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공리주의자 밀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배고픈 인간이, 만족스러운 바보가 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라는 말의 원형이다.

공리주의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벤담을 필두로 한 양적 공리주의와 위에 언급한 밀의 질적 공리주의인데, 벤담은 쾌락은 오직 한 가지며, 질적차이는 없고 양적 차이만 있다는 주장을 하고, 밀은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된 밀의 문장은 질적인 쾌락을 추구하자는 주장의 다른 말이다.

흔히 '쾌락주의자' 라고 하면 연상되는 것이 날라리다. 과거의 고급날라리의 대명사 '오렌지족', '낑깡족' 등이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음식, 그리고 밤바다 원나잇스탠드를 즐기는 그들이 '쾌락주의자'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벤담식 쾌락주의고, 그와 다른 밀의 쾌락주의도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밀의 소크라테스와 돼지에 비유된 발언은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에 무게가 들어가 있다. 물질을 향유하기보다 정신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밀식의 쾌락주의자들로는 아마도 산사의 스님들을 비롯한 정신수양에 힘쓰는 종교인들, 배굶는 생활을 하지만 진리를 위해 바른 소리를 내는 시인, 소설가, 비평가들을 비롯한 지식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이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그런면에서 나는 벤담보다는 밀에 매우 가까운 놈인 것 같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어설프게나마 그려본 나의 미래 가정을 이끌어갈만한 약간의 여유가 있는 재산만 주어진다면 나는 진리를 위해, 문화예술을 위해 살 의향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유있는 재산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마도 나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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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의 동력은 물질적 동기와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에서 나온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한테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기 원한다.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불행을 느끼고 의기소침해지며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는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오랜 기억에 의거하건대, 종로의 한 대형서점에서 바라본 이 책은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긴 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시간적, 물질적 여유도 없거니와 '읽고 싶은 책'의 목록에서 상당히 뒤로 쳐져있는 책인지라 내가 이 책을 정식으로 읽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 하다.

어쨌건 각설하고, <역사의 종말>의 한 부분을 발췌해 떨궈놓은 위 글은 내게는 우선적으로 철학자 헤겔을 연상시킨다. 다음은 상명대 불어불문과 박정자 교수의 홈피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우선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이다」라는 명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대상을 지향하는 그 어떤 의식도 실은 자기 의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며, 이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복귀, 통일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인데, 헤겔이 의식 중에서 최고의 단계로 본 이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확신」과 「지각」, 「오성」의 3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단계에서는 대상의 존재를 감성적으로 확신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대상의 성질을 지각하며, 셋째 단계에서는 대상 세계의 법칙을 인식한다. 이 3단계가 모두 대상에 대한 의식이며, 이 대상의식(헤겔은 이것을 그냥 「의식」이라고 부른다)은 아직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성에 사로잡힌 대상지향적 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자기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가? 헤겔은 인간의 의식 자체가 자기의식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주체가 대상을 지향하는 이유는 대상을 자기것으로 구성하려는 「자기에 대한 궁극적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타인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이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인정하는 것이고, 타인을 증오하는 것은 타인 속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을 증오하는 것이다. 즉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세계 속에서 만나는 타인 역시 또 다른 자기의식이다. 두 자기의식이 마주 보는 최초의 상태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인정만을 구하는 두 자기의식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정(認定)투쟁이다. 이 투쟁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하나의 자기의식이 또 다른 자기의식을 마주볼때 그 사이에는 즉각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중 하나의 자기의식은 탈자(脫自) 상태에 빠져 자기자신을 상실한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존경하거나, 상대방의 권위에 눌려 꼼짝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제 그의 본질은 타자에 달려있고, 타자가 그를 지배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렇게되면 원래의 자기의식은 고양되기 전의 의식 차원으로 다시 떨어지고, 타자에게 예속된다. 이렇게 타자에게 예속된 자기의식은 그러나 탈자(脫自)되는가 싶은 순간에 타자를 지양하여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한다. 즉 타자를 본질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식 차원에 떨어졌던 자기는 다시 자기의식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때 반대로 상대방이 이쪽의 자기의식에 예속된다면 두 자기의식의 관계는 영원한 지배-예속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기의식은 타자를 자기와 대등한 자기의식으로 인정하고 또 자기도 그렇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된다. 자기의식은 원래 타자 속에서 자기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자기의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존재를 자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 상대방 속에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했던 이쪽의 자기의식 역시 실체적 존립을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일방적인 타자 지양은 있을 수 없고, 나의 완전무결한 존재는, 나와 완전히 대등한 또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됨으로써만 보장된다. 헤겔의 그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해방함으로써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노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앞에서 본, 자기의식의 순환 운동에 의해 그가 역으로 예속당하여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참된 자유는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타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또 나에 의해서 자유로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Hegel, Enzylop die der philosophieschen Wissenchaften, p.198) 내가 인정 받으려 하면 타자도 마찬가지로 인정 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실체적 존립기반을 타자에게서 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인정 받기 위해서는 타자를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 타자 부정은 자기 부정이고, 타자 긍정은 자기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을 살펴보건대 아마도 후쿠야마의 인정욕구에 대한 발언은 그보다 한참 전의 시대를 살았던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나는 후쿠야마와 헤겔이 말하는 '인정욕구'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구는 다양하다. 식욕, 성욕 등의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를 비롯하여 명예욕, 지식욕, 창작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구가 존재한다. 인정욕구는 그중 명예욕과 쉽게 연결지어도 무방하다 생각된다. 명예욕이라는 것이 범위가 커 지식욕이나 창작욕 등의 것들이 명예욕의 집합 안에 포함되는 원소로 볼 수도 있겠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욕구가 있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노력에 따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면 거기서 목표에 실패한 이들로부터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려하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은 개인은, 인정욕구의 결과 행복을 얻는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붙어 아양을 떨거나 입에 발린 발언을 통해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추구하는 뭔가를 내가 성취함으로써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이었고, 몇몇 분야에서 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단 한번도 떨어지지 않는 성적으로 전교 1등의 목표를 달성하여 공부 잘하는 놈으로 인정을 받았고, 대학에 와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함으로써 드럼연주로써 여타 드러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내 실력이 학교 바깥 세상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학교 내에서는 적어도 인정을 받았다. 그 외에도 내가 시도하는 분야는 몇몇 가지가 있으나 아직 그들 분야에서는 남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내 성격을 좀더 사교적으로 바꿔보려 노력중이지만 아마도 선천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자존심세고, 홀로있음을 즐기는 편인 나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과연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예상컨대 크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본다.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해오던 인정투쟁을 계속해야한다. 내가 원하는 여러 분야에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그들은 나를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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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며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건드리더니 지하철 노선표를 눈 앞에 갖다대며 경북궁으로 가려면 어느쪽 지하철을 타야하냐는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내 앞을 가리켰는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이런....

