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평등을 말하다 SERI 연구에세이 51
곽해룡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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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이 강한 학교사회에도 신선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서울 D고에서는 교사들의 출신대학별 모임이 자진 해체됐다. 학연이 직장 분위기를 해친닫는 인식 아래, 1년에 몇 차례씩 모이던 동문 회동을 구성원의 합의하에 해산했다는 소식이다. 학교장이 앞장서 자신의 출신대학 모임을 부추긴 경우와 얼마나 대조되는가. 교사들의 이러한 자정 노력이 확산되었으면 좋겠다.-44쪽

늘 예외적인 특별 대우를 원하는 사회, 공정한 경쟁보다는 불공정한 논리가 일상적으로 적용되는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공정한 게임에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준법정신을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 법을 지키는 사람은 바보 취급당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58쪽

왜냐하면 학교는 교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학생에게 실제로 여러 가지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규율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전보다 학생들의 자기주장이 강해져 교사의 영향력이 다소 약화된 감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교사가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입시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때로는 이러한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학부모나 학생들이 교사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역이용되기도 하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미명이나 명분을 벗긴 실체는 보잘것없는 경제적 욕심에 불과할 때가 많으며, 이를 눈치 챈 학생들에게 교사는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62쪽

요즘 아이들은 사람보다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컴퓨터에 애착을 느낀다. 나와 생각이 다른 친구와 어울리면서 말다툼을 벌이기보다는 내 맘대로 되는 컴퓨터와 친구하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인간 친구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학교에서도 친구와의 의견 조정을 통한 협력을 기피하고 각자 자기주장만을 내세워 상호간에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현 입시 제도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별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으로 인해 친구 없는 아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마음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 없이, 온종일 컴퓨터만 가지고 노는 자폐적인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놀이와 생활을 공유하는 또래집단의 의미가 약화, 변질되고 있다.-75쪽

"만남이 교육에 선행한다"는 볼노의 말처럼 교육 이전에 '어떤 학생'이 '어떤 교사'를 만나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느냐 하는 것이 교육의 수준을 결정하고 인생의 방향을 좌우한다.

사제 간의 인격적 만남은 질적인 교육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필요조건이다. 인성 교육을 배제한 지식교육은 그 효과가 의심스러우며, 지식을 탐욕 추구의 도구로만 사용하는 '불량시민'을 양성할 위험성이 높다-85쪽

학생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거나 자신이 부모의 결정을 무조건 따르는 의존적인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여 신중하게 선택한 것을 추구하면서 느끼는 성취감의 진수를 맛보지 못하고 있다.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86쪽

교사 평가의 궁극적인 목적은 정체와 매너리즘에 빠진 교직 사회를 자극하여 교사의 자질 향상 및 교육에 대한 교사의 적극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 기준과 객관성을 담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를 강행하는 것은 교육적 목적 보다는 다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한다.-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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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과 학부모들이 바라는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이에게 필요한 기초적 지식을 잘 가르쳐 주는 선생님입니다.
간명하지요. 또 그런 선생님들이 실제로 많이 계십니다.
정치적인 관점은 전혀 관련이 없지요.
부족한 선생님들께서 자위책으로 정치적 관점을 내세우는 것 같습니다.
동문서답인거 같아서 딱하답니다.
아이들이나 부모들이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체제도 아니고..
군소리 말고 주는대로 받아 먹어라인 것만 같답니다.

하는 수 없이 안되는 학교, 도저히 안되는 선생님들의 교육에 절망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은 유학을 가거나 학원에 가거나 과외를 받거나 합니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정말 참담한 지경입니다.
아프락사스님.


마늘빵 2007-11-26 17:58   좋아요 0 | URL
교사평가제에 있어서 여러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평가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상황이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에요. 교장이 하면 교장에게 아부해야하고, 학부모가 하면 평소 학부모에게 잘 보여야하고, 학생이 하면 학생에게 수업내용과는 상관없이 인기를 받으려고 잘 놀아주는, 또 점수도 막 퍼주는 상황을 피할 수 없어요. 대학에서도 교수평가를 하면서 학점이 짠 교수들은 상대적으로 짠 평가를 받게 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목격하죠. -_- 평가는 참 어렵습니다.

