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멸망
2007년 1월 어느시점엔가 네이버와 엠파스 등의 검색어 1위는 '지구 멸망의 날'이었다. 검색창에 '지구 멸망의 날'이라고 검색하면 지금도 그 당시에 사람들이 질문을 올리고 대답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2007년 새해 당장 지구가 어떻게 되는것도 아니고, 어떤 질문자의 말마따나 북한의 핵실험으로 지구가 멸망한다는 시나리오도 아니다. 케이블티비 XTM 에서 방영한 영화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에 대답이 있다.
극장용 영화는 아니고 2004년 미국티비방송용 영화인데, 174분(약 세시간)의 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지루하지 않다. 제목 그대로 '지구 멸망의 날'을 다루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상기후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어디는 시베리아를 넘어 알래스카 기온이 되었다가, 어디는 세상에서 가장 더운 나라의 기온수치를 넘어서는 등, 미국 전 지역에서는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온갖 기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주마다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거나 허리케인이 밀려오거나 토네이도가 상륙하여 휩쓸어가거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자연재해가 미국을 덮쳤다.
지구가 멸망하는 시나리오는 <아마겟돈> <투마로우> <딥 임팩트> <우주전쟁> <인디펜던스 데이> 등등을 통해 많이 접해봤지만, 지구가 멸망하는 원인은 영화마다 각기 다르다. 외계인의 지구침공으로 인해, 우주에 떠도는 거대한 행성과의 충돌로 인해,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악의 댓가로서 심각한 자연재해가 발생함으로써, 지구는 멸망한다. 기존에 나와있는 극장용 영화 중에는 <투마로우>가 이 영화와 가장 근접하다고 하겠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대해 사람들의 여러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이 그동안 지구를 병들게 한 댓가이므로 당연하다며 운명에 순종하는 유형, 어떻게든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해 원인을 제거하려는 과학찬양 유형,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살고봐야하지 않겠느냐며 종말이 올때까지 벌벌 떠는 유형 등. 네이버와 엠파스에 질문을 올린 이들은 특히나 지구멸망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의 감정은 어디로부터 비롯되는가. 같은 충격에 대해서 각기 다른 반응양상을 보이는 이들은 어디에서부터 그 차이가 드러나는지 모르겠다.
영화는 이상기온에서부터 재앙을 감지하고는 기상학자들을 비롯한 과학자들을 불러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함으로써 원인을 찾아내고자 한다. 원인을 찾으면 재앙을 막을 수 있으니. 뉴욕에서 토네이도 두 개, 아니 세 개가 만나 도심을 휩쓸고 다니는 꼴이란, 고질라나 킹콩에 비할 바가 못된다. 토네이도는 방향성 없이 도심을 이리저리 쓸고 다니며 자동차, 사람, 건물 등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늘로 날려보낸다. 어느날 우리 집 앞에 자유의 여신상이 떨어져있다면 아 토네이도구나 하면 된다.
영화는 지구멸망에 다가가는 모습을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극장판 영화가 아니어서 그런지, 이 영화는 흥미진진한 기승전결의 스토리보다는 서서히 지구에 재앙이 닥치는 순간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주목한다. 영화는 지구멸망의 원인이 아주 사소한 부분에 있을 수 있고, 그것은 분명코 인간의 잘못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듯 하다. 자연 상태 그대로 놔둔다면 사실상 생태계는 문제가 생길리 없다. 모든 것이 인위적인 행위를 가함으로써 연쇄작용에 의해 발생한다.
- FTA
재밌는 것은 영화 속 전기회사가 개인의 소유이고, 회사는 문제가 생기자 고객들에게 전기를 보급하고자 외부회사의 전력을 비싼값에 끌어오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이다. 사회의 공공재가 개인의 사적 소유 아래에 있을 때의 상황은 이 영화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물이나 전기, 가스, 지하철 등이 어떤 개인에게 소유되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은 뻔하다. 하나의 재화를 놓고 몇몇 회사가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고, 회사의 독점 내지 과점으로 인해 고객은 비싼 값에 기본재화를 사들여야할지도 모른다.
지난주 어느 신문에서 한미 FTA가 체결된 그 이후의 모습을 그려놓은 글을 봤다. 소방산업이 민영화되었을 경우 여러 업체가 경쟁을 하면 서비스는 개선될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빠르게 대처하고 불도 더 잘 끌 것이며 인명피해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기업은 이익을 내야하고 주주들에게 배당도 줘야한다. 불이 났다고 무조건 불을 꺼줘서는 안되며, 돈을 받아야 한다는 앞선 전제가 깔린다. 경영자는 이왕하는거 돈 되는 강남지역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길 원할 것이고, 못사는 동네 주민들을 고객으로 유치하고 싶진 않을 것이다. 서비스가 뛰어난 만큼 이윤은 그만큼 많이 들어온다. 거꾸로 이윤이 많이 들어올 곳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결국 불이 났지만 아무도 꺼주지 않아 사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고, 전화를 했더니 "죄송합니다. 고객님이 계신 지역은 저희 서비스 지역이 아닙니다." 하고 끊어버릴지도 모른다.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에서는 전기재화가 민영화되었을 때 어떻게 운영되는지,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지역은 전기가 들어오고, 어느 지역은 전기가 안들어온다. 회사는 비싼 돈을 주고 우리회사에 전기를 맡긴 고객들을 위해 외부 회사의 전기를 끌어온다. 애초 이 전기회사는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심각한 시스템상의 문제가 있었고, 외부의 간단한 바이러스에서 쉽게 무너질 구조였던 것이다. 최고 시스템 책임자는 이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했지만 회사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무시해왔다. 그리고 결국 이런 사고가 터졌고, 그제서야 회사는 시스템 상의 문제를 인지하기 시작했다. 역시 회사의 제일 목적은 이윤이다. 돈이 안되면 안한다. 돈이 많이 들면 안한다.
지구의 생명이 어디까지인가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온갖 과학기술을 동원하여 지구가 얼마나 병들었는가를 분석/언급하고 있지만, 언제 지구가 멸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지금 현세의 삶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오늘을 산다는 것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지구에 재앙이 닥친다는 사실에 대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있다는 신문지상의 기사는 그저 아침 식사와 병행해 한번 읽고 내려가는 정도의 것으로 치부되고, 막상 올해 겨울이 따뜻하더라도 그것이 지구재앙의 시작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오늘 겨울이 따뜻해서 활동하기 좋으니까 내일 모든 것이 녹아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로 일관한다. 오히려 지구멸망의 시작을 먼저 눈치채는 것은 과학자들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이 지구를 병들게 했고, 과학기술자들이 지구멸망을 감지한다는 사실은 재밌다.
감독 딕 로우리는 2004년에 <카테고리 6 : 지구멸망의 날>을 만든데 이어, 2005년엔 <카테고리 7 : 토네이도>를 내놨다. 카테고리가 왜 1부터 시작하지 않고 6부터 시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시리즈는 이 두 편이 전부이고, 전편을 재밌게 본 나로서는 후편까지 관심이 간다. 아마도 비디오로는 없을 듯 하고, 어느날 우연히 케이블에서 마주하는 수 밖엔 없겠다.
p.s 지구멸망이라기보다는 미국멸망의 날이 더 맞다. 재앙의 대상은 미국 영토에 한정되어 있고, 타국은 지구로부터 소외되었다. 미국이 만드는 모든 영화에서 언제나 지구의 위기는 미국에 먼저 오고, 미국의 멸망이 주축이 된다. '좋은 것도 미국 먼저, 나쁜 것도 미국 먼저'는 공평함을 보여주기보다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 지구의 중심임을 재확인시켜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