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저자 김용규에 대한 관심은, 그가 지금까지 쓴 책들에게로 나를 몰아갔고, 결국 좋아하지 않는 환타지 장르의 소설까지 읽게 만들었다. 검색창에 '김용규' 라 쳤을 때 뜨는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그의 다른 책들과는 성격이 너무도 달라, 동명이인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분명 저자 이력을 확인해보니 그가 맞았고, 그렇다면 그는 철학서를 쓰면서, 곁다리로 환타지 소설가로서의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런 의문은, 이 책의 부제를 통해 해결된다. 철학 환타지.  아마도 이 책이 단순한 환타지 소설이었다면 접하지 않게 되었거나 뒤늦게 접했을 것이다. 환타지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전자의 이유이고, 그것이 김용규의 작품이라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하지만, '철학 환타지'라는 부제를 통해 두 가지 선택은 모두 날아갔고, 곧바로 이 책은 장바구니로 들어갔다. 

  저자후기를 통해 김용규는 이 책이 <소피의 세계>나 <장미의 이름>보다 더 유익하다는 과분한 찬사도 들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건 사실이다. 두 책을 모두 읽었고 두 책 모두 좋아하는 나로서는 감히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싶다. <소피의 세계>는 철학소설이고,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이고,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환타지 소설이라는 각각 다른 세 장르의 영역에 있지만, 세 책은 재미와 동시에 읽는 이의 지적욕구를 자극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하겠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장미의 이름>만큼이나 흥미진진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어렵지 않고, <소피의 세계>만큼이나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그만큼 장황하지 않다. 쉽게 읽히면서 많은 철학지식을 동원하지 않고도 윤리학과 인식론의 핵심적인 고민들을 안겨주고 적절한 지식을 선사해준다. 동시에 그리 두껍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첫장을 열면서 마지막장을 닫을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등장해 자신의 영역을 서서히 굳혀가고 있는 철학자 김용규가 궁금하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경험들을 했길래 이런 책을 쓸 수 있는걸까. 그가 지금까지 쓴 책이라고 해봐야 철학통조림 시리즈와 이 책이 다이지만, 또 그것이 철학사상서가 아니라 청소년 책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란 생각이다.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나오기 위해서는, 소설의 요건을 갖추어야 하고, 해박하고 깊이있는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그 밖에 등장하는 물리학, 생물학 등등의 지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어느 하나 만족시키기 어려운데 이 모든 것을 조합해 제대로 조리한 그가 대단해보인다. 그는 전공인 철학 뿐 아니라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많은 지식을 섭렵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지식들과 탁월한 글솜씨가 조화를 이루어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했다. 동생인 김성규 씨와의 공동작인데, 이력으로 추정컨대 김용규는 내용을 담당하고, 김성규는 이것을 소설로 다듬는 작업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때 두 권으로 나뉘어 선보였던 이 책이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지금의 출판시장의 풍토와 그때는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하고 재밌는 책들이 많이 나오면서 철학대중서를 비롯한 인문대중서들이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 책은 껍질을 바꾸고 다시 나올 수 있었으며, 대중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용규의 통조림 시리즈가 인기를 끌지 못했다면, 그가 주목받지 못했다면, 어쩌면 이 책도 다시 한번 묻혀졌을지 모른다. 통조림 시리즈는 김용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고, 김용규에 대한 관심은 그의 책을 다 사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결국 이 책도 그러한 맥락에서 접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새로운 형태의 환타지 소설이 아니다. 이는 저자의 초판후기를 통해 확실히 드러난다. 김용규는 분명 이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게다. 그 메세지 전달이 효과적이려면 쉽게 읽히는 소설이어야 할 것이고, 환타지 장르는 철학과 과학 지식을 적절히 조리하기 좋은 그릇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은 전문인의 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려고 노력하며 또한 되어야만 한다. 전문인이란 기술자, 과학자, 관리자, 경영자, 의사, 법률가, 디자이너 등과 같이 도구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힘은 실용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인의 활동은 그 본성상 개인적이며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거시적 전망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들이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의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다.

