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나는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완벽주의적 성향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지금 현재 나를 완벽주의자라 말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당시 나는 시험을 통해 어떤 희열, 카타르시스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힘들게 거의 한달 동안 시험공부를 하고서 시험지를 대했을 때 모든 문제의 답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면 나는 거기서 대단한 만족감을 느꼈다. 힘들게 공부하고 난 뒤의 보람이라고도 말 할 수 있겠지만 '보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컸다. 시험 시작한지 10분도 안돼 모든 문제를 풀고 엎드려있으면 주위 친구들은 그런 나를 대단하게 봤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내가 시험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알아볼려고 자습서의 귀퉁이에 적혀있는, 교과서에도 나와있지 않은 것을 물어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철저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런 사소한 것까지도 다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시험공부를 완벽히 하고도 어이없이 한 두 문제 틀리는 경우가 있었다. 내딴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왜 정답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내 답도 정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모든 시험이 끝나고 선생님들이 채점에 들어가면 학생들은 가채점을 해보고 납득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나 또한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선생님께 질문들 드렸다. 그런데 내 말을 듣고서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난 너무 생각을 깊이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찍지 못했다? 당시엔 그냥 내가 그런가부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라는 식의 깨달음(?)을 얻고서 나름대로 납득을 했지만, 지금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지선다형의 문제형식의 사고방식을 하고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개의 보기중 하나만을 정답으로 정하고 그것을 찍어야만 동그라미가 그려질 수 있었던 사지선다형에서는 깊이 있는 사고는 필요없다. 그냥 정해진 정답을 잘 골라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깊이 생각했다. 내 답은 나름대로 나의 사고과정을 따라가다보면 정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이미 정답이 정해져있는 사지선다형에서는 그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깊이있는 사고, 나름대로의 각자의 사고는 철저히 거부당한다.
지금 철학과 대학시험에서는 정해진 답이란 애초에 없다. 답은 자기가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다만 자신의 답을 산출하기까지의 논리와 기초지식이 있는가만이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창의력있는 교육을 하자고 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네 시험제도는 아직도 창의력,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12년간의 수많은 시험을 통해 학생들은 사지선다형에 익숙해지고 '정답(정해진 답)'을 벗어난 사고는 하지 못한다. 너무 생각이 깊어서 정답을 가려내지 못한 나 같은 학생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지금의 시험제도를 고쳐야한다. 논술식으로. 어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학생들의 답안을 누가, 언제 채점을 하고, 객관적 기준이란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이 난리가 날 것이다" 라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맞다.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학시험에서의 학점에 대해서는 크게 불만을 품지 않는데 비해 중·고등학교 시험에서는 왜 그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결국 일류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일류대학 이라는 것이 없어진다면 중·고등학교에서도 논술식 시험에 대한 거부감이 조금씩 사라질 것이라도 믿는다. 대학간의 서열화를 부추기지 말고 차라리 프랑스처럼 1대학, 2대학 등으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