외국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나한테 영어로 물었나? 왜 못 들었지?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This' 그랬더니 알았단다.

흠... 이 열차를 타고 두 정거장 후에 내려야된다고 말하고 싶은데 영어가 안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걍 책만 봤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드는 생각은...

"한국에 왔으면 한국어로 물어봐."
그 자리에 있는 사람중 하필 책을 보며 열중하고 있는 나를 건드릴건 뭐람. 아무래도 젊은 학생이니 영어를 할 줄 알겠다 싶었나? 그 사람에게 악한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내가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바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어도 못하냐~ 라는 식의 핀잔을 주는 것이 일반화된 반응인데 나는 그 반응이 못마땅하다. 난 한국에 살고 있고 한국말을 할 줄 안다. 다른 나라 사람이 한국에 온다면 한국어를 하던가 아니면 바디랭기지를 하면 된다. 이들에게 영어로 보답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할 줄 알고 더한 친절을 베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영어를 못하는 것이 죄는 아니란 말씀. 아무리 국제화 시대라고 하지만 영어를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에스페란토어'를 하자.


아래 글은 한겨레21 504호 참조

에스페란토어
자멘호프(1859-1917) 박사가 1887년 바르샤바에서 발표한 세계 공통어를 지향하는 국제어이다. 그가 태어난 폴란드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여러 민족이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의사소통이 어려워 민족간 불화와 갈등이 빈번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중립적인 공통어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유럽 언어의 공통점과 장점을 활용해 규칙적인 문법과 쉬운 어휘를 기초로 에스페란토어를 창안했다. 에스페란토는 말이 같은 민족사회에선 그 민족어를 사용해 발전시키고, 말이 서로 다른 국제관계에서는 에스페란토를 쓰자고 주장한다. 현재 120여개 나라에 사용자가 산재해있고, 이들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본부를 둔 세계에스페란토협회를 기점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20년 김억에 의해 보급되기 시작해 한국에스페란토협회와 주요 도시에 그 지부가 조직돼 있고, 단국대학교와 원광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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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철이 되면 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는 후보에게 한 표를 던진다. 경제적으로 상류층보다는 빈곤층에 가까우면서도 신자유주의를 토대로 한 재벌과 기득권 세력들의 배를 살찌우는 정책을 내세우는 당을 지지한다. 소위 하루 벌어 먹고 살아 가는 사람들, 그렇지는 않더라도 일년내내 생업에 종사해야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색깔이란 사실 중요치도 않고, 그다지 뚜렷하지도 않다. '서민'이라 불리우는 그들에게는 정치적 사상보다는 서민층, 빈곤층에 도움이 되는 경제정책이 가장 절실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정책을 내세우는 당에 지지를 보낸다.

