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哲學者와 哲學家는 어떻게 다를까?
둘 다 같은 의미일까? 차이가 있다면 어떤 차이일까?

 대개 철학하는 사람을 일컬을 때 우리는 그를 '철학자'라고 부른다. 동서양 철학사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철학자'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어떤 경우 '철학자'라는 말 대신 '철학가'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 어떤 경우에 '철학가'라는 말을 사용할까? 분명 '철학가'보다는 '철학자'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고 있음은 확실하나 두 단어 사이에는 뭔가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민중엣센스 국어사전을 들춰보면, '철학자'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 '철학가'는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조예가 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조예가 깊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지만 좀더 세세한 차이를 느껴보기 위해 다시 사전을 들춰보자. 사전에 따르면, '조예'는 '학문, 기예 따위가 깊은 지경에 이른 정도' 라고 되어있다.

 이제 우리는 '철학자'와 '철학가'의 차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철학자'는 철학을 전공으로 하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연구자를 말하는 반면, '철학가'는 전문적으로 철학을 공부하지는 않지만 철학에 조예가 깊은, 즉 철학에 깊은 지경에 이른 사람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둘의 차이는 철학을 전문적으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였던 것이다.

 그럼 나는 철학자인가, 철학가인가? 둘 중 어느쪽에 가까운지를 묻는다면 '철학자'이겠지만, 나는 철학자도 철학가도 아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는 하지만 '전문적'이라 할 수 없는 정도이고, 그렇다고 철학에 깊은 지경에 도달한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철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철학도'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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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1학기인지, 2학기인지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헤겔수업 시간이었다. 10여명의 학생들과 선생님 모두 동그랗게 빙 둘러앉아 한명씩 자신이 철학을 택한 이유와 목적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없이 점수맞춰 왔다고 솔직하게 고백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존재의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다가 들어왔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신학을 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철학과를 왔던가?

사실 앞으로 내가 말할 '내가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을 택하기 이전에 생각했던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즉 앞으로 말할 '철학을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철학과를 택하고 철학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을 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이야기했으므로 여기서는 '철학을 하는 목적'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도록 한다.

철학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철학을 공부하는지도 모른다. 한 단어로 내가 철학하는 목적을 말하자면 '혁명'이다. 나는 혁명을 위해서 철학을 혁명의 수단, 도구로 삼고 있다. 여기서 내가 사용하고 있는 '도구', '수단'의 의미는 그것이 뜻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도구, 수단과는 다르다. 사전적 의미로 '도구'라는 것은 '일에 쓰이는 여러가지 연장'을 뜻하며, '수단'은 '일을 처리해 나가는 묘안을 꾸며 내는 솜씨와 꾀' 혹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나 내가 사용하고 있는 수단. 도구의 의미는 이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일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시간의 경과를 통해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퇴직을 하고, 죽음에 이른다. 이들 모든 과정이 개인의 차에 따라 그 개인에게 포함될수도 생략될수도 있다. 또한 그것의 시간적 격차가 다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경과를 통해 무엇인가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내가 사용한 '도구'나 '수단'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내가 혁명을 달성하기 위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하다가 그 결과물로서 혁명을 얻겠다는 뜻이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에서는 혁명이 주가 되고, 철학은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철학이 주가 되고, 혁명은 철학함의 부산물이 된다.

자 이제 내가 '철학을 혁명의 도구로 삼는다'는 말의 의미를 해석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긴다. "니가 말하는 '혁명'의 의미가 뭐냐?"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게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내가 말하는 '혁명'의 의미를 짚고 넘어가야겠다.

