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고려국의 박술희와 백제국의 애술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대화 중 서로 성격이 비슷하고 무예가 출중함을 안 애술이 박술희를 향해 자신이 머리가 나쁘고 힘만 세다고 말하며 박술희 또한 자신와 똑같을 거라고 단정짓는 발언을 하자, 박술희는 옛 성인의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이 학문에도 높은 경지에 올라왔음을 과시하며 되받아쳤다.

 무턱대고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의 박술희와 애술의 대화를 끄집어낸 것은, 박술희의 경전 인용에서 '학문'에 대한 생각으로 나의 사고가 확장됐기 때문이다. '학문'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 있어 동기를 부여해줬다고 볼 수 있겠다.

 예로부터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 등의 옛 성인들의 말을 인용해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이 학문의 일정 경지에 도달했음을 과시함과 동시에 자신의 주장의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강하게 하기도 해, 지식인들의 논쟁에 성인들의 말씀이 많이 이용되곤 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했지 그들의 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그들이 그 시대의 한 획을 긋고 간 위대한 사상가이기에 이들의 발언이 어느 정도의 권위를 갖고 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성인의 말씀을 자신의 논리를 확고히 하는데 인용하는 것도 좋긴 하지만, 학문의 발전으로 볼 때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매우 안일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경전을 해석하고 그것을 외우기만 해서는 지식은 신장될지 모르나 사고는 굳어지고 학문의 발전은 어렵다. 외우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거기서부터 또다른 학문의 재생산이 이루어져야만 학문의 발전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서양의 학문은 주장과 반론의 학문인데, 동양의 학문은 경전해석의 학문이다. 즉 이 말은 서양의 학문은 끊임없이 이전의 패러다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역사임에 반해, 동양의 학문은 옛 성인들의 말씀을 해석하고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음을 지적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어떤 것이든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고 발견된 문제점, 모순을 극복하도록 해야한다. 과거부터 당연하게 여겨왔으니 이건 완전무결한 선이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고착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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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나는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지금 현재 나를 완벽주의자라 말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시 나는 시험을 통해 어떤 희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힘들게 거의 한달 동안 시험공부를 하고서 시험지를 대했을 때 모든 문제의 답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면 나는 거기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힘들게 공부하고 난 뒤의 보람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지만 '보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컸다. 시험 시작한지 10분도 안돼 모든 문제를 풀고 엎드려있으면 주위 친구들은 그런 나를 대단하게 봤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내가 시험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알아볼려고 자습서의 귀퉁이에 적혀있는, 교과서에도 나와있지 않은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험공부를 완벽히 하고도 어이없이 한 두 문제 틀리는 경우가 있었다. 내딴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왜 정답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 답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채점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가채점을 해보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들 드렸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난 너무 생각을 깊이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 당시엔 그냥 내가 그런가부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라는 식의 깨달음(?)을 얻고서 나름대로 납득을 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지선다형의 문제형식의 사고방식을 하고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보기중 하나만을 정답으로 정하고 그것을 찍어야만 동그라미가 그려질 수 있었던 사지선다형에서는 깊이 있는 사고는 필요없다. 그냥 정해진 정답을 잘 골라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깊이 생각했다. 내 답은 나름대로 나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정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미 정답이 정해져있는 사지선다형에서는 그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깊이있는 사고, 나름대로의 각자의 사고는 철저히 거부당한다.

 지금 철학과 대학시험에서는 정해진 답이란 애초에 없다. 답은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답을 산출하기까지의 논리와 기초지식이 있는가만이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창의력있는 교육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네 시험제도는 아직도 창의력,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12년간의 수많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사지선다형에 익숙해지고 '정답(정해진 답)'을 벗어난 사고는 하지 못한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가려내지 못한 나 같은 학생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시험제도를 고쳐야한다. 논술식으로.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학생들의 답안을 누가, 언제 채점을 하고, 객관적 기준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이 난리가 날 것이다" 라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맞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학시험에서의 학점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품지 않는데 비해 중·고등학교 시험에서는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일류대학 이라는 것이 없어진다면 중·고등학교에서도 논술식 시험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라도 믿는다. 대학간의 서열화를 부추기지 말고 차라리 프랑스처럼 1대학, 2대학 등으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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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을 할 때나 글을 쓸 때 우리는 비슷한 단어를 명확한 구분을 짓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생각된다'와 '생각하다' 또한 그런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둘은 무엇이 다른가?

 이 둘은 사전에는 나와있지 않다. 사전에는 오로지 '생각', '생각 다'라는 단어만이 있을 뿐이다. '생각되다'와 '생각하다'. 두 가지 단어 각각에서 먼저 느껴지는 것은 하나는 수동태라는 것이고 하나는 능동태라는 것이다. '생각되다'는 수동태이며, '생각하다'는 능동태이다. 수동태라는 것은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해서 영향을 받아 내가 그러한 행동 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고, 능동태라는 것은 내 스스로의 사고나 판단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각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생각을 하게되는가? 생각을 하는가?

