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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살라 인디아 - 현직 외교관의 생생한 인도 보고서
김승호 지음 / 모시는사람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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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시절,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여자 선배 하나가 방학에 인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동기 하나도 인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했다. 그 맘때쯤 나이면 한번씩 해외여행을 꿈꿔보는 시절, 나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있으면서, 한번도 실천에 옮겨보지 않았다. 여행을 위해 특별히 알바를 하지도 않았고, 돈이 야금야금 생기는 족족 음반과 책을 사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데 썼다. 만약 내가 여행을 간다면 인도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철학의 나라 독일과 그리스, 예술의 나라 프랑스, 음악의 나라 영국, 그리고 인도와 북유럽 국가 중 한 곳에 가보고 싶었다.  

  인도에 다녀온 선배가 그 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절대로 가방을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받아들여선 안된다고. 그네들은 사유재산의 개념이 희박해서인지 일단 제 손에 들어간 물건은 자기 것으로 간주한다고 했다. 그래서 살짝 무섭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가방을 잃어버리면 국제 노숙자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는데, 어이쿠.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의 여유를 느꼈고, 참 우리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 때 직접 들은 이야기 외에 내가 인도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고픈 여행지 중 하나로 인도를 손꼽은 것은, 인도가 또한 철학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선배가 느꼈던 그들의 삶의 여유란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인도 철학은 동국대 말고는 정규 교과로 개설하지 않는 것 같다. 정규 교과도 아니다보니 접할 기회가 없었고, 한번쯤 접해보고 싶다 막연하게 생각하면서도 늘 주변부에서만 맴돌았던 탓에, 아직까지 인도 철학은 모른다. 인도 철학이 정리되어 나온 단행본 책은 있기는 하다. <인도철학>(민족사)나 <인도 철학 산책>(정우 서적), <인도 철학 입문>(동문선), <인도 철학사>(이문출판), <인도 철학사>(민음사), <인도 철학사>(한길사)와 같은.  

  <맛살라 인디아>는 현직 외교관이 직접 인도에서 보고, 듣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쓴 현장 보고서다. '지금 인도'를 보여주는 가장 현장감있는 책이라고 할까. ('가장'이라는 말은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관련 서적을 널리 읽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에도 '가장'이라는 말을 붙이는 건 그만큼 오늘의 인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책은 인도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인도의 고유의 전통 문화와 그들의 삶의 가치관을 빠뜨리지 않으면서 깊이를 더해주고, 더불어 인도 속의 한국, 한국 속의 인도를 가로지르며 보여주기도 한다. 단순히 인도의 역사나 시대적 배경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책이 아닌,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서나 여행 안내서, 혹은 에세이쯤이 되겠다.  

  여기 '맛살라'라는 말은 인도의 향신료에서 나온 말로, "단순한 향신료의 의미를 넘어 인도 문화를 대표하는 용어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인도를 지칭하는 용어라고나 할까. 전통 인도 음악과 서구의 팝이 어우러지고, 끊인 우유에 짜이 잎을 우려내 설탕과 생강즙을 적당히 가미한 짜이도 있다고 한다. 그들이 먹는 음식이나 즐기는 음악, 또 건축 공학, 정치 등에 이와 같은 인도 특유의 '맛살라' 문화가 있다는 말이다. 책은 크게 1부 인도를 움직이는 힘, 2부 인도는 지금, 3부 인도 이모저모, 4부 인도에서 한국을 만나다, 로 나누어져 있다.

  '인도를 움직이는 힘'에서는 자동차 시장에서의 인도와 문화 사업, IT와 BT, 우주 산업 등을 이야기 하면서, 왜 인도가 이 분야들에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한다. 또 더불어 한국 사람들이 가장 관심있어 할 영어 교육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2부에서는 인도의 카스트 계급과, 그들의 연애와 결혼관, 일본과 인도의 외교 관계를 이야기하고, 3부에서는 인도의 영화와 종교, 음식 등에 대해서, 4부에서는 인도에서 자리잡은 한국 기업과 한국 전쟁, 한국 문화를 이야기한다. 각각의 작은 장에서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나 모습이 있어 글 한편, 한편이 흥미롭게 읽힌다.  

  인상적인 부분은, 인도 안에서도 힌두계와 무슬림계가 대립하며 힌두계의 무슬림에 대한 잔인한 학살극이 장기간 지속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을 경찰이 모른 척하거나 심지어는 폭도에게 넘겨주었다는 부분이다. 마치 지난 촛불 정국 때 우리네 경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단지 죽거나 강간 당한 자가 없었을 뿐. 죽지는 않아도 멀쩡한 대낮에 회칼에 맞아 피 흘렸던 사람은 있었다. 그 잔인한 현장에 경찰들이 있었다고. 그네들은 인종으로, 우리는 당파성 혹은 명령으로 그 같은 일을 겪었다.  

