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영화를 관람하는 개인의 의식, 정신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예전에 영화 '친구'가 개봉되고 큰 성공을 거둬 많은 이들이 영화를 봤다 싶을 쯔음 한 사건이 터졌다. 이 영화를 본 어떤 고등학생이 자신의 친구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다. 그 고등학생은 인터뷰에서 영화를 보고는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는데, 이는 곧 영화가 살인충동을 불러일으켰다는 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영화는 분명 우리네 개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에 대해서는 서로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이들이 많이 뭐라 단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실제로 그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독일에서 '몰락'이라는 영화가 개봉되고 난 뒤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 영화는 '히틀러'를 다룬 것으로, 히틀러의 잔인한 면모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이 영화는 "전후 세대의 젊은이들이 전쟁 범죄자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 보도록 오도하는 영화"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인 것은 독일에서는 이 영화에 대해서 70%가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뭇 이웃나라 프랑스의 우려와는 대조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영화 '몰락'은 독일인의 의식에 영향을 미친 것인가? 모를 일이다.

 독일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고 난 뒤 무너진 국가가 되어 이후 국제사회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지금에 와서는 독일의 위상이 꽤 높아졌다고 하지만 과거의 독일과 비교해봤을 때 아직 독일이 그들 스스로 생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는 독일 국민들의 마음속에도 1, 2차 대전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자기네 나라의 위상이 떨어진 것에 대해서 억눌린 감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속으로는 우리는 위대한 게르만 민족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 이를 표출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인간적으로 다룬 '몰락'이라는 영화는 이들의 가슴 속에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았나 싶다. 히틀러가 분명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면서 가슴으로는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더불어 히틀러를 가슴으로 정당화시킴으로써 독일 국가 자체에 대한 위상을 높이려 하는 마음이 이 영화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70%에 이르게 한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 또한 가슴으로는 이들의 그 열망에 공감하지만, 머리로는 이들의 이러한 시각이 위험다고 생각한다. 이는 자칫 '위대한 게르만 민족주의'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긋난 민족주의는 지나친 민족 우월감을 불러오고, 다른 민족은 열등하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민족을 지배해야한다는 인식을 불러올 수 있다. 그래서 난 저들의 시각이 두렵다.

 "민족의 핵심은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이며, 동시에 전 소속원들이 많은 것을 망각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라는 에르스트 르낭의 말처럼 독일은 자신의 과거를 망각한 채 많은 이들이 히틀러를 인간적으로 부각한 영화 '몰락'을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게르만 민족임을 느끼고 싶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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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사람을 잘 모른다. 하지만 이 사람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사회적 지위를 봤을 때 이 사람이 내뱉은 발언이 위험하다고 판단했기에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개신교 감리교 최대 교회로 알려진 서울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최근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영혼 사랑'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이번 "서남아시아의 지진해일로 희생된 사람들은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김홍도 목사는
 
 "8만 5천명이나 사망한 인도네시아 아체라는 곳은 3분의 2가 모슬렘교도이고 반란군에 의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학살당한 곳이며, 3만-4만명이 죽은 인도의 첸나라는 곳은 힌두교도들이 창궐한 곳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고 예배당이 불탔다."

 "태국의 푸켓이라는 곳은 많은 구라파 사람들이 와서 향락하고 음란하고 마약 먹고 죄짓는 장소로 쓰인다"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성탄절 주일에 놀러 가겠느냐. 푸켓에 구라파 사람들이 많이 왔다가 죽었는데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은 하나도 안가. 혹시 그렇다면 하나님이 특별히 건져 주시지."

 "그전 같으면 사형선고를 받거나 무기징역형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다수 국회에 들어가 국가보안법을 페지하여 이 나라를 공산화시키려 하고 있다"

 는 등의 인도네시아 해일 사태를 비롯 국가보안법에 대해서까지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난 이전까지 한국기독교총연맹(?)의 조용기 목사만이 이런 발언을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와 비슷한 자가 또 있다니, 난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기독교를 믿는 이들, 특히나 이 사람들 밑에서 설교를 듣는 이들이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이들로 인해 선량한 다수의 기독교인까지 피해를 볼까 싶어 두렵다.

 난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에 바탕을 둔 선량한 행위들을 많이 보아왔고, 내 주변의 기독교인들로 인해 이들이 정말 순수하고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내 안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간혹 가다 신문에서 조용기 목사나 김홍도 목사와 같은 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기독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올라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물론 이들과 다른 다수의 좋은 기독교인들을 동일시해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기독교를 모른다. 그러나 얼핏 들은 바로는 기독교에서는 원수도 사랑하고, 이웃의 사람들의 불행을 지나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저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저들은 오직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를 비롯한 여타 종교들은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세상에 벌어지는 많은 좋지 않은 사건들에 관련된 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나 보다. 그런데 의문 나는 점이 있다.