혁명! 그것은 위대한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역사상 많은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을 이끈 많은 혁명가들이 있었다. 프랑스혁명, 볼셰비키혁명 등등... 그런데 내가 말하는 혁명이 무엇인지를 말하기에 앞서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지어야겠다. 방금 앞에서 나는 세계의 혁명의 예를 들면서 "쿠데타도 혁명인가? 그렇다면 박정희의 군부쿠데타도 혁명으로 간주해야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사전적 의미를 빌려야겠다. 어떤 국어사전을 손에 들던 '혁명'과 '쿠데타'의 의미는 비슷비슷할 것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혁명'이란 '급격한 변혁. 어떤 상태가 급격하게 발전변동하는 일' 이나 '이전의 왕통을 뒤집고 다른 왕통이 대신하여 통치자가 되는 일' 혹은 '비합법적 수단으로 국체, 정체를 변혁하는 일' 또는 '종래의 권위, 방식을 단번에 뒤집어 엎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럼 '쿠데타'는 무엇인가? '쿠데타'는 '비합법의 무력적 기습에 의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일. 지배 계급 내부의 권력 이동으로서, 체제의 변혁을 목적하는 혁명과는 구별됨'이라 정의되어있다. 무엇이 다른가? 앞서 정의에서 볼 수 있듯, '혁명'은 체제의 변혁을 꾀하는 반면, '쿠데타'는 혁명과 같이 체제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도 단지 정권의 교체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혁명'의 대략적인 의미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내가 꿈꾸는 '혁명'이 체제의 변혁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는 반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이라는 누명을 쓸 위험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간단한(?) 부연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나는 내가 꿈꾸는 혁명이 체제의 변혁이 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어떤 것이 되던간에 혁명의 최종적인 모습으로서 만인이, 세계인류가 평화롭게, 평등하게, 자유롭게, 정의롭게 사는 사회를 꿈꾸는 것 뿐이다. 여기서 평화가 무엇이냐, 평등이 무엇이냐, 자유가 무엇이냐, 정의가 무엇이냐 라고 묻는 분들이 있을게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설명하자면 내가 이 글을 언제 끝맺게 될지 알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만큼 이것들은 설명하기 어렵고, 또한 예민한 것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시간을 가지고 논하기로(논한다? 논한다는 것은 둘 이상의 화자가 존재하는 것일진대 여기서 나는 '논한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는 내가 이 단어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진정한 자아와 지금 말하고 있는 나, 이렇게 두 화자를 상정해놓고 있음이다) 하고, 여기서는 간단하게만 설명하겠다.  

자유, 평화, 평등 등등의 마냥 좋아만 보이는 개념들. 간단히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정말 간단히 말하자. 나에게 있어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 글의 독자들이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단어만 머리속에 집어넣으면 된다. 좌파, 반세계화...
"이것들이 의미하는게 뭐냐?" 고 또 물으시면 나는 대답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자꾸 이런식으로 단어 하나하나 캐묻고 소급해가자면 끝도 없어지므로 저 두 단어로 알아서 머리속에 조합해보라. 신문지상에서 여러가지 국제 회의를 저지하기 위한 반세계화시위들에 대한 기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면 한층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자 그럼 나는 다음에 쓰여질(그러나 언제일지는 알 수 없음. 다음 글일수도 그 다음 글일수도 안쓸수도 있음) 글에서 나에게 있어 자유, 평화, 평등, 정의 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논하면 이 글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질 것이라 여겨진다.

그럼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으로 끝내고, 어떻게 철학을 통해서 혁명을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기로 한다. 지금까지는 철학을 혁명의 도구, 수단으로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혁명이란 무엇인지, 내가 말하는 혁명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으니, 정작 '철학'과 '혁명'을 이어주는 연결부분이 빠진 셈이다.

앞서 나는 철학을 통해 혁명에 이르는 과정을 인간의 인생사에 빗대 간단하게 설명했다. 이를 '물흐르듯 자연스럽게'라는 어구로 표현해도 될 듯하다. 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아니 '철학을 하다보면'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겠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마치 생물학이 생물을 대상으로 하고, 유전공학이 유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이 철학을 대상으로 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기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 대상이 없다. 다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은 모든 것을 그 대상으로 한다. 철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존재의 문제일수도, 우주의 문제일수도, 사회의 문제일수도, 언어의 문제일수도, 생물의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철학은 그 대상을 정함에 있어 범주를 두지 않는다. 자, 다시 이야기의 논점으로 돌아가서, 철학을 하다보면 내 주변, 사회, 국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 문제시되는 것들에 대해 그 문제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고 그 원인을 한없이 소급해 들어가는 것에 매우 익숙해진다. 어쩌면 그것이, 철학을 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하늘에 붕 뜬 구름만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먼 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건, 문제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찾는 모습이다. 이렇게 그 근본으로 소급해가다보면 무엇이 잘못되어 지금의 결과에 이르렀는가를 느끼게('알 수 있다'라는 표현은 안쓰겠다. 그것은 자칫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독단론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안다면 그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면 될터인데 실상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안다'는 표현보다는 '느낀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될 때가 있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하고 그것을 근본부터 바꾸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즉 철학을 하면서 지금의 잘못된 것들의 원인을 밝혀내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고쳐가면서 혁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생각같아선 단한번의 변혁으로 혁명을 달성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은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내가 말한 혁명은 그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이 있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철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난 뒤...
앞서 '철학을 공부한다'와 '철학을 한다'의 차이점을 언급하긴 했지만, 정작 차이점만 언급했지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글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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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몇학번이세요? 무슨과세요?"
"네 98학번이고, 철학과입니다."
"철학과요? 철학과에서 뭐 배워요? 왜 철학과 가셨어요?"

미팅나갔을때 혹은 생전처음 보는 사람과 대면할때 가장 흔하게 시작하는 평범한 대화이다. '철학과'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철학과에서 뭐 배워요?" 이고 이에 못지 않게 들었던 말은 "왜 철학과 가셨어요?" 이다.

