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일지>

1999년 겨울 공군에 지원 입대했다. 하지만 군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나는 결국 돌아왔다.

2001년 가을, 12월 입대를 앞두고 몇달간의 심각한 고민을 했다. 나의 반전평화주의를 통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겠노라 결심하고, 주위 친구, 선배와 부모님께 '통보'하다. 나의 결심도 힘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이를 곱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욱 힘들었다. 결국 현실의 힘에 부딪혀 입대했다.

2001년 겨울-2004년 겨울, 훈련소 입소부터 시작해 제대하기 전까지 군대의 부당행위와 부조리 등에 대해 화장실 낙서판, 투고함, 설문지 작성, 대대장에게 이메일 보내기 등의 방식으로 나의 비판적 의견을 공개함. 익명인지라 나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다들 나라는 것은 알고 있음. 하지만 대놓고 내게 '지랄'하지는 못했음. 그럴경우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자기들도 알고 있기에... 단 한번, 중대장이 나를 불러 "이거 니가 썼지?"라고 물어본 적만 있음.

2004년 겨울, 제대함.

이상이 나의 군에 대한 대략적인 서사적 기술이다. 난 위의 군에 대한 내 행위들이 그다지 평범함의 범주를 확연히 벗어난 일이기에 사석에서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내가 위에 기술한 나의 행동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그 자리는 토론장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때로는 귀찮고, 짜증나고, 열받는다. 매번 했던 얘기 또 해야되기에 귀찮고, 상대방이 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짜증나고, 상대방은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주의에 표방해 군사논리만을 내세우기에 인간의 근본적인 양심과 인권의 문제를 논하는 나를 열받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글로나마 이렇게라도 말해야겠다.

2004년 5월 21일, 남부지법 형사 6단독 이정렬 판사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군 입대를 거부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정아무개씨 등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바로 이러한 판결을 보고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 본 영화 '데어데블'에서 밴 애플렉은 "개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곤하는데, 위의 판결은 가히 개인이 세상을 바꿀 만한 사건이었다. 그는 선거때도 진보정당을 찍지 않았고, 스스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게다가 군대는 지원하여 특전사를 나왔고, 여전히 베레모를 자신의 사무실에 두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판결은 더욱 의미있다.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은 판사조차도-일단 판사라는 직책은 이미 그 국가의 법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에 진보적이 될 수가 없다. 법이란 원래가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가 옳다고 판결한 마당에 이땅의 손놓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는 일종의 회초리로 작용함과 동시에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점으로 새롭게 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한다. 내가 군대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느낀 생득적인 나의 반골기질에서 비롯된 자유주의적인 기질 때문이었고,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신체검사통지서를 받던 시기를 기점으로, 나의 동아리 후배가 22사단 동해안 바닷가에서 시체로 발견된 때, 나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든 때를 거쳐간다. 넓게는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인권적인 만행들이 군대에서 비롯됨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것이 곧바로 반전평화주의로, 양심적 병역거부로 연결되었다.

대한민국의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군대' 문제에 대해 이야기만 나오면 모두가 애국주의와 민족주의 정신에 입각해 군사주의적 논리를 펼치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군대 문제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모두가 군사주의적 시각으로만 바라볼 뿐, 그 자리에 평화와 인권과 자유와 사상과 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일단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 남성들의 경우에는 보상심리가 존재한다. 나는 군대에서 빡시게 고생했는데 씨바 다른 어떤 놈들은 양심이니 종교니하는 이유로 이를 거부한댄다. 아 열받네. 뭐 이런 식이 되는 거다. 그러니 그들도 군대를 가는 것이 당연하고, 안가겠다면 감독에 가라는 논리다.