사실상 교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되지 않고. 하지만 영 부실한 교사들이 많다보니 그들을 어떻게든 걸러내고 개선시키고자 이런 평가를 기획하는 것이고, 멀쩡한 다른 교사들과 그렇지 않은 부실한 교사들이 함께 거부권을 행사할 수 밖에 없는 형국을 만들고 있는거죠. -_-

저는 아직 정식 교사도 아니고, 실력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실력있고 인격적으로 괜찮은 교사라 할지라도 이런 평가는 매우 거북스러울 거 같습니다. 내가 멀쩡하니 그래 평가를 받자, 가 아니라, 나를 교단에 세웠으면서 믿지 못하고 평가하려는 것을 거부하는거죠. 어느 쪽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아야 자율적으로 독립적으로 제 스스로가 생각하는 올바른 방식으로 학생들과 관계 맺을 수 있을 거에요.

이와는 별개로 다른 말인데, 저는 학부모와 학생에게 학교를 선택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전에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원하는 다양한 학교의 신설이고요. 외고를 원하면 외고에 보내주고, 컴퓨터고를 원하면 컴퓨터고에 보내주는 식으로. 중학교 전체 성적으로 기준을 나눌 것이 아니라, 그쪽에 재능이 있고 간절히 원하는가가 우선시 되어야 할거에요. 가령 외고를 희망하는 학생은 외국어 성적과 국어 성적 등을 기준으로 나누고, 컴퓨터고 쪽은 실기시험을 보거나 컴퓨터 교과 성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롤스 & 매킨타이어 : 정의로운 삶의 조건 지식인마을 23
이양수 지음 / 김영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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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초적 입장은 말하자면 일종의 생각을 통해 각각의 입장의 우열을 가려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현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어떤 입장이 다른 입장보다 나은지를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우열을 가리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법은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하고, 그 조건하에서 어떤 결정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 결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월함을 보여줄 수 있는 기준과 절차이다. 그래서 원초적 입장은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인 실험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상적인 사유실험이 중요한 이유는 현대의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공리주의 정의원칙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보다 우월한 정의원칙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35-36쪽

개인마다 삶의 목표와 계획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잣대로 그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는 모두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즉, 각각의 개인들은 모두 상이한 자기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인격적으로 존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합리성의 차이가 인간의 삶에서 근원적인 갈등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인간들은 갈등한다. -51쪽

민주주의 사회란 각자의 의견과 개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능률적이고 생산적인 사회관계를 모색하는 체제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순투성이다. 능률적인 생산체제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며, 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려면 생산적인 사회체제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62-63쪽

정의에 관한 우리의 직관적인 믿음은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원칙이든 보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보편적이란 자기의 선입견이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흔히 이성적으로 말할 때 쓰는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운 원칙은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사회의 정의원칙은 사회 성원들의 선택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 승인할 수 있는 정의원칙은 우리의 도덕적 평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다만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적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정한 상황이다. 굳이 공정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공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미 도덕적인 선택의 기회가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평가를 위해서는 공정한 상황 못지 않게 공정한 절차의 수립 또한 중요하다. 공정한 상황에서도 절차가 공정하지 못하면, 얼마든지 잘못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의원칙의 도덕적 선택은 원칙적으로 공정한 상황과 공정한 절차를 요구한다. -67쪽

한 사람이 공리적 이유로 윤리적 판단을 했다고 해도 도덕적으로 비난할 근거는 없다. 그 사람의 도덕적 사유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판단이 사회적 판단의 정초라면 상황은 전혀 다르다. 사회적 판단은 한 개인의 동의가 아닌 사회 성원 모두의 동의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104쪽

롤스의 출발점은 철저히 현대 사회가 당면한 현안들이다. 더욱이 그 해결 방법은 사회의 부당한 관행과 정의롭지 못한 제도를 철폐함으로써 그 사회에 살고 있는 개인들이 진정으로 사회 협동을 이룩하면서 자신의 것을 찾아가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 즉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비춰줄 수 있는 일종의 횃불이었다. 물론 이 횃불이 구체적인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을 드러내기엔 역부족일 수 있다. 그러나 롤스는 방향성의 제시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폭력적인 사회를 혐오하는 것도, 그 절차의 비민주적인 측면을 부정하는 것도, 정의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롤스의 해결책은 유토피아적인 색채가 강하다. 그러나 그는 정의원칙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결국 유토피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론을 실현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109-110쪽

