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보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나는 그 길을 걷고 싶은 사람이다.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고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사고영역을 넓게, 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준비를 위해서는 철학, 국문학,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 3총사가 필수적이다. 사고의 넓이, 깊이를 기르는데는 철학보다 좋은 것이 없으며, 그것을 말과 글로써 표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논리학(철학의 한 요소)과 국문학 만한 것이 없다. 말과 글에 있어 철학은 논리를 제공하고, 국문학은 올바른 단어사용이나 문장구조 등에 관한 지식을 제공한다. 또한 이러한 형식적인 준비가 끝났다면 세상을 바라보기에 앞서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것이 역사학이다. 역사학은 세계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서술하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를 예상케해주는 학문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토대가 세워졌다면 그 다음은 정치학과 사회학이다. 정치학과 사회학은 이러한 기초 위에 살을 붙여준다. 사회와 정치는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세상을 바르게 판단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회이고 정치인 것이다. 우리는 이 엇나가는 사회와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기초적인 토대로서 세운 철학, 국문학, 역사학과 같은 학문들로 현실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면 되는 것이다.

한가지 또 덧붙이고 싶은 것은 법학인데, 사실 우리사회에 있어 법은 기득권자, 권력을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바뀌어 온 것이 사실이다. 물론 법의 근본적인 취지는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지만 사소한 영역으로 들어서면 그것은 권력을 지키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법은 현실을 다스리는 기준으로서 작용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철학, 사학, 국문학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될 것이 아니라,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법으로 하자, 법이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하지만 법 이전에 법을 형성하게 한 더 근본적인 철학과 역사가 있는 것이다. 법의 가장 기초적인 자유, 평등, 인권과 같은 개념은 본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 법은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규준임에는 틀림없으나 법의 이념을 지킬 때에만 그러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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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이 나 모르게 나의 습관이나 행동양식 등을 따라하는 것을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 싫어한다.) 물론 어떤 사람이 나를 따라하려고 하지 않고 나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예외로 하고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이 나의 행동이나 습관, 흔적들을 보고서 그것을 익히고 따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과서에 내 나름대로 필기를 하고 체크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남이 내 방식을 보고 마음에 들어 따라하면 나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동안 공부를 해오며 습득해온 나만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자기 습관을 익히면 될터인데 나를 따라한다. 나는 이것이 매우 못마땅하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지금과 같은 나의 글쓰기 방식을 따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 또한 매우 불쾌할 것이다. 나는 나 나름대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방식이 있을텐데 남의 것을 왜 따라하느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그럼 넌 남의 방식 따라한 적 없느냐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어떤 분야에 미숙해 양해를 구하고 그들의 것을 배우거나 따라한 일은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정말 그것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그 '모름'을 인정하고 행한 일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내가 나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고 모르기 때문에 배우겠다는 것, 따라하겠다는 것과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사용한 것인양 행하는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후자의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속였고 남을 속였다.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라. 미숙하면 미숙하다 인정하라. 그렇기 때문에 남의 것을 배우고, 모방하고, 가져오겠다면 그 누구든 그를 따뜻이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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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우리사회의 논객들 각각은 그 나름대로의 글쓰기의 스타일이 있다. 강준만 교수 같은 경우는 글을 거침없이 쓰면서도 모든 사람이 알아듣도록 쉽게 쓰는 편이라고 알려져 있다.

나는 어떤가? 나는 글을 쓸 때 어떻게 쓰는가? 어렵게 쓰는가? 쉽게 쓰는가? 내가 글을 어려우면서도 쉽게 쓰려고 한다. 무슨 이상한 논리냐 할지 모르지만 할 말을 다 하면서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하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노력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말하려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지식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 다음에 내가 쓸 글에서 그만큼의 사람들에게 생경한 용어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쓰려고 한다는 것은 그것이 쉽게 쓴다는 말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논리적인 글은 사람들이 읽기에 한눈에 들어오는 글을 말한다. 거기에는 함정이 없다. 그냥 읽으면 바로 들어올 뿐이다. 그런면에서 논리적인 글은 쉬운 글이다.  

