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32
장 자크 루소 지음, 박호성 옮김 / 책세상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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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볼테르에 대한 관심이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 루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와 로크, 홉스에 대한 관심으로 <사회계약론>을 접하게 되었고, 그중 로크와 홉스의 다음 세대를 살아가며 계몽주의의 전성기를 보낸 루소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장 자크 루소, 그는 사실 18세기 계몽주의자 중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불리운다. 시계공인 아버지와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고독과 방랑, 소외 속에서 그는 바랑 부인을 만났고 그녀에게서 자신의 지적인 성장의 단초를 제공받았다. 그의 지적 토대가 모두 그녀에게서 나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후에 루소는 <학예론>을 써 명성을 얻었꼬,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사회계약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고백록> 등의 저서를 냈다. 그의 사상이라는 것이 당시의 계몽주의자들과는 서로 대치되는 면이 많아서 온갖 비난과 핍박을 받아 외로운 지식인 생활을 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은 사실 루소의 <에밀>의 완전번역본이 아니다. 완역본은 김중현씨가 번역하고 한실사에서 낸 <에밀>이 따로 있다. 기왕에 읽을 바에야 완역본을 읽는 것이 좋겠지만, 워밍업으로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일부 번역본을 봐도 괜찮다 싶었다. 책세상문고에서 나온 박호성씨가 해제한 이 책은 루소의 <에밀>의 1부만을 번역한 것이다. 그 역시 책에서 이 책을 읽고 완역본을 읽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자신의 번역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난 이 축약본을 읽고 사실 다 읽고픈 생각이 간절히 든 것은 아니나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이 더 든 것은 사실이니 그의 시도가 내게있어선 그다지 실패로 단정하지는 않아도 될 듯 하다.

  <에밀>은 교육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나, 혹은 교직에 몸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정치학을 하는 자들에게나, 철학을 하는자들에게나 모두 읽어야할 필독서다. 루소의 <에밀>은 교육소설이라고 알려져있지만 또한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그의 사회계약설에 대한 기초적인 부문, 인간과 정치, 문명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곳에 숨어들어있기 때문이다.

 책세상문고판은 <에밀>의 1부만을 담고 있고, 두껍지 않고 책크기도 작아서 그냥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돌아다니면서 읽어도 그다지 오래걸리지 않을 듯 싶다. 두꺼운 <에밀>을 읽기가 겁이 난다면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렇다면 완역본을 손에 쥐기가 쉬워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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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 소나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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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문> 현재 종로, 강남 등의 대형서점에서, 그리고 알라딘, 예스24를 비롯한 인터넷서점에서 인문학 베스트셀러를 달리고 있는 책이다. 500쪽이 넘는 두꺼운 분량에 2만원이라는 부담스러운 가격까지, 선뜻 돈을 주고 사기 쉽지 않은 이 책이 그것도 고전을 다룬 이 책이 이렇듯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왜 일까? 아마도 '책문'의 내용이 담고 있는 '시대의 물음과 대답'이라는 것이 오늘날까지도 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나의 학교 선배이자 현재 철학강사로 뛰고계신 김태완 선생님의 첫 저서이다. 길게 늘어진 턱수염과 뒤로 꽁지틀은 머리는 딱 봐도 '도'에 도달한 '도인'쯤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김태완 선생님과 이야기를 해보면, 혹은 그의 강의를 들어보면, 도에 트인 사람이 맞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외국 유학을 갔다온 것도, 우리나라의 소위 일류대라고 하는 서울대를 나온 것도 아닌 선생님이 그만한 내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하다. 어쩌면 비주류를 살아온 때문에 그만한 내공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교수'직함을 받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이 40에 이제야 배움을 알았다고 하는 선생님은 이제는 배운 것을 사회에 환원하길 원하신다. 그리고 그 첫 작업이 바로 <책문>이었던 것이다. 그 시도는 성공이었다. 선생님은 저자후기에서 책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편집진이 만든 것이라 했지만 너무나 겸손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책문'은 조선시대 과거시험 합격자들을 대상으로한 임금과 합격자의 문답이었다. 시험에 다 합격한 뒤에 임금은 당시의 어려움을 책문의 문제로 내어 그들의 대답을 듣고 싶어했다. 본래 책문은 한 무제 때 지방수령들의 추천으로 뽑힌 인재를 임용하려고, 대책을 물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자리잡히게 된 것이다.