  교육 측면에서는 "2006년에는 인도 정부가 23.5%로 되어 있던 하위 카스트의 대학입학 특례 비율을 49.5%로 확대하려는 과정에서 큰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고 한다. 사실상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하위 카스트들에게 그네들이 인도에서 차지하는 비율만큼 대학 입학 비율을 할당해주려고 한 것인데, 상위 카스트들이 크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때 극렬히 반대한 이들은 인도 유명 대학의 의과와 공과 대학생들이었다고. 교육의 정도에 따라 향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현격히 다르고, 빈부의 격차가 큰 만큼, 그들은 기득권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것을 내놓는 데 인색하다. 반면 없는 자들은 내놓을 것이 없고 그들이 의당 받아야 할 것을 받으려 한다. 한편 이 부분에서 부러운 것은 정부가 나서서 그 비율을 할당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상황을 잘은 모르겠다만 개념이 제대로 박힌 정부다. 소위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정부에 몸담고 있을텐데, 그들이 나서서 하위 카스트들을 위해 비율 조정을 하려 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한국의 공직자들에게서는 절대로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정부에 서민이 없다보니 서민을 위해 정책을 만들고 현실을 바꾸려 노력하는 이들도 없다. 그들은 그들이 보는 것만이 현실이라고 믿으니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라톤 경주에서 상위 카스트나 좋은 가문 출신의 자녀들이 이미 반환점에 서 있다고 한다면, 소외계층 자녀들은 출발선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불공정 게임과 같은 이치이다. 인도 교육 불공정 게임의 근저에는 대부분의 부와 사회적 지위를 소수 상류계급이 독점하고, 이를 대를 이어 세습하려는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 물론 현재 상황은 과거에 비해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근본적인 대책이나 치유책이 없는 상황이다." 만약 롤즈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역시 저자와 같이 말했을 것이다. 출발이 다른 불공정 게임에서는, 공정한 게임을 위해 약자들의 출발선을 앞당겨주는 등의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 무지의 베일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본다면 그들에게 그 정도의 '배려'를 해주는 것을 '혜택'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또 그 시작점이 다르다고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급제 사회인 인도가 한국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은 계급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계급이 눈으로 보이게끔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점이 다르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에 쓸데 없는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인식이 되어야 그 다음에 그럼 우리 약자들을 위해 출발선에서 배려를 좀 해주자, 고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아니 왜 출발선이 다르냐고 묻는다. 교육의 기회를 똑같이 주었고, 똑같이 공부하는 데 왜 출발선이 문제냐고. 이러니 출발선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차라리 인도처럼 계급제였다면 인식 논란은 불필요할텐데 말이다.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인도는 물론 한국에서도 교육의 균등한 기회 보장을 위해 국가의 책임, 사회의 책임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육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는 국가와 사회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근 교육과 대학 발전을 이유로 고등학교까지 서열을 매겨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일부 한국 대학들의 태도는 인도의 비인간적인 교육 양극화를 연상시켜 씁쓸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있는 계급도 모자라 그 계급차를 더 벌이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정부는 상위 5%가 전체를 지배하는 사회를 바라는 듯 하다. 거기에 그 하위 95%가 적극적으로 동조해주고 있으니 어찌 속 터지지 않으랴.

  다른 나라의 모습을 빌어 우리네 모습을 관찰하는 건 필요하다. 그 나라가 비록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못살거나, 정치적으로 후진 국가라 하더라도 말이다. <100분 토론>에서 진중권이 사이버 모욕죄 이야기를 하면서 짐바브웨 사례를 꺼내려 하자 전원책 변호사가 아니 왜 다른 나라의 예를 비교하려 드느냐고 '호통'을 쳤는데, 납득이 안가더라. 왜 다른 나라의 사례를 들면 안되는건가. 진중권은 한국의 오늘이 짐바브웨의 과거보다 못하다는 걸 말하려는 데, 그게 짐바브웨 국민들을 모욕하는 거란다. 얼마나 기분 나쁘겠냐고. 진중권은 짐바브웨를 칭찬하려 했는데. 비교 국가가 어떤 대상이건 그게 꼭 소위 말하는 OECD 경제 선진국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의 교육을 인도와 비교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앞에 인용했듯 인도는 적어도 정부가 나서서 그 격차를 줄이려 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이런 모습을 제발 좀 보고 싶다.

  