 '생각'이란 1.마음에 느끼는 의견 2.바라는 마음 3.관념 4.연구하는 마음 5.깨달음 6.추억 7.고려 8.의도,목적 9.사모 10.그렇다고 침, 간주 11.각오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들을 살펴보면 바라는 마음이나 고려, 의도, 목적, 각오 등의 의미에서는 능동태의 모습을 볼 수가 있고, 깨달음, 마음에 느끼는 의견 등의 의미에서는 수동태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즉 '생각하다'와 '생각되다' 모두 가능한 표현들이다. 단 그 두 가지가 차이가 나는 것은 '생각되다'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했을 때에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의 강도나 정도나 약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주관적으로 의도하고 바라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느껴진다라는 뜻, 즉 깨달음, 느낌을 의미하는 것이다.

 흔히 고등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칠 때 '생각되다'라는 표현이나 '∼하는것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고, '생각하다', '∼하다'라고 쓰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확실하게 나타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용 가능하지만 내 주장을 좀더 강하게 주장하고자 한다면 '생각되다'라는 표현보다는 '생각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확실치도 않은 것을 확실하다고 억지로 주장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남이 나의 의견에 반박을 하고 다른 주장을 해온다면 나로서는 이에 대처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냥 느껴지는 것, 수동태로 표현했다면 이에 대해 빠져나갈 구멍이 생기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나는 여지없이 구석에 몰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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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색함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하면, "사색(혹은 생각)이 사색이지 사색에 무슨 유형이 있느냐, 그냥 생각하면 그것이 다지 거기에 뭐가 있다는 것이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색. 좀더 친근하고 쉬운 말로 '생각'이라는 단어가 있다. 생각함에 유형이 있을까? 나는 유형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나의 사색함, 나의 생각함에는 유형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다먹고 빈병만 남은 게토레이 플라스틱 병을 두고 사색을 할 수 있을까? 사색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슬슬 꼬이기 시작하나? 나의 이 질문에 평소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쟤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아니 게토레이 병을 놓고 생각을 하면 하고 말면 마는거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건 뭐고,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뭐야.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먼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나의 사색함에 게토레이 병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다 마신 게토레이 병을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보고 정밀묘사를 하듯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 그것만을 놓고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게토레이 병 주위에 있는 국어사전이나 시계, 컴퓨터, 수첩 등을 포함해 사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게토레이 병 이외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직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은 게토레이 병 뿐이다. 그럼 게토레이 병에 얽힌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은 다만 나의 사색이 확장되도록,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그 영역을 넓혀주는 '원인'이나 '동기부여'로써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나는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담들, 추억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내는 것을 뜻하며, 길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기억에서 벗어나 그 사고의 꼬리를 물고 다른 사고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즉 후자는 엄밀히 말하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미 다른 영역으로 옮겨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당에 놓여있는 개의 밥그릇을 보고서 "거 밥그릇 참 지저분하다"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땡칠이(개의 이름)를 떠올릴 수 있다. 전자는 개의 밥그릇에 대해 사고한 것이고, 후자는 그 밥그릇을 사용했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다. 분명 시각을 통해 들어온 것은 '밥그릇'이지만 머리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밥그릇'이요, 한편으로는 '개'이다.

 나의 사고, 너의 사고, 우리들의 사고의 대부분은 아마도 후자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인간이 단세포가 아닌 이상(물론 단세포는 '사고'가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 하나를 놓고 그것만 사고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몸으로 온갖 경험들과 맞부딪치게되고 그 경험들을 기억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 후에도 그 경험 혹은 기억들은 없어지지 않고 머리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우리의 옛 사랑을 떠올리고, 개 밥그릇을 보고 죽은 개를 떠올리며, 빛바랜 사진을 보고 지난 일을 떠올린다. 이 모든 '떠올림'은 후자의 사색이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새삭함의 두가지 유형'이라고 전제를 깔고 시작했으나, 전자의 사색, 그것만 놓고 보는 사색은 사실상 사색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보는 것일 뿐이다. 보는 것이 사색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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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국의 많은 부모들은 자녀가 철학과에 간다고 하면 뜯어 말릴 것이다. 왜 그럴까?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일까?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지만, 한국이라는 상황에 걸맞게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한다'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고 문제의 근본원인을 찾기 위해 소급해 들어간다는 면에서 위험(?)하다. 위정자들에게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 따로 없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으면 그대로 유지될 사안들에 대해 철학도는 이를 걸고 넘어진다. 자신의 사적 이익관계를 떠나 '철학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 문제가 이렇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원인을 파고든다. 한국에서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국가권력의 절정기에 국가의 정책에 딴지를 건다는 것은 "나 죽겠소" 하고 나서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부모들은 가급적 국가를 거스르지 않고 자녀가 편안한 삶을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저 조직에 순응하고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길일까? 진실은 덮어둔 채 나만의 안위를 생각하고 나의 안락한 삶을 꿈꾸는 것이 진정 올바른 길일까? 그렇지 않다. 잘못된 것을 알도록 깨우쳐주고 그것을 고치도록 인도하는 것이 부모세대가 해야할 일이다. 그저 품안에 두고서 아끼며 데리고 사는 것은 진실을 감추고 거짓을 가르치는 행위이다. 진리, 진실을 모르고 살아가며, 그냥 그렇게 죽어가는 삶은 얼마나 불쌍하고 안타까운가!

또한 진리, 진실을 아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된다. 안다면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야한다. 아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그저 나의 지적 만족감, 지적 유희일 뿐이지 그것은 진리, 진실을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것을 세상에 뿌려야 비로소 그의 역할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앎은 곧 행동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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