공리주의의 실질적인 문제는 사실 사회가 수많은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혀 다른 개성과 삶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점을 잠시 잊고 있다는 데 있다. 개인의 개성이 다른 만큼 그 생각의 차이도 크다. 이 같은 차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성의 핵심이며 동시에 그것은 사회생활의 공통전제다. 그러나 공리주의자들은 이 같은 생각의 차이보다는 모두에게 통용될 수 있는 공평하고 불편부당한 개인의 판단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는 물론 근대 과학적 사유의 전형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이성을 통해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듯이, 사회와 인간관계에 관한 법칙도 이성을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깊게 뿌리박혀 있다.

-118-119쪽

(위에 이어서)

그러나 이와 같은 사유는 각 개인들이 상이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그 개성의 차이가 사회협력 과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보지 못한다.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분명 이상적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사횐는 사실 어떤 생산적인 활동도 없다. 모두가 같은 능력,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보라. 아무것도 나아지는 것이 없다. 바로 그 점 때문에 롤스는 사회협력을 위해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런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는 제한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제1 정의원칙을 충족시키면서도, 각 개인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공정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기회가 공정하게 부여되지 않는 경쟁에서 그 자신만의 고유한 능력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119쪽

매킨타이어의 주장에 따르면 원초적 입장은 일종의 개인의 태도변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장치다. 이 장치 안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이익이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용인받을 수 있는 관점에서 모든 사안을 판단할 것이다.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관점을 이미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각종 사회 제도의 근간이 될 분배정의의 원칙을 찾을 수 있다.

... 중략 ... 특히 미완성적 인간이 삶을 통해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배움의 과정'과 '인격완성'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저평가될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삶의 완성은 근대인의 이상과 다르게 오직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더불어 사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룩하는 것이고, 공동체 없이 어떤 윤리적 삶도 가능하지 않다. -145쪽

롤스는 분명 이런 형태의 덕(밑줄그은이 주 : 습관적 행동을 통해 가꿔나가는 덕)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인간 행위의 정의로움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제도가 인간의 행위에게 영향을 미치는 파장이 한 개인의 도덕적 삶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제도의 정의로움이 인간 행위의 그것보다 중대하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행동과 그 실천적 덕을 추종한 덕 철학보다는 개인과 사회제도와의 관계에서 정의문제를 고찰하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롤스는 정의개념을 결국 개인과 사회제도를 연결시켜주는 핵심 개념으로 본 반면, 매킨타이어는 이러한 연결고리가 매우 추상적인 인간을 전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국 그 강조가 서구 근대철학의 전통을 전적으로 수용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148쪽

롤스의 가정은 옳음의 관점이 각 개인의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이고, 매킨타이어의 가정은 그 옳음의 관점이 보편타당한 영원의 진리라고 할 수 없으며, 오히려 구체적인 가치를 통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들의 삶의 방식 속에서 정당화된 합리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51쪽

사회 재와의 불평등 문제가 사회악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보다도 사회제도가 정의로워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사횢데도가 정의롭지 않고도 과연 그 사회제도에 얽매여 살아야 할 사람들이 정의롭게 살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분명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정의로운 인간은 더욱 그리워진다. 그러나 사회 속에서 정의로운 인간이 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롤스는 만일 사회가 정의로울 수만 있다면, 비록 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들도 별 다툼없이 사이좋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정의로운 사회의 제도가 인간 삶을 제대로 규제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었다. 사회악을 송두리째 뿌리 뽑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일관된 정책이 필요할지라도 말이다. -153-154쪽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은 우리 생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자신과 관련된 모든 조건을 잠시 잊고 오로지 사회가 필요한 이유와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정의원칙에 도달할 수 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해, 원초적 입장은 모든 사람들이 돋거적 관점에 들어설 때 가능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원초적 입장은 도덕적 관점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롤스의 원초적 입장의 사유실험은 일상생활의 이해관계에 갇혀버린 개인들이 사회생활에 필요한 관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인간의 도적적 능력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자기 욕망에 갇혀 타인을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타인을 진정한 타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도덕적 삶인 것처럼, 원초적 입장은 사회의 필요와 그 효율성을 위해 조정해가는 원칙을 도덕적 관점에서 추론하여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다. -154-155쪽