* 숙제
서평 도서의 좋은(추천할 만한) 점 :  오늘날의 인도를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서평 도서와 맥락을 같이 하는 '한핏줄 도서' : 관련 도서를 안 읽어봐서 패스.
서평 도서를 권하고 싶은 대상 : 인도 여행을 계획중인 이들, 오늘날의 인도에 대해 알고픈 이들.
마음에 남는 '책 속에서' 한 구절 :  위 리뷰에 인용했음. (별도로 올린 밑줄긋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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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8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민족분쟁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지 인도 하면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유혈참극이 떠오릅니다.특히 펀잡 지방의 시크교도들이 힌두교도와 사이가 안 좋지요.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도 시크교도인 자기 경호원에게 암살당했고 그 소식을 듣고 격분한 힌두교도들이 무고한 시크교도들까지 살해했구요.
그리고 우리는 걸핏하면 서구,미국,일본의 사례를 거론하는데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제3세계 나라들의 사례도 많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마늘빵 2009-01-18 23:02   좋아요 0 | URL
아 인도도 생각보다 민족 분쟁이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이 책에서도 인도의 정치 상황에 관해서 상당 부분 할애하고 있는데, 그쵸 인디라 간디 얘기도 나왔어요. 간디 얘기는 전에 한겨레21 구독할 때 접했는데... 무섭군요.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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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만약 이 세상 모두가 눈이 멀어,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유일하게 눈 뜬 자는 눈 먼 자들의 왕이 되거나 눈 먼자들의 노예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눈 뜬 여자는 그들이 갇힌 수용소에서 이같은 고민을 한다. 지금 나만이 앞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나는 그들의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하여, 그들의 더러운 몸을 씻기고, 빨래하고, 때마다 먹을 것을 받아다 갖다 바치고, 그들이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 할 때 그녀는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들에게 꼭 말해야 할 순간이 올 때까지 남편을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앞이 보여요, 라고. 꼭 말해야 할 순간이란, 그녀 자신도 생각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눈이 먼 적이 있었다. 몇년 전 라섹 수술을 했을 때인데,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건지 몰랐다. (지금은 수술 방법이 개선되어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 이가 거의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나의 고통은 눈이 멀었다, 는 것으로부터뿐 아니라, 수술 이후에 겪어야 할 고통까지 첨가된 것인지만, 눈을 뜰 수 없다는 것, 앞을 볼 수 없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나 큰 고통이었다. 병원에서 집으로 올 때까지, 집에 와서 화장실에 가거나 밥을 먹거나, 듣고픈 음악을 들으려하거나, 이불을 펴거나 하는 등 이전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사소한 행위들이 내게는 하나의 과제였다. 잠시 눈이 멀어 - 눈을 뜬 이후에는 세상을 더 선명하게 밝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눈이 멀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아보이지만 - 책도 읽을 수 없었고, 티비도 볼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내 앞에 차려진 한 끼 식사를 끝내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어떤 반찬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음식이 차려져 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눈이 먼다는 것은,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음과 동시에 세상의 추악한 모습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지 않음이 경험하지 않음과 같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설 속에서 각자 운전을 하다가, 남의 차를 훔치다가, 눈에 문제가 있는 이들을 돌보다가, 약을 팔다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남자에게 자신의 몸을 팔다가 갑자기 눈이 멀어버린 이들은, 비록 그들이 수용소에 갇혀있지 않다 하더라도, 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어 국가와 사회의 모든 기능이 일시에 멈춰버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경험하게 됐을 것이다. 좋은 경험과 나쁜 경험 모두. 그들이 처한 상황은, 단지 어느 한 개인이 눈이 먼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서서히 눈이 멀고, 그들이 하던 모든 일들이 정지했다는데서 더욱 심각해진다.

  수용소는 하나의 사회와 같다. 먼저 온 자들과 나중에 온 자들, 주어진 좁은 공간과 이 안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드는 많은 사람들, 맛은 차치하고라도 부족한 식량과 배고픔에 굶주리는 많은 사람들, 무기를 지닌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원래 장님이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 기타 등등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여러 기준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 때론 여러 기준이 한데 묶여 상황이 발생한다. 수용소 안에서나 밖에서나, 눈이 멀었을 때나 그러지 않을 때나, 무기를 지닌 자는 언제나 왕이 되고, 그가 무기를 잃는 순간, 그는 더이상 왕이 될 수 없다. 눈이 멀었다 하여 성욕이 감퇴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닦친 혼란을 다스리고 일상적인 평온함을 되찾은 뒤에는, 우리들이 느끼는 모든 기본적인 욕구들이 뒤따라 온다는 사실, 힘을 가진 자들은 힘이 없는 자들의 재산과 몸을 빼앗을 수 있다는 사실, 그건 변하지 않다.

  현실에서 눈 먼 자들은 약자로서 대우받아야 하지만,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눈 먼 자들은 현실에서 눈을 뜬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정상으로, 눈을 뜬 자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다. 그러나 눈 뜬 자가 비정상이라고 하여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그는 주인이 되거나 노예가 되길 선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쪽을 택할 수도 있다. "사모님은 눈이 멀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사모님이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고 우리를 조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거잖아요, 나는 명령을 내리지 않아요, 그저 최선을 다해 조직하려 할 뿐이죠, 나는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눈일 뿐이에요, 자연스러운 지도자지, 장님의 나라에서는 눈을 가진 사람이 왕이니까, 검은안대를 한 노인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눈이 보일 때까지는 내 안내를 받도록 하세요."  

