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색함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하면, "사색(혹은 생각)이 사색이지 사색에 무슨 유형이 있느냐, 그냥 생각하면 그것이 다지 거기에 뭐가 있다는 것이냐" 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색. 좀더 친근하고 쉬운 말로 '생각'이라는 단어가 있다. 생각함에 유형이 있을까? 나는 유형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나의 사색함, 나의 생각함에는 유형이 있다.
나는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있는 다먹고 빈병만 남은 게토레이 플라스틱 병을 두고 사색을 할 수 있을까? 사색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이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을 하는 것일까? 슬슬 꼬이기 시작하나? 나의 이 질문에 평소 그다지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쟤가 무슨 말을 하는거야 라고 투덜댈지도 모르겠다. 아니 게토레이 병을 놓고 생각을 하면 하고 말면 마는거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을 하는건 뭐고,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뭐야. 이 두 가지는 분명 다르다.
먼저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은, 나의 사색함에 게토레이 병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화가가 다 마신 게토레이 병을 탁자 위에 놓고 그것을 보고 정밀묘사를 하듯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 그것만을 놓고 사색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게토레이 병 주위에 있는 국어사전이나 시계, 컴퓨터, 수첩 등을 포함해 사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게토레이 병 이외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오직 머리 속에 존재하는 것은 게토레이 병 뿐이다. 그럼 게토레이 병에 얽힌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한다는 것은, 게토레이 병은 다만 나의 사색이 확장되도록,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그 영역을 넓혀주는 '원인'이나 '동기부여'로써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나는 게토레이 병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짧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담들, 추억들을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내는 것을 뜻하며, 길게는 게토레이 병에 얽힌 기억에서 벗어나 그 사고의 꼬리를 물고 다른 사고의 영역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즉 후자는 엄밀히 말하면 '게토레이 병에 얽힌 나의 경험들에 대해 사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기반으로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고 이미 다른 영역으로 옮겨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당에 놓여있는 개의 밥그릇을 보고서 "거 밥그릇 참 지저분하다"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땡칠이(개의 이름)를 떠올릴 수 있다. 전자는 개의 밥그릇에 대해 사고한 것이고, 후자는 그 밥그릇을 사용했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개에 대해 사고하는 것이다. 분명 시각을 통해 들어온 것은 '밥그릇'이지만 머리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밥그릇'이요, 한편으로는 '개'이다.
나의 사고, 너의 사고, 우리들의 사고의 대부분은 아마도 후자의 사고방식일 것이다. 인간이 단세포가 아닌 이상(물론 단세포는 '사고'가 불가능하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어떤 물건 하나를 놓고 그것만 사고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온갖 몸으로 온갖 경험들과 맞부딪치게되고 그 경험들을 기억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란 후에도 그 경험 혹은 기억들은 없어지지 않고 머리 속 어딘가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봄날은 간다'를 보고 우리의 옛 사랑을 떠올리고, 개 밥그릇을 보고 죽은 개를 떠올리며, 빛바랜 사진을 보고 지난 일을 떠올린다. 이 모든 '떠올림'은 후자의 사색이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새삭함의 두가지 유형'이라고 전제를 깔고 시작했으나, 전자의 사색, 그것만 놓고 보는 사색은 사실상 사색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보는 것일 뿐이다. 보는 것이 사색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