 임금이 내는 책문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어떻게 하면 인재를 등용시킬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정쟁을 멈출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외교책에서 정벌책을 써야하는가 아니면 화친을 해야하는가, 외교관의 자질은 어떤 것인가, 교육은 어떠해야하는가, 잘하는 정치란 무엇인가 등 다양한 유형의 질문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에 대한 합격자들의 대답 또한 각기 다르다. 일례로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을 묻는 세종의 책문에, 성삼문은 역사적 사례에서 배워야함을, 신숙주는 언로를 열어 직언을 들어야함을, 이석형은 다양한 의견을 들어 조율해야함을 대답으로 내놓는다. 책문에는 정답이 없다. 책문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오늘날 비슷하게 남아있는 형태로 대학입시 논술시험이 있는데 여기에는 사실 기교와 정답이 존재한다.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우리네 교육현실에서 논술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법은 학원에서 다 가르치고 있고 그 기교가 통하는 것이 현실이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라면 모를까? 우리나라에서는 폭넓은 독서와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자기만의 논술을 보기는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저자 역시 책에서 이런 의견을 내놓고 있고 나 역시 저자에 동감한다.

 우리가 <책문>을 읽어야하는 이유는 그 물음과 대답이 비록 당시의 제도와 풍습에 맞춰져있지만, 질문은 현재에도 유효하고 대답은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응답자의 태도와 식견을 보고자 함이다. 오늘날의 정책자들은 소위 행정고시, 외무고시라는 시험을 통해 뽑히지만 그저 달달 외우고 정답을 맞추기에 불과할 뿐 그들의 사회, 국가, 역사, 세계에 대한 가치관이나 식견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들의 암기력이 아니라 가치관과 국가관, 세계관인데도 말이다. 분명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를 고칠만한 제도적인 보완책이 마땅히 생각나는 것도 아니다.

 <책문>은 현재 베스트셀러이지만 스테디셀러가 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교양서의 목록에 올려놓아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간접적으로 고전을 접함과 동시에 역사를 접하고, 그들의 사유를 접함으로써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미래를 보는 시각이 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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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연휴, 영화 <가족>을 봤더랬다. 오랫만에 가족끼리...
 아빠는 아침에 내가 일어나기전 어딘가 나간 상태였고 엄마와 동생과 나는 저녁에 인근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 <가족>은 영화를 보기전부터 너무 광고를 많이봐서 그런지 이미 내용을 대강 알고 있었다. 경찰이었던 아버지와 절도혐의로 여러번 교도소를 왔다갔다한 딸의 이야기라는 것. 주현과 수애가 아버지와 딸로 나온다는 것 정도. 역시 예상대로의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전 여기저기서 들어본 정보에 의하면 이 영화를 보고난 뒤에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은 태반이고, 엉엉 우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왜 슬프지 않지? 하고 영화보는 중간에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내 감정이 메말라버린 것일까? 그건 아닌거 같은데... 옆에서 떠드는 꼬마아이때문인가? 아니면 뒤에서 발로 내 의자를 툭툭 건드리는 사람 때문인가? 영화상영중 앞에서 옆에서 슬금슬금 왔다갔다하는 사람 때문인가? 하여튼 영화보는 여건은 영 아니었다. 15세 이상 관람가에 유치원생 정도 나이의 아이는 왜 데리고 온 것이며, 또 떠들게 두는건 뭐람. 이 영화가 슬프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주위 여건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눈물을 닦는 사람들도 보이곤 했지만 다른 이들도 그다지 슬프지는 않았나보다.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 나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가족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줄거리상으로는 대단한 부정애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건 본 내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깡패와 룸싸롱의 모습이 너무 자주 비춰지는 것도 눈에 거슬렸고 이 덕분에 오히려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정현과 수애의 연기는 좋았지만 작품 자체가 지니고 있는 드라마적 요소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볼 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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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10년이나 된 꽤 오래된 영화다. 최근의 영화에서는 '서부영화'가 별로 없었다. 아마 이 영화가 '서부영화'로는 가장 최근작이 아닌가 싶다. 제목을 보아 '서부영화'로 추정되는 <황야에서 새벽까지>는 사실 서부영화는 아니고 공포, 스릴러 영화로 구분된다. 나는 사실 서부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개의 서부의 황야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백인이 인디언을 대상으로 총질을 해대며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인디언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악한 백인이 선한 백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대개의 줄거리이다.