  눈 먼 자들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모욕의 단계를 내려갔다.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타락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개인의 생존일 뿐이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겪을 수 있는 온갖 수치와 모욕을 경험했고, 그들이 누리던 사회적 지위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스스로 짓밟았다. 더이상 인간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오로지 눈 뜬 한 사람만이 그 모든 것을 눈으로 경험했다. 그리고 아파했다. 눈을 뜬 것은 더 이상 그에겐 '특별한 혜택'이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더해진 고통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눈이 멀었지, 당신들의 먼 눈이 내 눈도 멀게 한 거야,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나도 더 잘 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소설에서 눈 먼 자들이 보이는 모든 행동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바를 상징한다.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에요." 라는 의사의 말은, 진리다. 사라마구는 두 눈 멀쩡히 뜨고 있으면서 보이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는 세상 사람들을, 현대인들을 풍자하고 있다. 진짜 눈이 먼 사람들은 우리들이다. 소설이니까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단 한 명의 눈 뜬 이는 다른 이들을 지배하지 않고 그들을 돕는다. 현실에서 대다수의 눈 뜬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지금도, 곳곳에서는 추위에 떨고, 굶주리고, 목적을 알 수 없는 전쟁으로 고통받는다.  

  그들은 그들이고, 우리는 우리다. 이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내 고통은 고통이지만, 타인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오로지 내가 경험하는 것만이 내게 고통으로 다가올 뿐이다. 커다란 국가적, 사회적 문제뿐 아니라 아주 가까운 주변에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말 못하는 이들이 있다. 크건 작건 이들은 우리 주위에 분명히 있으며, 그들을 보지 않는 한, 우리는 두 눈을 뜨고 있지만 눈이 멀었다. 한편, 눈이 뜬 자들은 눈이 먼 자들보다 더 고통스럽다. 우리가 봐야 할 것들이 단지 눈을 뜨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보이는대로 믿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두 눈으로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우리는 알고, 깨닫고, 느껴야 한다. 

  "우리가 대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물의 질서가 뒤집혀 있어요,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다. "자 이제 철학과 마법은 그만하면 됐으니, 손을 잡고 계속 살아가도록 해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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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r 2009-01-1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책은 반복해서 자주 보는 편이지만, 이 책은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다를 게 없어서 너무 무섭고 우울하거든요...

마늘빵 2009-01-18 01:44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 재미삼아 읽어도 재밌지만, 작가가 드러내는 메시지가 참으로 마음에 와닿고, 그걸 눈 앞에서 경험하는 듯이 보여주는 게 더 아프게 하더군요. 오웰의 1984년, 카프카의 심판, 카뮈의 페스트와 비교를 하는데, 오웰 빼고는 읽어보지 못했어요. 나머지 심판과 페스트도 읽어보려고 보관함에 넣어놨답니다. ^^ 이어서 눈뜬 자들의 도시도 읽고 있어요.

드팀전 2009-01-18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보일 적에 나는 오히려 헛디뎌 넘어지곤 했다....세익스피어 <리어왕>
'두 눈을 온전히 뜨고 살아가기 위하여'에 비하면 재미없지요 ^^ 두 눈을 뜨려면 눈을 감고 오히려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될 지도 모르지요. 말장난같지요..^^ 역설은 진리를 만드는 한 방법중에 하나일겝니다.doxa와는 다른 어떤 진리의 조각이 있어요.

제가 요즘 정신병 증상이 아닌가 심하게 걱정되고 있답니다.자가진단하면 분명히 초기 증상은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려니 하시구,,,푹 쉬어야되는데...

마늘빵 2009-01-18 09:21   좋아요 0 | URL
새벽에 깨어계셨군요. 아직 주무시지 않으신건지, 아니면 일찌감치 깨신건지. ^^ 저는 내내 자다가 밤에 깨서 새벽에 잤습니다. 이런 시간도 아주 오랫만이었죠. 얼마전 세익스피어 <햄릿>을 읽으셨더라고요. 햄릿의 그 대목은 제가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그쵸, 때로 역설은 진리를 드러나게 해주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건 맞습니다.

요새 직장 안팎에서 많이 힘드실 줄 압니다. 결국 KBS에서 몇몇을 징계하기에 이르렀는데, 부디 몸 조심하시길...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구판절판


오후 네 시였다. 그러나 사실 시계는 그런 데 관심이 없다. 시계는 일부터 십이까지 움직일 뿐이고, 나머지는 그저 인간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일 뿐이다. -170쪽

어쩌면 눈먼 사람들의 세상에서만 모든 것이 진실한 모습을 드러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0쪽

사람들이 흔히 눈이 멀었다고 표현하는 사랑도 그 나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217쪽

남자들은 연민과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패배했다. 여자들의 분노는 정당했다. 여자들은 각자의 교양, 사회적 배경, 개인적 기질에 따라 남자들을 신둥부러진 놈, 기둥서방, 기생충, 흡혈귀, 착취자, 뚜쟁이 등으로 불러댔다. 어떤 여자들은 그동안 순전히 관용과 동정심 때문에 불행에 처한 동반자들의 성적인 제의를 수락해 왔는데, 이제 그 일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주었는데도 이제 여자들을 최악의 운명으로 몰아넣으려 하는 이 배은망덕한 행동을 보라는 것이었다. -235쪽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말싸움에서 재치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 그 뒤에 불가피하게 따르게 되는 패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병실들에서 벌어진 논쟁도 이와 똑같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의 이성과 비이성은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 아닌가. -237쪽