  문제는 또한 우리의 삶이다. ... 중략 ... 우리의 삶과 사회를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는 다양하고도 숭고한 인류 보편적 가치들 대신에 실용성, 경제성이라는 획일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기계적이고도 과도한 경쟁 체계 속에 살아야 하는 오늘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황폐해지고 있다. 이들의 삶은 마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열차에 오른 것과 같이 불안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해결의 열쇠는 지식인이라는 말에 있다. 지식인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하며 사회에 구현하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초개인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도덕적이고 또한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에 의해서만 사회가 발전하며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단순한 전문인이 아니라 지식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식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다. ... 중략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바르고도 바람직한 지식과 견해를 가져야만 하는데,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곧 사상들이다. ... 중략 ...

  <알도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교육, 철학, 종교 등등 각 분야에 관한 다양한 사상들을 소설 형식에 담아서 독자들이 건전한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각종 지식들을 흥미롭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풍요롭고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한 삶의 지침서이며, 전문인이 아닌 지식인이 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하는 책이다. 중요한건 여기 나오는 철학사와 과학사의 지식이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사유하는 나의 삶이다. 이 책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려주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의 풍요롭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문제다. 한참 진로의 고민에 빠져있는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삶의 나침반 없이 하루하루 반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유용'하다. 철학은,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다. 다만 사람들은 철학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유용하게' 다루지 못할 뿐이다. 아직까지 철학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있는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재미를 느끼고, 이 책을 '읽은 후에' 사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철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철학을 사랑하게 되면 다음은 나의 삶이다.

 *  <지식을 위한 철학 통조림> 두 권과 <도덕을 위한 철학 통조림> 두 권을 먼저 읽고, 이 책을 접한다면 더욱 수월하게, 유익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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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읽은 어떤 철학 대중서보다도 '안' 철학적이고, '안' 어려운 책이다. 오늘은,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천시받는 동시에 인기를 끄는 기이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가 부풀려진 것이니, 거짓된 것이니, 인문학을 하는 이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니  '인문학의 위기'의 실제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이 천대받는건 명백한 현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현실의 삶과는 달리, 출판시장에서는 철학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마도 논술열풍 때문이렸다. 이렇게라도나마 사람들이 인문학 지식과 인문학적 사유에 관심을 갖는건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얼마전 황지우 시인이 문화부장관에 내정되었다는 깜짝 기사를 봤는데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제 얼핏 버스 라디오에서 문화부장관에 누가 내정되었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철학콘서트>는 황지우 시인의 동생인 황광우 씨가 쓴 책이다. 권두문을 작성한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서양 사람이라면 한 시대의 의식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고 흔히 간주되곤 하는 철학자, 예술가, 행동가가 한 가족 안에 모여 있다는 데에 경탄을 표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황광우 씨의 첫째 형은 스님, 둘째 형은 시인, 그는 노동운동가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정말 각각의 다른 세 분야에 머물며 도를 닦는 이 형제들이 대단해보인다.

  저자 황광우는 고교 시절 반독재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 제적되었고, 검정고시로 서울대 사회과학대에 입학했으며, 19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제적을 당하며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살았다. 1998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뒤늦은 나이에 졸업했고, 2002년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광주 '다산학원'에서 제자들과 고전을 공부 중에 있다한다.

  참으로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으면서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깊이있는 자기성찰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탐독한 고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몸으로 부딪히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런지 <철학콘서트>는 노동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대중적인 철학책도 나름 글쓴이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쓰여진다. 철학사의 객관적인 지식을 쉽게 전달하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나의 주관에 따라 대상철학자를 선정하고 나의 주관에 따라 그들을 해석하는 책도 있다.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는 후자에 속한다. 고로 이것이 철학사에 등장하는 철학자에 대한 객관적 시각이다, 라고 생각하지는 말 것. 철학자 선정에서부터 그에 대한 해석까지 모든 것은 황광우 개인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하여 이 책이 잘못 쓰여졌다는 말은 아니다. 소위 '객관적'이라 칭하는 그것들도 실상 객관적일수 없으며, 단지 많은 이들의 평가와 해석이 주로 그렇다, 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 책에서 황광우는 흔히 철학사에서 다루지 않는 이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고작 10명 밖에 안되는 이들을 다루면서 철학사에서 제외한 '철학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것은 저자 황광우의 삶의 이력을 타고 들어간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와 노자, 예수와 석가, 토마스모어와 애덤스미스, 퇴계이황,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이들을 담아냈다. 서양 고대철학의 핵심인물들과 종교계의 성인들, 철학자로 다루지 않는 토마스모어와 애덤스미스, 한국철학의 거장 이황, 여기 다룬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마르크스까지. '차례'만 보고서는 대상을 선정한 기준을 알 수 없다. 하지만 내용을 읽으면 이해된다.