또 한편으로는 북학의 침투도발을 우려하는 시각이 있다. 쟤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면 다른 애들도 따라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작 군대가는 놈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 당연히 북한이 쳐들어올 수 밖에 없지 않느냐? 는 논리다. 실존하지 않는 위협을 마치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이 포장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국토를 수호하고 있는 군대가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들을 감독에 가두는 것은 모순이다.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민주주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리도 있지만 소수존중의 원리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은? 이들을 인정하고 대체복무제를 실시하면 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면 이들을 심사위원회를 거쳐 걸러내면 될 것이고, 위증을 한 자에게는 법정 최고형을 때리면 된다. 또한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데 이건 차후의 문제다. 당면한 과제는 이들의 양심을 인정할 것이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야 심사위원회를 어떻게 구성하고, 대체복무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논의하면 된다. 제도가 계획되어 있지도 않다고 해서 양심을 저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한기총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반대입장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비종교적이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종교를 변경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들의 교인들이 빠져나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쓸데없는 기우다. 이 땅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위치는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라 남북전쟁 이후의 '빨갱이'보다도 못하기 때문이다. 빨갱이로 대표되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관한한 1990년대에 한국의 인권운동의 핵심과제이기라도 했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일제시대 때부터 존해해왔지만 이제야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홍구 교수의 말에 따라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고, 이제 그 아들은 민주화된 감옥에 가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일제시기의 병역거부자는 독립운동자이었지만, 지금은 병역기피자로 전락해버린 것도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기총에게는 이런 말을 되새겨보라고 전하고 싶다. 근대 프랑스의 사상가 볼테르는 그의 저서 <<관용론>>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의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 한기총은 여호와의 증인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위해서는 싸워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기독교가 표방하는 이념이 이것이었던가? "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이웃의 불행을 아랑곳하지 말라" 한기총의 현재 주장으로써는 이런 결론밖에는 도출되지 않는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함을 인식하기 위해 더이상 의심할 수 없는 최초의 것으로부터 사유를 시작한 결과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양심적 병역거부 논란에 있어서도 지금까지의 판결과 선례만으로 고집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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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5-08-0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들러님께서 추천은 이곳에 가서 하시라네요.^^ 첨이에요. 반갑습니다.

얼룩말 2005-08-13 0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가슴아파요. 하고 싶어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못한... 참 슬프죠?^^
 

이라크 전쟁을 통해 본 칸트의 평화론(平和論) 비판(批判)

독일의 근대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하며 그에 따른 두 가지 평화론을 예로 들었다. 첫번째는 '자본주의 평화론'으로 자본주의 국가들끼리는 시장경제의 확산과 교역을 통해 상호의존적 경제 관계가 구축되면 기업인들간의 유대가 돈독해지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을 행사, 기업의 이익을 저해하는 전쟁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 요지다. 두번째는 '민주평화론'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선전포고와 같은 중차대한 결정에 대해 민주적 통제를 가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체제하에서는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상과 같은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비추어봤을 때 현재 미국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은 '자본주의 평화론'과 '민주평화론' 을 모두 빗겨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라크는 완전 개방된 자본주의는 아니었으나(이는 미국의 압력에 의해 한정된 공간에서의 자본주의로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고 있었고(사담 후세인이 국가를 지배하고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다), 미국은 당연히 자본주의 국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두 자본주의 국가간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틀렸다. 비록 이라크와 미국간의 교역도 적고, 기업인들간의 유대도 돈독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서로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유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끼리는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칸트의 생각은 엇나갔다. 오히려 미국의 자본주의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껏 쌓아두었던 무기창고를 유통기한이 지나기 전에 비워야하기 때문이다. 비우고 다시 생산해야 미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다. 더군다나 이라크를 치게되면 테러예방이라는 명분과 함께 석유 또한 얻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미국 기업의 입장에서 이라크 전쟁은 적극 반길일이다. 따라서 이라크와 미국 기업의 유대가 좋지 않았다는 요소가 남아있지만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은 적어도 절반은 틀렸다. 자본주의 국가간의 평화는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민주평화론' 또한 틀렸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견제와 균형을 통해 국가 지도자의 자의적 결정에 따른 전쟁 발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지만, 지금의 이라크 전쟁은 부시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민주당과 반전 평화주의를 외치는 이들의 견제와 균형을 먹히지 않았다. 부시를 포함한 부시행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따라서 칸트의 '민주평화론'은 틀렸다. 만약 칸트의 '민주평화론'이 성립이 되려면 미국이 '민주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면 된다. 그런데 미국이 민주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성급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 시초이고, 지금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고, 이들이 채택하고 있는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임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다만 민주주의에 패권주의가 결합된 형식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견제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가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미국의 '하는 짓'이 싫다고 해도 미국이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칸트는 확실히 틀렸다.