법치주의는 각 개인이 지닌 윤리적 선택의 중요성을 도외사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법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상황을 언급한 것이지 구체적인 인간들이 행해야 할 행동규범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던지는 의사의 선의의 거짓말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법은 우리 삶의 일반적인 방향성을 언급할 뿐이지, 특정 상황에서 특정 인간이 다르게 행동할 여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윤리적 선택과 행동은 사실 모호한 상황과 이유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점에서 상황에 맞는 윤리적 행위를 하는 습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0쪽

"과연 원초적 입장의 관점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가?"

이 물음 속에는 강한 거부의 메세지가 담겨있다. 이상적인 인간 관점의 전횡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규범으로,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규범은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지 않을까? 매킨타이어 입장에(서) 보자면 도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 도덕규범을 찾으려는 근대의 도덕적 질문은 '무엇을 해야마 하는가?'였다. 이 물음은 개인의 도덕적 정체성의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항상 도덕적 행위의 근간이나 원칙을 묻게 된다. 사회규범이 무엇보다 우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는 반문한다. 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가? 이 물음을 통해 매킨타이어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의 원칙보다는 도덕적 행위를 할 사람의 도덕적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분명 도덕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인격적인 성품이고, 이 성품이 그 사람의 유덕함과 어떤 연관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162-163쪽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요구되는 도덕적 논의는 도덕적 성품을 지니고 사회의 가치를 바꾸어가려는 인간들의 육성이다. 서구의 전통에서 보자면, 이러한 도덕적 이상의 완성은 서구 근대성과는 다른 전통에 호소할 때 가능하다. 그 전통에 의하면 도덕적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유덕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다. 도덕적 인간에게 중요한건 구체적인 상황에서도 올바른 행우를 할 수 있는 능력과 관행이지, 단순히 불편부당한 관점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롤스 철학의 문제점은 지나치게 서구 근대성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 도덕철학에서 잃어버린 전통은 유덕한 성품을 통해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다. 이러한 전통을 되살리는 것 또한 중요한 도덕 철학의 과업 중 하나다. -165-166쪽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도덕성은 타인의 이익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항상 자기 합리성을 추구할 줄 아는 특정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마주치는 보통 사람들에게 요구된다. 보통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불완전함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의 도덕적 함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불완전함이다. 따라서 원초적 입장의 당사자들을 굳이 도덕적 인간의 대변자라고 볼 이유가 없다. 설령 그들이 도덕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해도 그 입장이 반드시 실제의 인간들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센 환경의 변화에도 굳건함을 잃지 않는 덕성이다. 이러한 덕성을 지닌 사람들은 비록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슬기롭게 대처하고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줄 아는 구체적인 인간들이다. -172-173쪽

사회가 생산할 수 있는 총합은 사회 성원들의 협력의 차이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사회 생산의 총합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많은 경우 사회협력은 와해된다. 사회협력이 와해되었다는 것은 그 사회체제 내에서 성원들의 능력의 차이가 차별이나 불평등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 사회체제 내에서의 불평등의 심화는 궁극적으로 사회성립을 위태롭게 한다. 불평등의 심화는 결국 사회구성체의 핵시인 사회 성원의 자발적 차며를 가로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협동이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불평등을 제거해야만 한다. 불평등은 단지 일시적으로 모든 사회 성원들에게 동일한 몫을 제공한다고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협동을 공정한 원리와 절차에 따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정의의 원칙은 각 개인들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면서, 사회에서의 자신의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공정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것이다. -190-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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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4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정성, 보편성을 판단하는 능력은 '얼마간' 본능에 내재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간'을 위 문장에 삽입합니다. 하하
침팬지 집단의 행동양상을 관찰한 결과를 보면
리더가 공정하지 않으면 다른 침팬지들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더군요.