 이 영화도 그 이상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악당이 한 마을을 장악하고 자신의 적을 하나하나 죽여나가고, 그에게 복수심을 품은 자가 나타나 악당을 죽이고 마을에 평화를 준다는 내용이다. 매우 뻔한 이야기이다.

 샤론스톤, 러셀크로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 당대에 이어 지금까지도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들 영화배우가 총출동했음에도 서부영화라는 장르의 단점을 이기지 못하고 캐릭터가 묻어버렸다. 러셀크로우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최근의 인기를 누리기 전 출연한 작품이라 이들을 발견해내는 맛으로는 볼만하다. 그렇지 않다면 다소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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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영화 <러브레터>를 이제야 봤다. 개봉시기가 내가 군에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그냥 한창 놀 대학교 2학년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이제야 보다니... 영화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로맨스를 좋아하는 내가, <냉정과 열정 사이>보다도 더 늦게 접하게 되다니... 하지만 이제라도 봤으니 다행이다. 그냥 기억속에서 언젠가는 봐야지 하고 있던 것이 잊혀져있었는데 말이다.

 일본 영화는 보고있자면 마치 우리나라 7, 80년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화면이 좀 촌스럽고 세련된 맛이 없다. 케이블 영화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러브레터>가 나오자 언제적 영화인가? 일본영화네, 라는 반응이 나의 첫인상이었다. 오른쪽 맨 위에 '러브레터'라고 영화제목을 명시하지 않았다면 나는 채널을 돌려버렸을 것이다.

 영화전개는 이렇다. 이츠키가 등반사고로 죽은 뒤 그의 연인이었던 히로코는 이츠키의 집에서 그의 옛주소를 발견하고는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그곳은 이츠키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그의 중학교 동창생인 여자인 것. 이후 이 둘은 이츠키에 대한 기억을 편지를 주고받으며 되살린다.

 서로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좋아한다 고백도 안해봤고, 오히려 이름이 같아 놀림을 당해 서로를 피했던 두 사람의 사랑 아닌 사랑이야기. 하지만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그 사람은 죽은 뒤였지만...

 그래서 이 영화는 더욱 애절하다. 서로 고백도 하지 못한 채 한참 세월이 흘렀고 기억속에서도 잊혀졌지만 이미 상대의 감정을 알게 된 시기는 그 사람이 죽은 뒤다.

 이 영화가 상영된 이후 많은 연인들이, 또 많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재연하고는 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저는 잘 지내요"

 참 단순한 이 대사를 몇번씩이고 반복해 눈오는 산에서 허공에 외치던 그녀의 모습. 그녀의 외침은 메아리로 반복되어 다시 돌아온다. 잘 지내고 있냐는 그녀의 물음이 상대의 물음이 되어 돌아오고 그녀는 다시 나는 잘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 역시 그녀의 먼저 물음에 잘 있다고 대답한다. 그녀는 혼자 죽은 이를 향해 외치는 말이지만, 메아리로 되돌아오며 이 대사는 서로의 대화가 되어버린다. 참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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