전에 나는 내 글쓰기 방식을 자유연상식 글쓰기라고 한 적이 있다. 즉 붓가는대로, 키보드위에 손가는대로 쓰는 글이란 말이다. 어떤 것을 쓰다가 다른 것이 생각나면 거기에 연관시켜 또 쓰고, 또 쓰다 다른 것이 생각나면 또 연관시켜 또 쓰고...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선에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글쓰기의 단점은 쓰면서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잊고 지나갈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끊어줄 필요가 있다. 자유연상식 글쓰기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편안한 글쓰기다. 그냥 따라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실을 가지고 미궁속으로 들어갔다가 실을 따라 미궁을 빠져나오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다. 그럼 내 글은 쉬운글? 어려운글?
결론은 쉬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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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글을 쓸 때 어렵게 쓰는 사람이 있고, 쉽게 쓰는 사람이 있다. 어렵게 쓰여진 글에는 보통 사회학적, 철학적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며, 외래어나 한자어의 사용이 잦다. 쉽게 쓰여진 글에는 가급적 한글전용으로 쓰려고 한 노력이 엿보이고, 어려운 외래어나 전문용어, 한자어는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둘 중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답하기는 어렵다. 글의 성격에 따라서 둘 중 어느 하나가 적합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렵게 쓰여진 글은 그것 나름대로, 쉽게 쓰여진 글은 그것 나름대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라면 쉽게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전문용어가 많이 들어가고, 한자, 외래어가 많이 들어간 글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글이고, 머리아픈 글이다.

그러나 쉽게 쓸 수 있음에도 어렵게 쓴 글은 좋은 글이 아니지만 어려운 용어를 들어가며 쓸 수 밖에 없는 글이 있기도 하다. 철학책이 가장 대표적이다. 철학자들은 일부러 그들만의 어려운 용어를 써가며 철학을 논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쓸 수 밖에 없고,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명석판명하게 드러내려면 그런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상의 용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야 했고 그것으로 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용어들이 시대를 지나오며 계속 해서 만들어지고 지금의 철학책처럼 알 수 없는 글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철학책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표면상 어렵게 보이지만 그 핵심 용어를 파악하고나면 그 구조가 쉽게 들어오는 것이 철학책이다.

그것은 어려우면서 쉬운 글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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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은 한국일보를 구독하고 있다. 지금의 기억으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조선일보를 봤었다. 그러다가 서울경제신문과 한국일보 두 가지 모두 월 10,000원에 구독할 수 있다기에 한국일보로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3학년때로 상당히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조선일보를 보건, 한국일보를 보건, 한겨레를 보건 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실 똑같다고 생각했다기 보다 그때까지는 세상 돌아가는 꼴(?)에 관심이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관심이 있었다면 그만큼 신문의 논조나 편집방향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정치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치인은 누구건 다 똑같이 못된 놈들이고 맨날 욕하고 싸움질이나 하는 녀석들이다 라고 주장하는 정치인 모두를 싸잡아 비판하는 부류이고, 또 하나는 분명 내 생각에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은데 저 정치인은 그렇지 못하다 라고 생각하는 자기 주관적 생각에 비추어 이에 합당하지 않은 의견을 제시하는 자들을 비판하는 부류이다.(후자는 내 의견과 다르다고 무조건 비판하는 부류와 평화와 자유, 평등 등의 보편적 이념 차원에서 옳지 못한 의견을 비판하는 부류로도 나누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대학 2학년때까지는 전자의 '싸잡아비욕하기파'에 속해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투표권을 거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소중한 한 표를 난 쓰레통에 버린 것이다.