여자들은 귀가 멀고, 눈이 멀고, 벙어리가 된 채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앞에 있는 여자의 손을 놓치지 않을 만큼의 의지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올 때와는 달리 어깨가 아닌 손을 서로 잡았다. 누가 왜 돌아갈 때는 손을 잡고 가느냐고 물어도, 여자들 가운데 누구도 대답을 못했을 것이다. -255쪽

눈 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305쪽

도시의 미로에서는 기억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이란 어떤 장소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해주는 것뿐이지, 우리가 그 장소에 이르는 길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305쪽

그들은 자기가 돌이 된 꿈을 꾸고 있었다. 돌이 얼마나 깊은 잠을 자는지는 우리 모두가 아는 일이다. 시골에 나가 산책만 해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돌들은 땅을 반쯤 묻힌 채 누워 잠을 자면서 깰 때를 기다리고 있다. 돌이 깨어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누가 알겠냐만. 그러나 먹을 것이라는 말은, 특히 굶주림이 심할 때는 마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언어를 모르는, 눈물을 핥아주는 개도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런 본능적인 행동을 하다가 개는 젖은 개들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힘차게 흔들어 사방으로 물을 튀기는 행동이다. 개들에게는 그것이 쉬운 일이다. 그들은 외투를 입듯이 털가죽을 입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가장 효험 좋은 성수(聖水)가 개의 몸에서 튀자, 돌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빨라졌다. -331-332쪽

딱딱한 빵 한 조각의 냄새는, 숭고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삶 자체의 본질과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332쪽

사모님은 우리의 복수를 하려고 죽인 거예요. 여자의 복수는 여자만이 해줄 수 있어요, 복수도 정의롭기만 하면 인간적인 거예요, 부정한 방법으로 피해를 준 사람에 대해 피해자가 아무런 권리도 가질 수 없다면 정의도 있을 수 없어요. -359쪽

자연스러운 지도자지, 장님의 나라에서는 눈을 가진 사람이 왕이니까.-360쪽

눈물을 핥아주는 개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식과 자신이 보호하던 인간이 떠난다는 깨달음 사이에서 아주 짧은 순간 망설이더니, 즉시 부드러운 땅을 발로 긁기 시작했다. -363쪽

그녀의 멀어버린 두 눈에 눈물이 고인다.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계속 살고 싶은 이유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이란 필요하다고 해서 꼭 나타나는 것은 아니니까. 유일한 답은 답을 기다려보는 것일 경우가 많다. -367쪽

우리는 모든 모욕의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387쪽

우리는 모욕의 모든 단계를 내려갔죠. 그걸 다 내려가서 마침내 완전한 타락에 이르렀어요, 방식은 다를지라도 여기서도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어요, 그래도 그곳에서는 그런 타락이 다른 사람들 탓이라고 핑계댈 수 있었어요, 지금은 그게 안 돼요, 이제는 선과 악에 관한 한 우리 모두 평등해요,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이냐고는 묻지 말아주세요, 눈먼 것이 드문 일이었을 때 우리는 늘 선과 악을 알고 행동했어요, 무엇이 옳으냐 무엇이 그르냐 하는 것은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서로 다른 방식일 뿐이에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가 아니고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해요. -387-388쪽

말이란 것이 그렇다. 말이란 속이는 것이니까, 과장하는 것이니까. 사실 말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우리는 갑자기 튀어나온 두 마디나 세 마디나 네 마디 말, 그 자체로는 단순한 말,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흥분한다. 그 말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살갗을 뚫고, 눈을 뚫고 겉으로 튀어나와 우리 감정의 평정을 흩트려놓는 것을 보며 흥분한다. 때로는 신경마저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돌파당하고 만다. 사실 신경은 많은 것을 견딘다. 모든 것을 견딘다. 갑옷을 입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의사의 아내의 신경은 강철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칭대명사 하나, 부사 하나, 동사 하나, 형용사 하나 때문에, 이런 단순한 문법적 범주들 때문에, 단순한 부호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두 여자, 부정(不定)대명사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들, 그들 역시 울고 있다. 그들은 온전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여자를 끌어안는다. 쏟아지는 비 아래 미의 세 여신이다. -395-396쪽

가장 심하게 눈이 먼 사람은 보이는 것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은 위대한 진리예요. -419쪽

사물의 질서가 뒤집혀 있어요, 늘 죽음을 나타내던 상징이 삶의 상징이 되어버렸어요. -428쪽

그러나 지금은 말의 음악밖에 없다. 이런 말의 음악이란, 특히 책 속에 나오는 말의 음악이란 두드러지지 않다. 그래서 설사 이 건물에 사는 누군가가 호기심에 이들의 문간에 귀를 대어보았다 해도, 한 사람이 웅얼거리는 소리,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긴 실 같은 소리밖에 못 들었을 것이다. 이 세상의 책이란, 그것을 다 합쳤을 때는, 사람들이 우주를 두고 하는 말처럼, 무한한 것이다. -4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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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구판절판


"예술에서 혁신은 내용도 아니고 형식도 아니고, 기술에서 나온다."(발터 베냐민)-7쪽

영화는 정신적 지각의 대상을 제작하는 행위에서 점차 신체적 체험을 연출하는 행위로 변해가고 있다.