사실 칸트의 '자본주의 평화론'이나 '민주평화론'의 골자가 되는 핵심내용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인지라 이 시대를 살지 않는 칸트는 저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나는 칸트가 틀렸다고 밖에 말 할 수 없으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는 칸트는 옳았다. 다만 후대에 발생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변수를 고려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칸트는 옳고 또 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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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2014-11-2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평화론은 처음들어봐서 뭔지 모르겠으나,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주창했지 민주주의 평화론은 후대의 학자가 칸트를 인용해서 주창한겁니다. 또한 칸트의 영구평화론속 공화정은 현재의 민주주의 국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평화론의 골자는 `민주주의 국가 간` 입니다.

이잘코군 2014-11-25 14:23   좋아요 0 | URL
넵 한참 전 글이라 지금은 기억이 전혀 안 나네요. 이 글에 무슨 내용을 썼는지도. ^^ 지적 감사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려면 내 자신이 떳떳해야하고 내 스스로 도덕성을 기본전제로 깔고 있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남을 비판할 것이다.

김규항씨의 <B급 좌파>에 실린 동명의 글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좌파로 살거나 우파로 살 자유가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런 선택을 일생에 걸쳐 일상 속에서 지키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한정하는 일인 것 같다. 좌파로 사는 일은 우파로 사는 일에 비할 수 없이 어려우며, 어느 시대나 좌파로 살 수 있는 인간적 소양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다. 우파는 자신의 양심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건전할 수 있지만, 좌파는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야 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난 스스로를 '진보적 자유주의자' 혹은 '좌파 자유주의자', '비판적 자유주의자'라고 말한다. 그 말은 즉, 나는 나의 양심뿐만 아니라 다른 이의 양심까지고 지켜내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른 이의 양심까지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계속해서 쓴소리를 해댈 수 밖에 없고, 그에 따르는 기본전제는 나 자신의 양심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나의 양심이 깨끗하지 않고서 나는 다른 이들을 향해 쓴소리를 해댈 수가 없다. 다른 이와 나의 죄질의 차이가 클지라도 그나 나나 깨끗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좌파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해성사를 한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다지 크게 잘못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수학경시대회에서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시험문제 답을 몇개 가르쳐준 적이 있고, 대학에서 시험전 책상에 조그맣게 기록한 몇 문장을 통해 교양과목 시험에서 약간의 이득을 본 기억이 있다. 그리고 가끔이기 했지만 그리고 그가 잘못한 것이긴 했지만 나는 동생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원인 제공이야 누가 했건 누가 잘못했건 나의 폭력행사는 잘못된 것이었다. 그 이외에는 나는 나의 도덕성에, 나의 양심에 비춰 잘못한 일은 없는 듯 하다.

한가지 더.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한 나의 머리속에 갇혀있던 생각들 중에서 나의 양심에 반하는 것들이 조금 있기는 하다. 나는 누군가를 죽이고픈 생각을 한 적이 있고, 누군가를 매우 증오한 적이 있으며, 그가 잘못되기를 바란 적도 있고, 가끔은 아니 자주 야한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지금껏 이정도면 나의 양심을 지켜왔다고 생각하고, 이 정도의 도덕성이라면 남에게 뭐라고 할 만한 자격은 있다고 본다. 앞으로도 지금껏 했던대로 나는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 쓴소리를 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나는 그들의 양심까지도 지켜낼 것이다. 나는 김규항이 자처하는 B급좌파까지는 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좌파인지도 확신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좌파가 되고픈 희망을 가진 사람임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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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직에 몸담고 있거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의 파렴치한 행동들이 신문지상에 잇달아 오르내리고 있다.

사례 1. 경찰간부가 정복을 입고 회식 중 커피배달온 여고생에게 말했다. "벗어" 여고생은 경찰복을 입고 있는 그가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시키는대로 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싶었지만 가해자가 경찰이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소송을 냈다.

사례 2. 경찰대 출신의 경찰이 인터넷 채팅으로 12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맺었다. 후에 미성년자 성관계자 처벌시 드러났으나 봐주기 수사로 인해 처벌을 면했다. 이후 논란이 되자 사표를 냈다.

사례 3. 한 초등학교 교사가 반 여학생 10여명을 12차례에 걸쳐 성추행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나 학생들은 성추행당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학교 투서함에 넣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조치하지 않았다.

사례 4. 대구의 한 치과의사가 미모의 여성들을 유인해 미인대회에 내보내준다며 전신마취후 성추행 및 성폭행했다.