위의 예는 정치의 영역에 국한 시키기는 했지만 그만큼 내가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서서히 한국정치문제, 경제문제, 국제적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각종 신문들의 '다름'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신문을 보면서 '글자'는 읽되, '내용'을 읽지 못한 문맹이었던 것이다.  

이제 눈을 뜬 나는 주된 몇몇 신문들을 보고서 나름대로 그것을 분류하는 기준이 생겼다. 이는 나보다 먼저 눈 뜬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먼저 한 부류는 보수적 시각으로 쓰여진 '조선''중앙'동아'일보이다. 이 세가지 신문의 특징을 말하자면 먼저 조선일보는 자칭 대한민국 1등 신문이라는 둥, 할 말은 하는 신문이라는 둥 외치고 다니고 있다. 할말은 하는 신문이라... 이에 대해 전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할말은 하는 신문'이 아니라 '못 할 말을 하는 신문''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는 신문'이라 평했다. 개인적으로 이는 아주 적절한 지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조선일보를 보고있노라면 마치 하나의 소설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어쩜 그리도 잘 짜맞추고 있는 말 없는 말 조각조각 잘 끼우는지. 그런데 그것이 순수하게 정말로 소설이라면 문제가 될게 없겠지만 사실을 소설화시킴으로써 국민을 우롱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조선일보를 보는 국민들은 대다수 그들의 논조에 '길들여져' 소설을 사실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둘째로 중앙일보. 중앙일보에서는 조선일보와 같은 감수성(?) 깊은 소설과 같은 느낌은 받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극단적 시각이 들어가 있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에, 정부가 추진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그들은 극단적 비판을 일삼고 있다. 그것이 전혀 비판받을 개재가 없는 단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정부비판의 수단으로 삼는다. 그러나 우매한 군중 중에서도 극히 우매한 군중(단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관심이 있는 군중에 한함)이 아니라면 그들의 기사를 보면서 매사에 극단적인 그들의 논조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1등 신문이 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셋째로 동아일보. 사실 동아일보에 대해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위 두 신문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는 특징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수우익의 논조를 가지고 있음은 더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다음 부류는 한국일보 등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신문이다. 한국일보를 보면서 느낀 것은 모든 사안에 대해 항상 양쪽 모두의 의견을 실으려 한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객관적이면서도 어찌보면 주관이 없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이들의 생존전략인지도 모른다. 간혹 한국일보 사장의 개인적인 견해에는 객관적인 듯하면서도 결국은 보수우익의 손을 드는 미묘한 글로써 한국일보를 중도우파로 끌어가려는 장치가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한국일보는 객관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라 함은 사안의 타당함, 옳음과는 상관없이 그 사안에 대해 편이 갈리는 양쪽의 주장을 담고 있음을 말한다. 고종석씨나 박래부 편집위원의 글은 반대편에서 신문의 논조를 이끌며 중립을 유지해준다.

마지막으로 한겨레와 같은 진보적 신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홀로 진보의 길을 걸으며 외로운 투쟁을 하는 신문이다. 어떤 이는 그들이 진정 진보적이냐 라며 아직 멀었다고 외치기도 하지만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이 시대의 진보를 내세우는 이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민, 억압받는 소수의 사람들을 위해 싸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겨레를 가장 좋아한다.

여기서 그런데 왜 너는 한국일보를 보느냐?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게다. 나는 한국일보와 한겨레 모두 보고 싶다. 그러나 집안 경제적 사정상 한 가지만을 봐야하고 서울경제신문을 보는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한국일보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한국일보를 보는 것은 아니다. 조중동을 볼 바에야 한국일보같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보여주는 신문을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한국일보를 읽으면 조중동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가능하며 또한 한겨레가 이 사안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다루었겠구나 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여담이지만 한겨레는 어머니께서 가끔씩 공짜로 가져오실때도 있고, 학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한겨레신문이기에 굳이 둘다 구독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즉 나는 지금 주어진 환경 속에서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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