"기술을 통해 인류에게 하나의 자연이 조직되고 있다."(발터 베냐민)-9쪽

렌즈는 소수를 전지한 간수로 만들면서 다수를 무력한 수인으로 만든다. -10쪽

디지털 시대는 새로운 상형문자의 시대다. 윈도 창문의 아이콘처럼 오늘날 이미지와 텍스트는 하나가 되고 있다. 문맹 대중에게 의미를 그림으로 보여주어야 했던 시대에는 해석의 다의석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원주의 시대에 지성적 몽타주의 해석적 모호함은 외려 미적 매력이 될 수 있다. 디지털은 영화로 하여금 제 언어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29쪽

글쓰기는 청각을 시각으로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글자를 피부에 쓸 때, 글쓰기는 촉각이 된다. 그리고 그 종이의 냄새를 맡을 때 글쓰기는 후각이 된다. "종이 냄새는 모두 좋았다. 모두 살갗 냄새 같았다."(<필로우북>) 청각과 시각이 후각과 촉각이 될 때, 글쓰기는 섹슈얼리티로 연결된다. -35쪽

19세기까지의 주요한 이미지는 회화나 그래픽처럼 손으로 직접 그리는 ‘원작 이미지’였다. 20세기의 이미지는 장치로 찍은 그림, 즉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 이미지’였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것은 ‘생성 이미지’. 여기서 앞의 두 이미지는 하나가 된다. 원작 이미지는 없는 것도 그릴 수 있으나 묘사한 생생함이 떨어진다. 복제 이미지는 사실성은 뛰어나나 피사체를 요구한다. 그런데 생성 이미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진적 사실성을 가지고 생생하게 나타난다.
‘컴퓨터그래픽’이란 결국 만화와 사진의 결합이다. 만화는 맥루언식으로 표현하면 정세도(해상도)가 떨어지는 전형적인 ‘쿨미디어’다. 하지만 그래픽이 컴퓨터를 만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컴퓨터는 그래픽을 뜨겁게 달군다. 디지털 기술은 그래픽의 환상적 이미지에 사진보다 더 실감나는 고해상의 하이퍼리얼리티를 부여한다. 이때 환상은 관객의 눈앞에 사실보다 더 실감나는 현실로 나타난다. 환상이 고해상의 실재가 되어 나타나는 것. 이것이 오늘날 대중이 겪는 새로운 이미지 체험이다. -41쪽

(unheinlich(uncanny, 不氣味)에서 오는 섬뜩함에 관하여)
시체의 표정과 좀비의 동작을 닮은 휴머노이드가 불쑥 ‘죽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사망 가설)이라고 한다. 다른 가설에 따르면 뭔가 결함이 있어 보이는 존재가 종족의 유전자 풀에 섞여 들어오는 것에 생명체가 본능적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진화 미학적 가설)이라고 한다.아무튼 인간-기계의 관계는 원래 1인칭-3인칭의 관계이나, 그것을 1인칭-2인칭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는 분명히 어떤 섬뜩함이 있는 게 사실이다. -53-54쪽

50년대 미디어 철학자 권터 안더스는 <인간의 골동성>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나, 인간의 자연적 신체와 정신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그 격차로 인해 날로 새로워지는 테크놀로지 앞에서 인간이 ‘골동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얘기. 미디어가 새로워지고 신체는 고루해진다. -97쪽

‘사이보그’라는 낱말은 그 사이에 ‘심보그(symborg)’라는 신조어로 진화했다. 'symbios'와 ‘organization'의 합성어인 심보그는 한마디로 인간과 동물, 신체와 기계, 가상과 현실의 공생관계 위에서 살아가는 유기체를 가리킨다. 바이러스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 진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 자체가 실은 다른 생명체와의 공생을 통해서만 탄생하고 존속할 수 있다는 얘기. 이 자연현상을 인공적으로 수행하는 존재가 바로 ’심보그‘다.
사이보그가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이식된 타자에 대한 자아의 지배를 의미한다면, 심보그는 자아와 타자 사이의 평등한 공존을 함축한다. 어느 퍼포먼스에서 스텔락은 여러 개의 낚싯바늘로 제 몸을 공중에 띄웠다. 인포머틱과 로보틱스를 결합한 이 퍼포먼스에서 그는 네티즌들로 하여금 인터넷을 통해 원격으로 크레인을 조종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그의 신체는 더 이상 그만의 것이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어떤 것이 된다. (계속)-100쪽

(이어서) 그 타자가 굳이 기계나 기관처럼 물질성을 띨 필요는 없다. 오늘날 누구나 사이버공간에서 자기의 ID를 갖고 있고, 어떤 이들은 ‘아바타’라는 이름으로 제 자신의 화신을 갖고 있다. 숙주가 돈을 들여 아바타를 먹여주고 입혀주면, 아바타는 그 대가로 숙주에게 삶의 보람과 기쁨을 선사한다. 심보그는 자아가 사이버공간의 이 도플갱어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게 된 어떤 상황을 가리킨다.
-100쪽