사례 5. 공무원이 회식 술자리 후 집에 가던 동료 여성공무원을 성폭행했다.

이상의 사례들은 적어도 최근 5일이내에 신문지상에 올랐던 사건사례이다. 범행의 가해자는 모두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할 경찰이거나,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는 치과의사, 국가의 녹을 받고 있는 공무원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대부분 미성년자들이다. 신문을 통해 위의 사례들을 접하면서 뭐 이런 새끼들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밖에는 안나고 화가 치밀어 숨이 막혀온다.

죽어라 공부해서 경찰대 나와 경찰간부되고, 치대 나와 치과의사 되면 뭐하나. 저들의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지니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과 '사람'이라는 종(種)으로 분류가 되는 것조차 수치스럽다. 겉만 사람이고, 겉만 엘리트였지 하는 짓은 영락없는 짐승들 아닌가. 짐승도 저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짐승만도 못한 이들이다.

사회의 어느 부분보다도 가장 '도덕성'이 요구되는 경찰과 공무원과 의사가 최소한의 양심조차도 저버렸다면 그 사회는 이미 볼 것 없는 타락한 후진사회다. 고(故)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노동운동가 전순옥씨는 20일 동대문경찰서 대강당에서 '인권과 한국 민주화'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녀는 "경찰의 모습에서 그 나라의 인권과 민주화를 판단할 수 있으니 이젠 약자를 돕고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하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달라"고 주문했다. 경찰의 모습이 그 나라의 인권을 반영한다는 말을 위의 범죄사례에 비춰본다면 이미 우리나라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후진사회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유엔 인권위원회에 서명을 하고 인권, 인권을 외치지만 오직 말만 그러할 뿐 정작 인권을 가장 소중히 해야할 저들이 인권은 커녕 양심조차도 팔아버렸으니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시는 이와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가 필요함을 주장한다.

첫째, 먼저 인간이 되지 않은 자는 고등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 이는 어떤 테스트를 통해서나 심사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각각의 자녀를 기르는 가정에서부터 이 운동이 시작되어야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 아이가 나이를 먹어가는데도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싶으면 가차없이 더이상의 고등교육을 중단해야한다. 대학 나오고 대학원 나오고 석사, 박사 해봐야 이런 애들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밖에는 되지 않는다. 인간이 되지 않은 엘리트는 가장 무서운 범죄자다. 따라서 가정에서부터 부모가 알아서 통제해야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나쁜 인간이 사회로 나와 그가 있어서는 안되는 자리에 머물고 있다면, 그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가차없이 형벌을 가해야한다. 의사라면 의사면허를 박탈시키고, 경찰이라면 경찰 자격을 박탈해야한다. 또 그가 교사라면 평생 교사를 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공무원이라면 공무원 자격을 취소해야한다. 이후 그를 사회봉사원이나 기타 교육기관에 머물게하며 인성교육부터 다시 시키고 '평생봉사'를 명해야한다. 겉으로 좀 나아졌다 싶다고 해서 다시 내보내고 해서는 안된다. 사회의 범주내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해주되, 그는 최저임금을 받는 조건하에 사회봉사에만 열중하게 해야한다. 왜냐면 인간이 안된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인성에 비했을 때 받아서는 안될 고등교육을 받아 사회에 머물렀고 그렇기에 같은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사회의 하위층에 있는 사람보다도 죄질이 더 나쁘다. 감옥에서 몇년 살다 나오고 하는 식의 형벌보다는 사회의 테두리내에서 살되, 평생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그에게나 사회에게나 더 낫다. 물론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첫번째 단계에서 차단을 해야한다.

국가 전체가 갈수록 도덕불감증에 걸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죄의 질은 더더욱 나빠지고, 그 수단은 교활하고 악랄하다. 성폭행 피해자의 연령은 갈수록 내려가고 있고, 범죄자는 사회의 부랑자나 소외자가 아닌 최고의 엘리트라 지칭되는 이들이다.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나쁜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화된 그들 중 소수의 인원의 잘못된 행동은 그들이 받은 교육의 한계점을 지적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봤을 때 지금은 과거보다 더 큰 윤리성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인성교육은 이미 쓰레기통에 간 형국을 맞고 있다. 기술과 자격, 능력은 나중의 문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사람이냐 짐승이냐의 문제다. 교육의 철학을 되돌려야한다. 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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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뺐다. 간만에 책정리를 했다. 제대한 뒤로 좁은 방안에 수많은 책들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리를 할까 고민하며 나름대로 1차 정리를 했는데 오늘로써 2차 정리를 마무리했다.