 왜 기독교인들이 많이 몰려있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각종 범죄들이 일상다반사가 되어 터지는 것일까. 작은(?) 총기난사사건이나 강도사건 등을 비롯해서 엄청난 피해를 준 911테러사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범죄 혹은 각종 사건으로 사망하는 자들이 많은 나라다. 언제나 연설 때면 기독교, 하나님과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며 강한 주장을 펴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나라가 왜 가장 큰 피해를 보는가? 난 이점이 참 의문스럽다.

 김홍도 목사의 주장에 비춰보면 아마도 저들은 기독교인을 내세우지만 진실한 기독교인이 아닌가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벌주나보다. 난 이런 결론 밖에는 도출하지 못하겠다. 내가 논리공부가 부족해서인가?

 기독교인은 사람이고, 다른 이들은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자기네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종교는 다 같다. 그 중 어느 것이 실제로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 다른 것은 진리를 갖고 있지 않은지를 논쟁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자신의 마음 속에 종교를 가지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자들은 모두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다를지언정 그들 개인의 마음은 모두 같다. 그래서 종교를 믿는 자들은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조심하게 되고,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이 많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다르지 않다. 그들이 부르는 신은 모두 이름이 다르지만 그들이 믿는 신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다. 물론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점 또한 부인하겠지만 말이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나의 가까운 이웃부터 살피고, 멀리는 나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자들, 나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자들, 나와 상관없는 곳에 있는 자들까지도 포용하고 감쌀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게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닌가? 그래서 기독교 단체들이 우리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 멀리는 아프리카 난민들의 기아걱정까지 해주는 것 아닌가? 난 그렇게 생각한다.

 모든 종교인들은 나와 다른 이들까지도 내 팔로 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김홍도 목사와 같은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한대로 '진실한 기독교인'이 아니다.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가장 큰 교회를 움직이고 있다고 해서 그가 더욱 대단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그가 입고 있는 껍데기를  설명해줄 뿐이지, 그의 마음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는 다른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앞으로 천국으로 가야할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천국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가 천국에 가기는 갈 수 있을까? 난 이것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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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는 이제는 누구나 들어봤을 만한 문구가 되어버렸다. 이는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래 기원은 초기 로마 사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로마 사회에서 사회 고위층 인사들의 봉사, 기부, 헌납 등의 행위는 의무이면서도 자신들의 명예와 동일시 되면서 이들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앞의 노블레스는 명예를, 뒤의 오블리제는 의무를 의미한다. 즉 명예에 걸맞는 의무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과거로부터 오늘날까지 이 말은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 현실에 적용되는 일은 드물었다. 물론 실제로 자신이 누리는 명예에 걸맞는 의무를 다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2004년의 마지막 역대 최대피해의 지진해일 피해 복구를 위해 세계 각국의 스포츠인, 영화배우들이 작은 국가들이 내놓은 것과 맞먹는 피해복구비용을 내놓았다. 물론 유명한 인물들 중 극히 일부분만이 자신의 지갑을 열었지만 이들은 누구보다 노블리지 오블리제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사회로 눈돌려보면 배우 배용준도 일본 지진사태피해 때, 그리고 이번 인도네시아 지진해일 피해 때도 수억씩 내놓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물론 최근의 예 외에도 이전부터 우리사회에도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이들은 많다.

 그런데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커녕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조차 지려하지 않는 이들도 다수 눈에 띈다. 그것도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이들이 말이다.

 1월 5일자 일간 신문에는 '사기전공 변호사'라는 제목의 커다란 박스기사가 하나 실렸다. 내용은 이러하다. 사법고시를 패스해 변호사가 된 A씨가 구속자 석방을 미끼로 사건 의뢰인으로부터 거액을 받아 가로채고, 부동산개발 수익을 내세워 투자자를 모집 이들로부터 돈을 챙겨 달아났으며, 도피생활 와중에도 이를 숨기고 김모씨와 재혼을 해 새로운 사기대상을 찾아왔다. K대 법대를 졸업했다고 알려진 그는 변호사라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이용해 온갖 사기행각을 해온 것이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직업임에 틀림없다. 또한 단지 '높은 지위'라는 면 이외에도 변호사는 의당 법을 다루는 자이기 때문에 몸소 법을 실천해야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법을 실천해야할 그가 되려 법을 위반하는 각종 사기행각을 펼쳐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성마저도 저버린 한갖 사기범으로 변신했다. 이는 애초 도덕성을 겸비하지 못한 채 머리만 좋은 그가 법조문 달달 외워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라는 간판을 얻어낸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

 사법고시뿐 아니라 다른 여타 온갖 자격을 주는 시험들이 개인의 인간성과 인격, 성품을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고, 좁은 관문을 통과한 이들 중 소수의 문제있는 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온갖 짓을 다 하고 다니고 있다. 시험을 통해 개인의 성품과 인격을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짧은 면접을 통해서도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2박 3일, 10박 11일 등의 기간을 두며 장기간에 걸쳐 관찰을 한다는 것도 힘들고, 이 과정에서조차도 이들의 인격과 성품을 검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럼 이들을 어떻게 걸러내야하는가?