  이 책이 다른 철학대중서들과 다른 독특한 점 중 하나는, 서로 잘 비교하지 않는 이들을 끌어다 비교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비교하고, 애덤 스미스와 플라톤,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 애덤 스미스와 맹자를 비교한다. 순서도 어떤 기준인지 알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석가가 나오고 공자가 나오고 예수가 나온다. 그러다 퇴계가 나오고 다시 토마스 모어가 나오고, 끝에가선 마르크스 이후에 노자가 나온다. 나름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토머스모어에서 애덤스미스, 마르크스, 노자로 이어지는 부분은 그럭저럭 이해가 되지만, 예수에서 퇴계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무런 맥락이 보이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지금, 저자 황광우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은 철학사를 좀더 쉽게 풀어 설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철학자들을 빌어 노동을 이야기하고, 삶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가장 황광우의 삶과 어우러지는 철학자가 있다면 마르크스가 될 것이요, 다음과 같은 문구는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대표하여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 (p251-252)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

  황광우는 마르크스 이전에 애덤 스미스 편에서 이미 이와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 관계 속에서 살아 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라고. 이 부분은 애덤 스미스와 한비자를 비교하며 설명하던 중 <한비자>를 인용하며 첨언한 말이다. 마르크스와 유사한 이 발언이 애덤스미스와 한비자를 비교하는 부분에서 나왔다는 것이 재밌다.

  황광우가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게 콘서트를 선사했으니 이제 독자들이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 삶으로 들어가는 길만 남았다. 첫 장을 읽는 순간 당신은 이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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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1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4-22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어떻게 황광우씨를 아시는거에요? 님은 유명인이랑 친분이 있나봐요. 담에 나도 껴줘요. :)

eachtogether 2007-05-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제가 알기로는 황광우 아저씬 감옥에 안 가셨다 하신 것 같은데,,

웬지 민주화 운동 한 사람이라면 감옥에 갔다 왔다는 생각을 가지신 것 같아서 몇 글자 끄적입니다. 물론 제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만요..

마늘빵 2007-05-0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감옥에 갔다는 기록은 못 본 거 같습니다.
(이치투게더님 반갑습니다)
 
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절판


당신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당신은 칸트처럼 인간의 행복이 도덕적 의무의 준수에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벤담처럼 쾌락의 증대에 있다고 보는가? 어느 쪽을 추구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유토피아는 당신의 철학과 가치관과 취향을 간섭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리는데 있다. 행복은 당신이 찾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데 있다.
(토마스 모어 편 中)-188쪽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열심히 일합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이므로 결핍과 공포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사라졌고 아울러 돈을 벌려는 열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돈으로 인한 많은 범죄가 사라졌습니다. 금전 사용의 종말은 사기, 절도, 강도, 말다툼, 분규, 반란, 살인, 배신, 독살 등 많은 범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인한 불안, 긴장이 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가난, 그것이 돈의 결핍을 의미한다면 화폐의 소멸은 가난의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中)-192-193쪽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의원이 환자의 고름을 빠는 것은 그의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해관계 때문이란다. 장의사는 그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음을 바라는 악마적 심성을 갖는 것이고, 이렇게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섭섭해하는 분이 있다. 스미스의 대선배 격인 홉스가 한마디 아니 할 수 없다.

... 중략 ...