1차 정리 때에는 단지 많은 책을 효과적으로 쌓아 공간을 넓히려고 애썼고, 이번에는 이미 본 책과 그렇지 않은 책, 그리고 본 책도 아니고 가까운 시일내에 다 읽은 책도 아니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봐야할 책, 이미 봤고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로 구분을 지었다.

이미 본 다시는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은 대부분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고른 책들이다. 가령 <재미있는 수학이야기>-책 제목이 정확치는 않다-라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101가지 이야기>와 같은 책들이 이에 속한다. 개인적인 관심사에 따라서는 이 책들도 다시 볼 수 있겠지만 이미 나의 관심사가 철학과 전과후 과도하게 집중적으로 변한 탓에 저 책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손에 잡히지 않을 듯 하다. 이렇게 분류된 책들은 나의 책상에 달린 책꽂이 꼭대기에 올라가 이제는 나의 시선에서도 벗어났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이 책들을 어디 기증을 하거나, 요즘 유행타기 시작한 '프리유어북 운동'에 내놔 방생을 하거나, 둘다 아니라면 다음번 이사갈 때 버려질 듯 싶다.

다음으로 이미 본 책들, 하지만 앞으로도 다시 읽을 확률이 높은 책들은 모두 한꺼번에 모아 일층은 세로로 정상적으로 세워 꽂고, 공간부족으로 인해 나머지 책들은 옆으로 뉘어 세로로 꽂힌 책들 위에 가지런히 쌓아놨다. 여기에 해당하는 책들은 <체 게바라 평전>, <선의 나침반>,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장미의 이름>, <코드훔치기>, <오만과 편견> 등 소설, 비평, 평전, 에세이, 자서전 등 다양하다.

세번째로 아직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지 않은, 하지만 앞으로 천천히 참고서적으로서 계속해서 볼만한 책들, 가령 코플스톤의 <그리스 로마 철학사>, <합리론>, <경험론>라든가, 요한네스 휠스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플라톤의 <국가>, 풍우란의 <중국철학사> 등 주로 철학사에 해당되는 책들이다. 이렇게 분류된 책들은 나와 제일 가까이에 있는 책상 위에 나란히 꽂혀있다.

마지막으로, 위 세 가지 유형에 속하지 않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은 나의 책상에 붙은 책꽂이 이층과 삼층, 그리고 옷장 옆에 있는 4층짜리 조그마한 책꽂이 이층부터 사층까지를 점하고 있다. 책욕심이 많은지라, 게다가 책과 음반은 반드시 사서 읽고 들어야한다는 생각에 그때그때 읽고픈 책들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까지 읽지 않은 책들이 많다. 음반이야 편안히 앉아 혹은 누워서 들리는대로 들으면 그만이지만, 책은 능동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탓에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읽지 않고 꽂아두고, 또다시 다른 책을 구입하는 행각을 반복해왔다. 지금은 자금난으로 그런 습관적인 행동조차도 조심스럽지만 군입대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탓에-그나마 한 아르바이트도 두달이 안되지만-그 돈을 모두 책에 쏟아부었던 것이다. 이에 해당되는 책들로는 <동양과 서양, 그리고 미학>,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제국>, <성의 역사>, <정의론>, <미국의 민주주의>, <불가사리>, <1968년>, <레닌> 등이 있다. 대부분 읽기 까다로와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보면 졸리는 딱딱한 책 중에서도 더욱 딱딱한 책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선뜻 꺼내읽지 않고 그저 눈요기감으로 바라보기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젠 하나하나 꺼내 읽어야지. 하지만 하루하루 서점에 진열되는 신간서적에서 눈을 뗄 수는 없는 터라 아주 가끔은 그들 중 하나를 집어삼켜야겠다. 아무리 자금난이라하지만 그 신간서적들이 내 손에 닿지도 않고 진열대에서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일은 도저히 두고볼 수가 없다. 마치 이렇게 말하니 내가 무슨 대단한 책벌레인양 비쳐진다. 이럴 때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많이 읽지는 않는다." 어쩌면 난 책읽기를 즐기기보다 책수집을 즐기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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