 글썽이는 장면에서는 그녀가 보고있는 오페라를 보지 못하는 나도 그녀를 따라 눈물을 글썽이게 된다.

 이 세상에 신데렐라는 있을까? 난 아직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가능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환경속에서 오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좋은 영화에 이런 발언을 함으로써 감동을 반감시키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영화를 본 여자들 누구나가 다 신데렐라의 꿈을 품게 할 수는 없는 법.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하류인생을 사는 남자를 구해주는 사람좋고 이쁘고 돈많은 여자의 이야기는 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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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2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의 볼테르에 대한 관심이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로크, 홉스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계약론>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 로크와 홉스의 다음 세대를 살아가며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보낸 루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장 자크 루소, 그는 사실 18세기 계몽주의자 중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불리운다. 시계공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고독과 방랑, 소외 속에서 그는 바랑 부인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자신의 지적인 성장의 단초를 제공받았다. 그의 지적 토대가 모두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에 루소는 <학예론>을 써 명성을 얻었꼬,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고백록> 등의 저서를 냈다. 그의 사상이라는 것이 당시의 계몽주의자들과는 서로 대치되는 면이 많아서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아 외로운 지식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은 사실 루소의 <에밀>의 완전번역본이 아니다. 완역본은 김중현씨가 번역하고 한실사에서 낸 <에밀>이 따로 있다. 기왕에 읽을 바에야 완역본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 워밍업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일부 번역본을 봐도 괜찮다 싶었다.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박호성씨가 해제한 이 책은 루소의 <에밀>의 1부만을 번역한 것이다. 그 역시 책에서 이 책을 읽고 완역본을 읽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번역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축약본을 읽고 사실 다 읽고픈 생각이 간절히 든 것은 아니나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더 든 것은 사실이니 그의 시도가 내게있어선 그다지 실패로 단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 하다.

  <에밀>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교직에 몸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정치학을 하는 자들에게나, 철학을 하는자들에게나 모두 읽어야할 필독서다. 루소의 <에밀>은 교육소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또한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계약설에 대한 기초적인 부문, 인간과 정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있기 때문이다.

 책세상문고판은 <에밀>의 1부만을 담고 있고, 두껍지 않고 책크기도 작아서 그냥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면서 읽어도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을 듯 싶다. 두꺼운 <에밀>을 읽기가 겁이 난다면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완역본을 손에 쥐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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