우리집은 내가 보기에 중산층이라기보다는 그 아래에 해당되는 듯 하다. 소위 중산층이라는 계층은 그래도 어느 정도 약간의 여유를 가지고 차도 굴리며 다양한 문화생활의 혜택도 누리는 사람들을 일컫는 듯 한데, 우리집은 비싼 기름값 대가며 자동차를 굴릴 형편도 아니고, 가끔씩 영화관람에 지출하는 돈도 아까워하며, 또 그다지 경제적으로 희망적인 내일보다는 암담한 내일이 기다리고 있는 집이다. 중산층이라기엔 너무나 어둡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모님 두 분은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까지는 아니더라도 열린우리당을 지지하지는 못할 망정, 한나라당을 지지한다(경제정책면에서 사회당, 민주노동당, 열린우리당, 민주당, 한나라당 순으로 좌에서 우로 갈수록 기득권 계층을 위한 정책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최근의 언론을 통해 흔히 알 수 있는 사실이라 구체적으로 열거하지는 않겠다).

한나라당은 가장 많은 보수 기득권 세력들을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당이고, 내세우는 정책 또한 서민층보다는 상류층의 사람들에게 더욱 이익이 된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이제껏 한나라당을 지지했다. 그들에게 표를 줌으로써 오히려 경제정책은 상류층의 배를 불리고 서민층은 죽어나는데도 부모님은 그들을 지지한다.

가지고 있는 기득권은 커녕 살아가기에도 급박한 현실에 놓여있는데 서민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가진 정당을 지지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정당을 지지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더욱 불행한 현실은 나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돈 없고 백 없는' 많은 사람들이 선거때가 되면 이와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지역주의적 경향이 강해서일까? 그 점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어느 지역에도 연고가 없는 서울토박이인데다 사상적, 정치적 색깔도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의 부모님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난 나의 부모님과 같은 분들께 말하고 싶다.

정말 현재의 당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원한다면 내가 이 나라 계층구조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를 판단해보고 당신에게 맞는 정당에 표를 던져라. 정치, 사상, 지역을 떠나 당신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힘겨운 지금의 현실에서 좀더 나은 미래를 찾아보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모든 조건을 떠나 오로지 정당의 정책만을 보고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당에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느 정당이 몇 억을 해먹었다느니, 어떤 정치인이 어떤 발언을 했다느니 하는 언론의 보도는 무시하고, 오로지 당신의 현실을 생각하고 투표를 하라. 매번 당신은 그들(기득권, 상류층의 배를 살찌우는 정책을 내세우는 집단)에게 표를 행사하고 뒤돌아서 시간이 지나면 이 나라가 서민들 죽인다며 불평불만 늘어놓고는 한다. 그것은 선거때 당신이 던진 표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만약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거든 선거 할 때 제대로 된 투표를 하라. 그것이 당신의 삶을 좀더 나아지게 하고, 스스로 불평불만을 잠재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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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타인의 자유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은 타인의 현존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재인하는 활동들이다. 노예로서 있는, 즉 노예화되어 있는 기분은 내가 나의 가능성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타인의 눈길이 섬뜩한 까닭은, 그 자신은 나의 눈길에 의해 조준되어 있지 않은 채, 그의 눈길이 나를 조준하면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고정시키고 나를 사물처럼 응고시켜버린 뒤, 나를 자신의 세계 속,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 앉혀놓는다. 내가 그 자리를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내가 더 이상 세계 속의 사물들과의 거리들을 펼쳐놓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타인에 의해 펼쳐진 거리들 속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 <사르트르>, 발터 비멜 저, 구연상 역, 한길사, 1999


사르트르는 누군가가 나를 보는 행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입이 떡 벌어진다. 단지 나와 누군가가 만나고, 그가 나를 바라보는 행위에 대해 저런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저런 사고를 한다는 것도 대단하다. 행위로 보자면 단순히 '바라봄'의 행위일 뿐인데, 그에 대한 사색의 깊이는 엄청나다. 철학이란 이런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상적인 우리들의 몸짓 하나하나에서도 깊이 있는 성찰을 찾아볼 수 있는 것! 그래서 난 철학의 매력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사색함을 즐기기에... 무엇인가를 골똘이 생각하는 것을 즐기기에... 그러다보면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새로운 사고들이 떠오른다. 거기서 난 외친다.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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