마늘빵 2007-11-24 11:37   좋아요 0 | URL
음, 롤즈는 공정성의 기준을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했고, 매킨타이어는 롤즈의 시도에 동의하면서도 롤즈가 바라보지 못한 현실 속의 인간 개개인을 바라본 것이죠. 현실을 사는 개개인들이 원초적 입장에 놓여진 당사자들이라면 롤즈의 공정성은 쉽게 확보되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문제에요.
 
철학 읽어주는 남자 명진 읽어주는 시리즈 4
탁석산 지음 / 명진출판사 / 2003년 2월
품절


철학은 교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전문 지식이며 전문 기술이다. 교양이란 없어도 사는데 지장이 없으며, 있으면 조금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다. 교양이 있어야봐야 사는 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삶과 사회와 세계에 대한 전문 지식이며 가혹한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교양과 결부된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문화주의, 즉 교양주의 영향이 주원인이었다.-16쪽

한국 철학계에는 기본적으로 합의된 시대정신이나 과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이나 주제로 철학자들을 분류하지 않고, 어디서 유혹했느냐 아니면 전공하는 철학의 국적에 따라 분류된다. 그리고 이런 분류는 한국 철학계가 외래 철학의 대리전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철학과 교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나 문제의식이 아니라 세력 균형이다. 대리전을 충실히 수행하려면 자기편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수 싸움이 되기 때문이다.-240쪽

한국 철학에서 원전 해석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외래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철학을 구축하고 전개하는 능력과 자세가 갖추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철학은 자기 철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할 뿐이지, 누가 원전을 정확히 해석하느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전형적인 훈고학적 태도이다. 물론 더 정확한 원전 이해는 필요하다. 하지만 원전을 이해하여 자기 철학을 구축하는 것이 철학자의 기본 임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반대다. 한국 철학은 여전히 위의 예에서 본 바와 같이 원전 해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자존심을 걸고 논쟁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은 예뻐한다. 대신 자기 철학을 전개하려는 사람은 학문적이지 않다고 한마디로 폄하한다.-242쪽

철학은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 철학이 위기에 처하려면 잘나가던 때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철학은 별로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잘나가던 시절도 없었다. 그저 학과가 존재하고, 학생이 존재하고, 교수가 월급을 받는 일이 반복됐을 뿐이다. 특별히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 적도 없고, 한국 지성사에서 토대가 되는 작업을 한 적도 없으므로 새삼스레 위기라고 말할 것도 없다. 있다면 앞서 말한대로 교수의 밥그릇 위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외부 환경이 바뀌고 있다. 즉 시대가 격변하며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졌으므로 철학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늘고 있다. 문제는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이런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밥그릇을 지키는 데만 최선을 다하는 교수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한 철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이들의 밥그릇을 지키는 구실만을 제공할 뿐이다. 이런 구실이 어느 정도 먹혀들어 지금 눈먼 연구 기금이 쓸모없는 프로젝트에 대량으로 투여되고 있다. 이런 것이 진짜 위기다.-251쪽

문제는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학생들이 요구하는 지적 호기심과 지적 경외감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즉 철학을 통해 얻고자 하는 바를 철학 과목이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학생들이 등을 돌리는 것이다. 학생들이 실용 영어나 법 관련 과목이나 컴퓨터 관련 과목, 다시 말해서 돈이 되는 과목에 몰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 중략 ... 역사가 과연 진보하는지, 인간 이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등. 진정 알고 싶은 것들이 무수히 많다. 대학은 이런 욕구를 채워줘야 할 의무가 있다. 물론 학생들은 취직에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렇지만 영어는 학원에서도 할 수 있고 취업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학원도 많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더욱더 인문학적 지식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가르치는 선생들이 이런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지적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253-254쪽