만일 국가가 없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단언한다. 그야말로 인간을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홉스는 한비자나 모두 인간을 이기적인 조재로 보았는데, 우리는 왜 유독 스미스의 이기심에 주목하는가? 홉스가 한비자 모두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전제로 전제군주의 강력한 통치를 역설했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스미스는 "정부는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말라" "각자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하도록 자유방임하라" "그것이 공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라며 자유주의 경제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3쪽

"그들은 자신이 세운 이상적인 계획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계획이 조금이라도 수정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과 수많은 이해는 아무 고려도 하지 않은 채, 계획의 모든 부문을 완벽하게 짜나간다. 그들은 장기판에서 말을 옮기는 것만큼 사회를 계획하는 일을 쉽게 생각한다. 장기판의 말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독자적인 운동 원리에 입각하여 움직인다. 인간 사회가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여준다면 사회는 조화롭게 굴러가겠지만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사회는 불행해진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07쪽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인 욕구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경우가 단 한 순간도 없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

토머스 모어가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넘어섰다면, 애덤 스미스는 대중을 역사 변화의 창조자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능가했다. 역사는 철인의 지혜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창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사상은 이기심을 존중한 점에서 한비자와 유사하다면, 대중의 경제 활동을 존중한 점에서 맹자와 유사하다. 안정된 생산 활동이 안정된 심성을 낳는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8쪽

고대 공동체 내의 분업과 근대 공업 내의 분업은 무엇이 다른가?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의 대부분은 공동체 자체의 직접적 수요를 충족하는 물품인 반면, 근대 공업의 생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을 분배하는 원리는 관습인 반면, 근대 공업에서 각 생산물의 가격을 매겨 적당한 보수를 받게 하는 것은 시장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작업자는 물품의 전 공정을 다루는 장인인 반면, 근대 공업의 작업자는 무수히 많은 공정으로 잘게 나누어진 부분 노동의 수행자이다. 요컨대 근대 공업 노동자 그 자체가 기계의 부속품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0쪽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을 합리적 행동으로 간주했고, 효율을 위해서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법칙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발생하는 사회의 불평등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처럼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형평을 추구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했고, 형평을 위해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발생하는 경제의 비효율이나 노동자의 게으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유냐 평등이냐?
(애덤 스미스 편 中)-216쪽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과 소통하며, 노동의 열매를 사회에 제공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진화해왔으며, 노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노동의 과정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외적 강제에 의해 통제되는 한, 인간은 불행하다. 자아를 실현하는 이 노동 과정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을 때, 노동자가 느끼는 것은 비참함이요, 자아의 상실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9쪽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타인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20-221쪽

"거미는 직포공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래 자기의 머릿속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 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본론> 中)-228쪽

"1.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된 특정의 생산관계 속에 편입된다. 생산관계는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와 조응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이 경제구조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며(교육, 예술, 종교, 윤리 등) 특정 형태의 사회의식들이 이 상부구조에 조응한다.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활동 전반의 성격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1-252쪽

"2. 기존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구속하는 질곡으로 변한다. 이리하여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가 변하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재빨리 변혁된다.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생산력이 그 안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결코 사멸하지 않으며, 보다 높은 새로운 생산관계는, 낡은 사회의 태내에서 새로운 물질적 조건들이 성숙하기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자기에게 제기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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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품절


오늘날은 전문인의 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려고 노력하며 또한 되어야만 한다. 전문인이란 기술자, 과학자, 관리자, 경영자, 의사, 법률가, 디자이너 등과 같이 도구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힘은 실용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인의 활동은 그 본성상 개인적이며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거시적 전망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들이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의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다.
문제는 또한 우리의 삶이다. ... 중략 ... 우리의 삶과 사회를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는 다양하고도 숭고한 인류 보편적 가치들 대신에 실용성, 경제성이라는 획일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기계적이고도 과도한 경쟁 체계 속에 살아야 하는 오늘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황폐해지고 있다. 이들의 삶은 마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열차에 오른 것과 같이 불안하다.
(초판 저자 후기 中)-477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해결의 열쇠는 지식인이라는 말에 있다. 지식인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하며 사회에 구현하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초개인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도덕적이고 또한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에 의해서만 사회가 발전하며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단순한 전문인이 아니라 지식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식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다. ... 중략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바르고도 바람직한 지식과 견해를 가져야만 하는데,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곧 사상들이다. ... 중략 ...
<알도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교육, 철학, 종교 등등 각 분야에 관한 다양한 사상들을 소설 형식에 담아서 독자들이 건전한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각종 지식들을 흥미롭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초판 저자 후기 中)-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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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구가 마음에 드셨나요? :)
이 책 뒤에 초판 저자 후기 문구들이 전부다 맘에 쏙 들어왔습니다. 환타지 소설이지만 지향점은 그곳에 있죠.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곧 리뷰도.
 