내가 1학년에 '국제경제통상학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을 때 나는 위의 저런 질문에 답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내게 그런 질문을 해오지 않았으니까.
그저 잘나가는 학과려니 하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내가 철학을 택한 이후 나는 위의 저런 질문에 시달려야했다. 따라서 그에 못지 않게 생각도 많이하게 되었고, 위의 질문에 답할 대답도 준비해뒀다.

처음 내가 경제국제통상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를 할 때 나는 '철학'이라는 타이틀이 가지고 싶었다. 전과하겠다는 문서를 철학과 사무실에 내러갔을때 조교 선배들은 의아하게 쳐다봤으며 자리에 앉아있던 000 선배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철학에 관심있었으면 1학년때 교양과목으로 철학강좌를 듣지 그랬어요?" 또 다른 사람들은 복수전공이나 부전공으로 택해도 될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철학과'라는, 내 이름앞에 붙을 간판이었다. "숭실대 철학과 ooo입니다"라고 떳떳히 말할 수 있는 '철학과'라는 이름. 그때 난 그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은 어떤 이끌림이었다. 또 고등학교 때 익히 철학책을 사다보며 뜻을 알수없는 문자들을 읽어나가야했던 나는 철학이라는 것이 단순히 다른 것을 전공하며 군것질거리로 조금씩 뜯어먹을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경제국제통상, 경제학이나 무역학을 전공할 것이었다면 난 처음부터 철학에 일체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찍쩝거리는 것으로는 철학을 공부할 수 없다. 오직 철학에 전념해야 철학에 빠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가지 더 들자면 당시 나는 경제학, 무역학, 경영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수업을 빼먹고 놀러다니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심각하게 놀기만 한것은 아니었지만 수업에 들어가서도 맨뒷자리에서 친구와 음악이야기나 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쯤되면 내가 철학을 택한 피상적인 이유는 될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말하지 않았다. 위에 내가 말한 것은 '철학을 택한 이유'라기보다는 '철학과에 오게된 동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철학을 택한 이유. 본래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단 무엇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몰두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레고라는 블록장난감을 가지고 놀았고, 중학교 시절엔 컴퓨터 게임에 몰두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엔 록음악에 빠져있었다. 운동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들과 만나 어디인가를 놀러가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이런 성격은 내가 철학에 빠지게 된 어느 정도의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둘째, 학창시절(대학이전) 나의 우상은 신해철이었다. 그가 철학과여서라기보다는 그의 음악이, 그의 가사가 맘에 들었다. 가사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노라면 그냥 단순한 문자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만의 깊은 고민과 사색을 거쳐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당시부터 현재까지도 그에 필적할만한 작사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시 그의 메세지는 내 머리속 깊이 파고들었고, '이런 문장들을 내뱉을 수 있는 그의 정신, 그의 머리는 어디서부터 기원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그의 프로필. 서강대 철학과 중퇴! 신해철을 좋아한 초창기에는 그가 철학과 출신이라는 것을 몰랐다. 후에 이를 알고는 아! 바로 철학이다. 그렇게 나는 철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두 가지가 내가 철학을 택하게된, 철학에 이끌린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억압된 통제속의 학창시절에 진저리를 느끼고,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픈 욕구에 쇠사슬을 풀어줄 무엇인가를 갈망했고, 그때 읽던 철학책을 통해 다소나마 나를 풀어줄 실마리를 얻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때 그것은 단지 느낌이었고, 구체적인 결론이나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후에 내가 철학을 택함에 있어 이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의 영향은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철학을 택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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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학교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내 또래의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뭔가를 말하려는 듯 했다. 손을 보니 성경책과 어떤 쪽지가 있었다. 나는 이내 '아! 전도하려는구나' 하고 눈치를 챘다. 나는 모든 종교를 수용한다. 신자는 아니지만 종교에는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교를 강요하는 자는 용납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나에게 전도를 하기 전에 친근감을 돋우려는건지 자기도 영문과 98학번이라면서 나에게 무슨과냐고 물었고, 나는 철학과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내 대답을 듣고는, 철학과는 졸업 후에 뭐하는지 참 궁금하다고 말했다. 철학도로써 이 질문 또한 지겹게 듣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든, 나를 처음보고, 내가 철학도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여지없이 내게 저런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저런 질문들이 싫지는 않다. 그것은 그만큼 철학에 대한 신비감과 동경 비슷한 감정을 갖고 있기에 나오는 질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을 지나치게 신비롭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철학을 깔보는 지금의 풍토에서는 차라리 이게 낫다 싶다.