"국가와 전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문제는, 지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본성을 갖는다."(메를로 퐁티)-162쪽

문화적 기억은 한 사회의 대부분의 성원에게 공유된다. 하지만 기억을 수정하고픈 사람들도 있게 마련. 가령 <조선일보>가 건국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우리 헌법에 기입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 사제(私製) 대한민국의 법통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승만 독재는 4.19 민주이념에, 박정희의 친일은 3.1운동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조선일보>의 옆차기는 가망없는 위헌적 망동에 불과하다.
최근 박근혜 대표는 5.16을 "구국혁명"이라 불렀다가 구설수에 올랐다. 쿠데타의 정의 자체가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의 견해는 집단의 문화적 기억이 아니라, 그의 추종자들의 사제 기억에 머물 뿐이다. -272-273쪽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당시에 <조선일보>의 김대중 전 주필은 광주 시민을 '폭도'라 불렀고, 실제로 광주 시민은 오랫동안 공식적 기억 속에서 '폭도'로 지내야 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강요한 그 기억은 그저 단기기억에 불과했다. 오랜 싸움 끝에, 광주의 시민군은 오늘날 장기기억 속에 민주화 유공자로 기입됐다. 심지어 한나라당의 정치인들도 이제는 광주를 참배하는 것으로 정치일정을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인터넷에 모인 '전사모' 회원이 1만 4천 명이라 한다. 하지만 어느 사회나 제 분량의 또라이를 갖고 있게 마련이다. 독일사회에도 그 정도 분량의 네오 나치는 서식하고 있다. 문제는 이 소수의 얼빠진 이들이 아니다. 광주의 빛을 바래게 하는 것은 그 기억을 현실 정치에서 정략의 수단으로 써먹는 이들이다. -275-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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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장수 2009-01-1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기술미학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니 확실히 여타의 영화 평문들과는 다르더군요. 읽고 있는 책 반가워서 댓글 남기고 갑니다.

마늘빵 2009-01-11 23:03   좋아요 0 | URL
^^ 재밌는데 조금 어렵더라고요. 잘 모르는 영화 기술적 개념들이 많이 나와서요. 근데 계속 읽다보면 또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군요.

2009-01-11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1 2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2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2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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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도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 중의 하나다. 수치심은 인간으로서의 자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상처를 받거나 배가 고프거나 궁핍함으로 인한 모욕감 때문에 심신이 괴롭다면, 나는 고통을 느낀다. 나 아닌 다른 인간에게 가해진 고통을 바라볼 때도 나는 나의 의식 속에서 얼마간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내 안에 연민의 감정이 생겨나고, 도와주고 싶은 연대감이 발동하며, 동시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렇게 되면 내 안에서는 행동하라는 부추김이 일어나게 된다.
나는 직관적으로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혹은 도덕적인 의무감에서 모든 인간은 일할 권리, 먹을 권리, 건강을 돌볼 권리, 배울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행복해질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안다.
인간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세계화 지상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깃들어 있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처럼 인류를 황폐하게 만드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행복 추구 욕구마저도 그토록 냉소적이고 잔인하며 교활한 방식으로 깔아뭉갤 수 있단 말인가? (계속)-13-14쪽

(이어서) 그들은 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부자가 되고 싶고, 시장을 지배하고 싶으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거나 세계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모순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잠재적인 경쟁자들을 상대로 경제전쟁이라는 이름의 계엄령을 내렸다. 인간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적용되는 도덕을 비껴갈 수 있는 예외적인 체제를 마련했다는 말이다. 새로운 체제 안에서 그들은 기본적인 인권을 외면하고(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인권 보장을 지지한다), 도덕적인 원칙을 무시하며(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원칙이 보장된다), 평범하고 상식적인 감정(이들은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한테만 이 같은 감정을 허용한다)을 억누른다. (계속)-13-14쪽

(이어서) 내가 타인에게 연민의 감정을 표하거나 연대감을 보인다면, 나의 경쟁 상대는 그 즉시 이를 나의 약점으로 여겨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나의 경쟁 상대는 나를 무너뜨리려고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수치심(이런 경우 억눌러야 한다)을 느끼는 나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 24시간 밤이든 낮이든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최대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 이익을 축적하고 최단 시간에 최저 비용으로 가장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른바 경제전쟁은, 다른 모든 전쟁들이 그렇듯 전쟁이 지속되는 한 영원토록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이 전쟁은 끝없이 계속되도록 프로그래밍된 듯하다. -13-14쪽

"지식인의 의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임무는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 (레지 드브레-프랑스 출신 철학자, 교수, 기자,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 동지)-17쪽

"특정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을 기아에 허덕이게 만들 때, 자유란 한낱 허울뿐인 유령에 불과하다. 부자가 독점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의 생사여탈권을 장악할 때, 평등이란 한낱 허울 좋은 유령에 불과하다. 혁명의 반동 세력이 나날이 곡식의 가격을 쥐고 흔들어 시민들의 4분의 3이 눈물 없이는 식량을 조달할 수 없을 때 공화국은 한낱 유령에 불과하다."(자크 루-사제)-24쪽