대장부의 삶 - 옛 편지를 통해 들여다보는 남자의 뜻, 남자의 인생
임유경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최근 조선 지식인들의 삶에 주목하는 책들이 여러권 나오고 있다. <대장부의 삶>은 이런 흐름 속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편지글을 묶어 오늘날의 한국어로 '번역'해 내놓은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 선비들인, 허균, 권필, 이덕무, 정약용, 박지원, 김정희, 이순신, 기대승, 이황부터 시작해서 잘 알지 못하는 홍귀달, 박사해, 조익, 이천보, 남구만, 이광사, 박태보, 이학규 등등의 선비들의 편지글까지 추스리고 있다. 책 한 페이지 분량도 안되는 짧은 편지글부터 시작해 두 세 페이지가 넘어가는 긴 편지글도 있고, 책을 돌려 달라고 떼쓰는 가벼운 쪽지 개념의 편지글이 있는가 하면, 상대방을 훈계하고 다그치는 편지글도 있다. 

  책은 주제별로 많은 편지글들을 분류하고 있는데, 뜻을 세우다, 벗으로 산다는 것, 세상살이 고생길, 아버지로 산다는 것, 죽음 앞에서의 다섯 범주를 사용하고 있다. 학문과 벗사귐과 삶과 관계와 죽음에 대한 이들의 편지글은 때로 지하철 간에서 속으로 크큭 거리게 만들기도 하고, 자세반듯 비장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웃겼다 울리며 마음을 動하게 만들고, 머리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도 한다. '대장부의 삶'이라 하여 유명한 조선 선비들의 비장함 각오와 학문에 정진하는 자세 등을 예상했다면 뜻 밖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책을 빌려준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돌려주지 않느냐며 상대를 어르고 달래고 다그치고 독촉한다. 한번 빌려준 책은 '빌려' 준 것이 아니라 그냥 '준' 것이지 않느냐며 어찌 책을 달라고 하느냐고 대답하기도 하는 등 오가는 편지들이 아주 재미있다. 역시 선비들인지라 학문하는 자세나 책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지만, 때로는 아버지가 아들의 생활습관을 훈계하고, 멀리 유배 떠난 동료에게 안부를 전하고, 희망을 갖도록 만드는 편지들도 있으며, 열여섯에 시집가 스물다섯에 죽은 딸을 향해 부모로서의 슬픔을 표하는 긴 편지글에서는 멈추어 울컥한다. 선비라하여, 학자라하여, 그들이 우리와 다른 것은 없다. 그들도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고, 한 사람으로서의 삶이 거쳐가는 희노애락의 모든 감정들은 그들에게도 해당한다. 울고 웃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짜증내고 하는 모든 감정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다. 고고한 학자라하여, 청렴하고 반듯한 삶을 살았던 선비라하여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들을 학자나 선비로서가 아닌, 우리와 같은 하나의 삶을 살아간 사람으로서 마주한다.  

  "잔뜩 분위기 잡는 선비들일 줄 알았는데 아주 하찮은 문제에서조차 범인처럼 억지를 부리며 자기주장을 고집하곤 한다. 때로는 분위기 잡고 심각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농담으로 일관한 편지를  쓰기도 하는 등 선비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재밌게 읽던 와중에 새삼스럽게 얻은 깨달음 하나. 손으로 편지를 써본 지 오래인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형식의 간소화가 마음의 간소화로까지 번지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 뒷날개의 본인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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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17 2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arine 2007-04-24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서점에서 보고 살까 말까 고민 많이 했던 책인데, 읽으셨군요

마늘빵 2007-04-2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기대는 하지 마시고요, 편지글의 내용이 즐겁습니다. 딱 그 정도 예상하시면 돼요. 옛 선비들의 편지글을 읽는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