  말이 잠시 딴 데로 샜다. 나는 그의 질문에 학교 선생님이나 기자로 나가기도 하고, 출판 분야로도, 교수로 학계로도 진출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실제 철학과를 졸업한 사람들이 어떤 분야로 많이 나가는지는 난 잘 알지 못한다. 위에 내가 말한 직업들은 사실 잘 풀린 경우에 해당된다. 잘 풀리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소수이기 마련이다. 나머지 많은 철학도들은 실제 어떤지 난 알지 못한다. 나는 그에게 철학과 나와도 밥 굶지 않는다, 사회에서 꽤 잘 나간다는 것을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고 그래서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의 직업을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적어도 거짓은 없다. 내가 실제 본 경우, 내가 알고 있는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껍데기에만 치중하고 있다. 알맹이가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흔히 말하는 문사철(국문학,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들은 사회의 알맹이를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여 껍데기에만 치중한다. 나 하나 잘 살면 되지 하면서 좋은 학벌, 좋은 직장에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비도덕적, 비양심적인 경우가 많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는 얼마가지 못한다. 정신, 영혼없는 육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식물 인간을 떠올려보라. 겉으로 살아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없는 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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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엔그것이있다 2009-12-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철학과에 관심있는 학생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어떤학과를 나오던지 그 학과에 열정을 갖고 있다면 '성공'할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보는 성공은 재력,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자아성취감'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일에 만족을 갖고 인생을 살아가는것 그것보다 더 큰 '성공'이 있을까요?? 인생은 한번뿐 이니 즐기며 가는게 옳은 길이죠. -끝

이잘코군 2009-12-27 17:52   좋아요 0 | URL
어이쿠. 굉장히 오래전에 끄적인 글 - 잘 기억도 나지 않는 - 에 댓글이 달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 네, 그런 의미에서의 성공이 가장 큰 행복이겠죠. 동의합니다.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 그는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국가론의 핵심인 '철인정치' 개념을 수립한다. 또한 생전 책 하나 쓰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에우튀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크리톤', '향연' 등의'대화편'을 통해 재생시킨다.

 사람들은 내가 플라톤을 존경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하필 왜 플라톤인가? 플라톤은 엘리트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나요? 등등...

 한번은 '사회철학' 수업 중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해 토론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은 플라톤의 저술 '국가론'에 집약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국가론'에서는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서의 지도자들의 자격을 다루고 있는데,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어릴 적부터 음악, 미술, 체육 등의 예체능 교육을 통해 마음을 교육시키고, 자란 뒤에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직업을 부여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무를 잘 다루면 목수를, 바느질을 잘하면 재단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각자의 능력에 맞는 일을 직업으로써 부여해야 국가가 잘 운영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과 달리 학문에 재능을 보이는 자들에게는 계속해서 국가를 경영하는 철학을 가르쳐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한 사람 그에게 왕의 지위를 부여해야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교육론, 국가론이라는 것은 엘리트주의다. 엘리트만이 높은 지위에 올라 더 막중한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이런 플라톤을 존경하는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석한다. 내가 플라톤을 존경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엿보이는 '엘리트주의'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엘리트주의'로 해석하고 있다. 즉 그들의 엘리트주의란 소위 공부 잘하고 명문대 나온 사람, 혹은 뒷배경이 빵빵한 사람, 돈 많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일진대, 나는 이들을 엘리트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엘리트 개념은 '정신'적인 것이다. '정신의 단계' 중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들을 엘리트로 받아들인다.

 '정신의 단계'라는 것은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나는 쾌락을 중요시하고 감각적인 것을 찾는 사람들, 사물의 겉모습만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 비도덕이고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사람들을 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에 배치하고, 책을 읽고 토론을 즐기며 그 안에서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을 정신의 높은 단계에 배치한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높은 단계는 학문의 탐구, 사물의 분석을 넘어서 자기성찰, 자기내면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낮은 단계 하나, 높은 단계 두 가지로 말했지만 최저와 최고의 사이에는 정신의 여러 단계들이 존재할 수 있다. 나는 다만 그 단계들 중 윤곽이 확실히 드러나는 정신의 단계를 언급한 것 뿐이다. 이른바 이런 '정신의 단계' 따라 나는 높은 단계를 지향하는 사람일수록 사회의 엘리트로 취급한다. 그것은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이나 권력, 명예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길거리 청소부도 구두닦이도 모두 엘리트가 될 수 있다. 반면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재벌기업회장도 정신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을 수도 있다.

 나는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인다. 자기 능력에 따라 직업을 부여해야한다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난 그의 '철인왕'개념에는 동의한다. '철인왕'이라는 것이 '철학자'의 다른 말이지만, 여기서의 '철학자'는 직업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내가 위에서 말한 정신의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나는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일수록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가 지닌 권력이나 명예를 함부로 남용하지 않고 정말 옳은 일을 위해서만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플라톤의 이러한 '철인왕' 개념을 소중히 생각해 그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가 외치는 '철인왕'은 우리가 외치는 '도덕적 정치인'에 다름아닌 개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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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1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1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