"자유란 먹고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나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루이 드 생쥐스트)-25쪽

유토피아는 다른 것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지상에서의 짧은 생애 동안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유토피아는 요구 가능한 정의까지도 내포한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의식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자유와 연대의식, 나누어 갖는 행복의 도래를 표현한다. 유토피아는 결핍인 동시에 욕구로서 전 세계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인간들의 모든 행동의 가장 내밀한 원천이 된다. 이러한 정의 없이는 우리들 그 누구에게도 행복이란 불가능하다. -28쪽

"죽음의 순간에 우리들 각자는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 더 많은 생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임종의 고통 속에 놓인 순간에, 우리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자아를 다른 사람, 즉 우리보다 뒤에 살 수입억 명의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미완성으로 끝나는 우리의 삶을 완성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에른스트 블로흐)-29쪽

"자기 눈앞에 펼쳐진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실용주의만 고집하며 일단 손에 쥔 것만 가지고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 지평선 너머로 펼쳐져 있을 세계를 보는 사람들만이 실재론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만이 세상을 바꾸는 행운을 거머쥘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지평선 너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분석적인 이성으로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도래할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은 내면의 눈, 즉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유토피아를 통해서만 볼 수 있습니다."(르페브르)-30-31쪽

"나는 나를 이루고 있으면서 당신들 앞에서 말을 하는 이 먼지 덩어리를 경멸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처형하여 이 먼지 덩어리의 입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몇 세기가 지난 다음, 아니면 하늘나라에서라도 나한테서 나만의 독자적인 삶을 앗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보십시오."(생쥐스트가 판정관들인 파리 공안위원회 위원들 앞에서 한 말)-31쪽

부채를 얻고, 그 부채를 갚기 위해 이자를 지불하고 원금을 상환하는 일련의 과정은 봉건시대에 유행하던 충성 서약의 가시화된 표현과 다르지 않다.
노예는 국제통과기금으로부터 협정서 혹은 구조조정 합의서를 받을 때마다 무릎을 꿇는다. 무릎을 꿇지 않고 서 있는 노예는 비록 목이나 손목, 발목에 무거운 쇠사슬을 칭칭 동여매고 있더라도 위한한 노예다. -104쪽

"계급에 대한 편견은 심지어 노동자들 자신의 마음과 정신으로도 파고들어, 우리 스스로에게 역사의 주체로서 행동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는 정부를 구성하고 있을 뿐 권력을 장악한 것이 아니다. 한 나라의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통령 한 사람이나 의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민중들이 나서야 한다."(룰라-브라질 대통령)-208-209쪽

부채로 인해서 야기될 수 있는 결과 또한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첫째, 한 나라가 대외적으로 허약해지며, 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높아진다. 둘째, 외화로 갚아야 할 돈의 액수가 점점 증가하며(오늘보다 내일 갚아야 할 돈이 많아진다), 따라서 한 국가의 젊은 세대들의 발전을 저해한다. [......] 넷째, 주권을 상실하게 되며 국제금융 시장의 전략과 세계열강의 위력에 복종해야 한다. 다섯째, 부채를 들여와 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에는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다가 상환을 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만 짊어진 무방비 상태의 소시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한다. -239쪽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정의에 대한 사랑의 토대를 이룬다. 정의감이란 이성에 의해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서도 형성되기 때문이다."(장 폴 마라)-331쪽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소수, 즉 대체로 별다른 의식 없이 사는 백인들의 편의를 위해 언제까지고 대다수가 가난과 절망, 착취, 기아 속에서 신음해야 하는 세상을 거부하는 인간의 이성 속에 희망은 깃들어 있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요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그것을 흔들어 깨우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며,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나는 타인이며 동시에 타인은 나다. 타인에게 가하는 비인간적인 행동은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카를 마르크스는 "혁명가는 한 포기 풀이 자라나는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342-343쪽

"당신들은 구호를 받는 가난한 자들을 원하지만, 나는 가난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빅토르 위고)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파블로 네루다)-344쪽

얼마 전, 아프리카에서 상당히 오랜 동안 일을 한 경력이 있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이와 같이 일하던 현지 직원 한 명이 어느 날 눈물을 펑펑 쏟고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뇌염 예방주사를 맞히지 못해 자녀가 죽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중략) 가난과 부채가 빚어내는 비극을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만의 이야기롤 듣지 말자. 내 직장 동료, 내 이웃이 겪는 아픔에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앞으로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해보자. 혁명은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혁명가이고, 또 혁명가이고 싶다.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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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1-0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탐욕의 시대 읽고 싶네요.

마늘빵 2009-01-09 09:11   좋아요 0 | URL
서론, 결론 격인 부분엔 위에 밑줄그은 것과 같은 인용구와 가치 서술이 많고, 그보다 훨씬 많은 본문은 빈곤국가의 실상(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거대 기업의 횡포와 비리 등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