 처음부터 인격, 성품을 다듬는 교육을 시켜야한다. 개인의 인격과 성품이란 단기적으로 스파트라식으로 주입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시험에 임하는 공부와는 다르다.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계속해서 끊임없이 스스로가 사유하고 공부함으로써 올바른 마음 자세를 가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국가자격시험에서 이를 시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릴만한 이들을 미리 내정해서 이들을 교육하고 인격함양에 수양토록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해결책은 이외로 쉬운 데 있다.

 어릴때는 누가 어떤 인물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을 아이를 찍어내서 인격훈련을 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이는 교육의 형평성 면에서도 옳지 않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라면 모를까(주 : 플라톤은 <국가>라는 대화편을 통해 '철인정치' 즉 철학자의 정치를 주장했으며, 이때의 철인은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고, 마지막으로 높은 도덕성을 갖춘 인물을 뽑음으로써 최종선발된 자이다. 플라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에 맞는 일들 시키는 것이 옳다고 보고 자신이 하고픈 일과 상관없이 그저 각자의 능력에 맞게 능력이 부족한 자는 대장장이를 시키고, 능력이 되는 자는 교육자, 더 능력이 좋고 도덕적인 자는 국가를 경영하는 역할을 맡기도록 했다).

 따라서 아예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처음부터 인격수양에 정진하면 되는 것이다.  해결책은 의외로 쉬운데 있다. 모두가 도덕적이면 된다.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도덕성이 모두가 맹자가 말하는 성인(聖人)이 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기본적인,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도덕성을 키우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라면서 공부잘해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도달한 자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도덕성을 바탕으로 더욱 인격수양에 정신하면 될터이다. 애초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이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게 되면 그에 걸맞는 도덕성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겠지만, 기본적인 도덕성을 갖춘 자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도달하면 스스로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본다.

 결국 문제는 다시 교육이다. 교육을 함에 있어 어떤 것을 중시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번 언급했기 때문에 되풀이하는 것이 지겹고, 단지 오늘날의 교육은 '아니다'라는 점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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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새해를 맞이하여 노무현 대통령이 여러 장관을 새로 임명했다. 재직 중 수능부정파문사건이 있었던 안병영 교육부 장관 또한 온전하지 못했고, 대신 새로 전 서울대 총장이었던 이기준씨가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임명 하루전부터 심상치 않은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각종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 '이기준 교육부 총리 임명 철회'에 대한 강도높은 발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지금 이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도 한마디 내뱉는다.

 지금 이기준 교육부 총리 임명에 대해 논란이 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 문제다. 그 첫째는 총장 재직 당시 LG그룹의 사외이사를 겸임하며 수천만원을 챙겼다는 것이고, 그 둘째는 판공비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그 셋째는 아들의 병역문제논란이다. 1급 현역 판정을 받았으나 병무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이기준씨가 서울대 총장이 된 뒤에 한국에 돌아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공익근무 판정을 받고 병역이 끝난 직후 한국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으로 갔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그의 '도덕성'에 대한 시비로 모든 공직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교육부장관'직은 다른 직보다 더욱 개인적인 도덕성을 요구한다. '교육'의 문제에 관한한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이는 '교육=신분'이라는 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부와 권력이 없더라도 교육을 잘 받으면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진출로가 생긴다는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부모들은 오직 '교육'이라는 통로 하나만을 가지고 자식이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란다. 따라서 '교육'의 문제를 총괄 주관하는 교육부 장관은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기본적인 청렴함에 토대했을 때 이로부터 나오는 각종 교육정책 또한 믿을 수 있는 '공정'한 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곧 도덕성이 공정한 정책을 낳는 것이다.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의 문제는 또 있다. 그의 서울대 총장 재직시 무리한 대학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 그는 그런 이유로 총장직을 다 수행하지 못하고 중간에 사퇴한 경력이 있다. 내용인 즉슨 이렇다.

