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역사의 동력은 물질적 동기와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에서 나온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한테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기 원한다. 공동체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불행을 느끼고 의기소침해지며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는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을 직접 읽은 것은 아니다. 아마도 오랜 기억에 의거하건대, 종로의 한 대형서점에서 바라본 이 책은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고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긴 하지만 내게는 그럴만한 시간적, 물질적 여유도 없거니와 '읽고 싶은 책'의 목록에서 상당히 뒤로 쳐져있는 책인지라 내가 이 책을 정식으로 읽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듯 하다.

어쨌건 각설하고, <역사의 종말>의 한 부분을 발췌해 떨궈놓은 위 글은 내게는 우선적으로 철학자 헤겔을 연상시킨다. 다음은 상명대 불어불문과 박정자 교수의 홈피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은 우선 「의식의 진리는 자기의식이다」라는 명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대상을 지향하는 그 어떤 의식도 실은 자기 의식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며, 이 의식은 자기의식으로 복귀, 통일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의식이란 자기에 대한 의식인데, 헤겔이 의식 중에서 최고의 단계로 본 이 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감성적 확신」과 「지각」, 「오성」의 3단계가 필요하다. 첫째 단계에서는 대상의 존재를 감성적으로 확신하고, 둘째 단계에서는 대상의 성질을 지각하며, 셋째 단계에서는 대상 세계의 법칙을 인식한다. 이 3단계가 모두 대상에 대한 의식이며, 이 대상의식(헤겔은 이것을 그냥 「의식」이라고 부른다)은 아직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감성에 사로잡힌 대상지향적 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이 어떻게 자기의식으로 고양될 수 있는가? 헤겔은 인간의 의식 자체가 자기의식의 속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주체가 대상을 지향하는 이유는 대상을 자기것으로 구성하려는 「자기에 대한 궁극적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타인을 알고자 하는 것은 나를 알기 위함이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나를 인정하는 것이고, 타인을 증오하는 것은 타인 속에서 발견한 나의 모습을 증오하는 것이다. 즉 주체와 객체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의식이 세계 속에서 만나는 타인 역시 또 다른 자기의식이다. 두 자기의식이 마주 보는 최초의 상태는 일방적으로 자기의 인정만을 구하는 두 자기의식의 투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인정(認定)투쟁이다. 이 투쟁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우선, 하나의 자기의식이 또 다른 자기의식을 마주볼때 그 사이에는 즉각 지배와 예속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중 하나의 자기의식은 탈자(脫自) 상태에 빠져 자기자신을 상실한다.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존경하거나, 상대방의 권위에 눌려 꼼짝 못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제 그의 본질은 타자에 달려있고, 타자가 그를 지배하는 자로 나타난다. 이렇게되면 원래의 자기의식은 고양되기 전의 의식 차원으로 다시 떨어지고, 타자에게 예속된다. 이렇게 타자에게 예속된 자기의식은 그러나 탈자(脫自)되는가 싶은 순간에 타자를 지양하여 그것을 자기화(自己化)한다. 즉 타자를 본질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식 차원에 떨어졌던 자기는 다시 자기의식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때 반대로 상대방이 이쪽의 자기의식에 예속된다면 두 자기의식의 관계는 영원한 지배-예속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자기의식은 타자를 자기와 대등한 자기의식으로 인정하고 또 자기도 그렇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된다. 자기의식은 원래 타자 속에서 자기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한다. 다시 말해서 타자를, 자기의 존재를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상대방의 존재를 자립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 상대방 속에서 자신의 존립 기반을 추구했던 이쪽의 자기의식 역시 실체적 존립을 잃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의식의 일방적인 타자 지양은 있을 수 없고, 나의 완전무결한 존재는, 나와 완전히 대등한 또다른 자기의식에 의해 인정됨으로써만 보장된다. 헤겔의 그 유명한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이 바로 그것이다. 주인은 노예를 해방함으로써만 진정 자유로울 수 있다. 노예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 앞에서 본, 자기의식의 순환 운동에 의해 그가 역으로 예속당하여 노예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참된 자유는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타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또 나에 의해서 자유로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만 나는 참으로 자유롭다」(Hegel, Enzylop die der philosophieschen Wissenchaften, p.198) 내가 인정 받으려 하면 타자도 마찬가지로 인정 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실체적 존립기반을 타자에게서 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인정 받기 위해서는 타자를 인정해 주어야만 한다. 타자 부정은 자기 부정이고, 타자 긍정은 자기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을 살펴보건대 아마도 후쿠야마의 인정욕구에 대한 발언은 그보다 한참 전의 시대를 살았던 헤겔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나는 후쿠야마와 헤겔이 말하는 '인정욕구'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욕구는 다양하다. 식욕, 성욕 등의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를 비롯하여 명예욕, 지식욕, 창작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욕구가 존재한다. 인정욕구는 그중 명예욕과 쉽게 연결지어도 무방하다 생각된다. 명예욕이라는 것이 범위가 커 지식욕이나 창작욕 등의 것들이 명예욕의 집합 안에 포함되는 원소로 볼 수도 있겠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욕구가 있기에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자신의 노력에 따라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으면 거기서 목표에 실패한 이들로부터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려하는 것이다. 공동체로부터 인정을 받은 개인은, 인정욕구의 결과 행복을 얻는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붙어 아양을 떨거나 입에 발린 발언을 통해 그들과 친해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이 추구하는 뭔가를 내가 성취함으로써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끔 만드는 것이었고, 몇몇 분야에서 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단 한번도 떨어지지 않는 성적으로 전교 1등의 목표를 달성하여 공부 잘하는 놈으로 인정을 받았고, 대학에 와서는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함으로써 드럼연주로써 여타 드러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내 실력이 학교 바깥 세상에서는 그다지 훌륭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지만, 학교 내에서는 적어도 인정을 받았다. 그 외에도 내가 시도하는 분야는 몇몇 가지가 있으나 아직 그들 분야에서는 남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의 실력이 되지 않는다. 노력은 현재진행형이다.

내 성격을 좀더 사교적으로 바꿔보려 노력중이지만 아마도 선천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자존심세고, 홀로있음을 즐기는 편인 나는 후천적인 노력으로 과연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예상컨대 크게 바뀌지는 않으리라 본다. 따라서 나는 지금까지 해오던 인정투쟁을 계속해야한다. 내가 원하는 여러 분야에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 그들은 나를 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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