 그가 서울대 총장 재직시에 교육부 장관은 이해찬이었다. 이해찬씨는 당시 취임직후 대학원중심교육을 주장하며, 서울대, 연대, 고대 등 상위대학들이 따라줄 것을 요구했으나 연대와 고대를 비롯한 사립대들이 이를 따라주지 않자 서울대를 다그쳤고, 이기준 전 총장이 학부정원감축과 대학원중심교육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인문계열은 불필요한 부분으로 간주하여 인문학 정원을 감축하려다가 반발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의 행정 스타일이 밀어붙이기식, 불도저식이라는 점도 대화와 소통을 중시하는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을 뿐더러, 그가 인문학을 필요없는 부분으로 간주했다는 사실 또한 교육자로서 그의 생각이 의심스럽다. 무릇 교육의 근본은 인문학이다. 회사경영을 하든, 과학기술 개발을 하든,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든 간에 모든 학문의 근본에는 인문학이 깔려있어야 한다. 대학에서 1학년에 계열기초 혹은 필수교양이라 하여 철학을 가르치고 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심지어 이공계와 의대에도 윤리는 필수다. 각종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윤리의식의 부재를 외치면서 교육정책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윤리를 배제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인지 문제를 크게 만들자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의 책은 '인문학'을 가르킨다고 본다. 사람을 만드는 책은 책을 읽는 사람이 그 책을 읽고서 여러가지 깊이있는 사유를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전을 비롯한 문학, 철학, 역사, 인류학을 비롯한 인문학이다. 이런 책을 읽은 사람과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필경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차이가 과학적으로 혹은 통계적으로 입증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해서는 안된다. 사실적인 증거를 눈에 보여주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를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느끼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인문학은 개별 개체로서의 사람의 생각을 주도하고, 그 사람의 삶의 가치관과 양식을 만든다. 인성교육이란 인문학의 교육의 다름아닌 이름이며, 이를 무시하는 사회는 점점 거칠어질 수 밖에 없다. 단기적인 눈에 보이는 경제적 가치를 위해 학문을 육성해서는 안된다. 학문이란 무릇 멀리 보고 나아가야 하는 것으로, 옛부터 '백년지대계' 라고 하였다. 학문 정책을 주관하는 교육부 장관의 자리에 저와 같이 문제있는 자를 임명해서는 안될 것임은 더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확실하다.

 나는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가 지시하는 개별적인 사안들마다 다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당장 눈에 보이는 뭔가를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나 무릇 대통령이라면 나라의 장기적인 발전을 염두해두고 모든 일을 처리해야한다. 지금 당장 자신이 욕먹더라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낫다. 그게 대통령이 할 일이다. 한 번 결정된 사안이라고 해서 자존심 세우며 밀어붙일 필요 없다. 이미 결정했지만 여러 의견을 종합해 볼 때 아니다 싶으면 철회할 수도 있는 거다. 그게 대인의 길이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이기준 교육부 장관 또한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은 자명하다. 다음 임명자는 무엇보다 도덕성과 청렴함을 갖춘 인물이면서 교육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가진 자였으면 한다. 또 한가지 지적할 것은 매번 교육부 장관 임명때마다 대부분 서울대, 연대, 고대 총장들을 지목하는데, 이것이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서 이들 학교의 총장을 지목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이들이 그 자리에 부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난 모르겠다. 하지만 좀더 넓은 마당에서 사람들을 찾아봤으면 한다. 산 속에 숨어지내는 초야의 늙은 학자라도 데려올 수 있는 것이다. 장관 임명에 있어 좀더 신중한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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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컬티. 영어 Faculty는 능력, 재능, 기능 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교직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 영화제목의 패컬티는 후자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한 고등학교의 교직원들이 외계생물체에 의해 정신을 지배받으면서 전개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어느 행성에 살던 외계생물체는 행성에 물이 마르자 살 수가 없어 지구로 왔다. 이 생물체가 처음으로 머문 장소는 해링톤 고등학교. 재정난에 허덕이며 학생들의 뮤지컬로 올리지 못하고, 미식축구에도 넉넉한 지원을 하지 못한다. 학교 컴퓨터가 낡아 교체해야하나 이것도 그저 바램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윌리스 축구코치가 드레이크 교장을 살해하고, 숙주를 심었다. 이후 다른 교직원들에게도 외계생물체의 숙주가 자리잡고 이들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을 지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7명의 아웃사이더 학생들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 따로 모여 저들에 대항할 채비를 한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단순한 면이 없지 않지만 이 정도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나름대로 긴박감 있게 사건을 진행시켜 그다지 오락영화로서의 지루함은 별로 없다. 특별히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감독이 유명한 것도 아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와 <스파이 키드>를 만든 감독인데 이 작품들도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라고 본다면 말이다.

외계숙주에 대한 영화야 이제 질리도록 봤고, 이 정도의 시나리오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단지 범인이 누구냐 하는 것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이 될 뿐이다. 그럭저럭 괜찮은 영화다. 오락용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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