사회적 역할이란 철학이 사회 문제에 얼마만큼 발언권이 있느냐를 말한다. ... 중략 ... 이에 반해 철학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앞서 기술한 철학계 현황에 따르면 이상할 것도 없지만, 침묵해왔고 따라서 별로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연히 사회적 발언권도 약화돼 이제는 사회 문제가 있어도 철학자를 별로 찾지 않는다. ... 나는 이런 역할 부재의 원인이 전적으로 철학과 교수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교수는 자신의 철학 지식을 현실 문제에 적용하고 활용하는 능력도 부족하지만 이보다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다. 사회 전반에 대해 어느 정도 두루 알아야 하고 역사나 문화에 대한 소양과 상식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미비하다. 한마디로 문학 평론가와 토론하면 말발이 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258쪽

철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문 철학 저술가 양성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철학책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김용옥 외에는 없을 것이다. 철학책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철학 저술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철학 대중화에 결정적 장애물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읽으려면 전문기술이자 전문 지식인 철학을 다시 가공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학자가 대중적인 철학책을 쓰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자의 관심은 현실과는 무관한 학문적 세계다. 현대 논리 철학의 창시자인 프레게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탐구한다면, 그 지식을 일반화할 틈도 마음의 준비도 돼 있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물론 쓸 수도 있겠지만 성공 가능성은 낮다. 학자는 쉽게 쓰낟고 쓰지만 대중에게 아주 어렵기는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술 성과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사람들, 즉 저술가가 필요하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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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12 1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실적으로,
철학은 교묘한 말재간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가려내는 능력을
갖게 합니다.
한국의 현실에 특히 유용하지요.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구판절판


"우리들은 우리가 억압하려 애쓰는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으며 설사 그렇게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악일 것이다...... 일체의 토론을 억압하려는 것은 자기의 절대무오류성, 즉 절대로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존 스튜어트 밀)-51쪽

똘레랑스는 부정의 논리인 동시에 긍정의 논리다. 완전함을 부정하는 한편 자발성을 긍정한다. 절대적인 완전함이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자발성과 독창성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보편적인 진리가 무너졌다고 해서 개인의 자발성이 함께 사라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똘레랑스는 완전함을 부정하면서도 자발성을 최대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대한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래야 침묵하고 복종하는 사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52-53쪽

양심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운 것이기 때문이다.(필리프 사시에)-54쪽

밀은 진리와 관련해 침묵을 강요할 수 없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논증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기에 침묵을 강요하는 의견도 진리일 수 있다는 것, 둘째 침묵을 강요당한 의견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의 일부분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 셋째 대중 사이에서 널리 인정받는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의 전부라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허용되지 않거나 실제로 논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편견처럼 비쳐져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기회가 상실되리라는 것, 넷째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가르침 그 자체의 의미가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그 의견은 사람의 인격과 행위에 미치는 생기발랄한 영향력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진다는 것이다. -55-56쪽

'똘레랑스'에 부정하는 의미의 접두어를 붙인 형태인 '앵똘레랑스'는 표면적으로는 똘레랑스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앵똘레랑스는 인종, 피부색, 종교, 성적인 취향을 이유로 타인의 행동이나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이성적이고 정당하지 않은 반대를 가리킨다.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이성적인 반대를 뜻한다. 이때의 앵똘레랑스는 어떤 것은 더 이상 받아들이면 안될 뿐 아니라 그럴 수 없음을 의미하며 특정한 상황에서 도덕적 의무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똘레랑스 속에 담긴 앵똘레랑스는 일반적인 앵똘레랑스와 의미가 다르다. -56-57쪽

똘레랑스는 때로 공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지만 거기에 강압을 사용하면 안된다. 아무리 공익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강제나 차별을 동원하면 강제하는 자나 차별하는 자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로 비칠 수 있다. -62쪽

"똘레랑스는 비대칭 불균형의 태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행해지는 악을 악 그대로 돌려주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무장해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승 작용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필리프 사시에)-67쪽

똘레랑들은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예로 들며 비폭력을 무조건 고집하지 않는다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렇다해도 똘레랑들에게는 폭력이 앵똘레랑스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되는 반면 힘없는 약자에게는 일상이 폭력이다. 약자의 비폭력은 상대의 압도적인 힘을 감당할 수 없기에 나타나는 무기력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의 불평등한 모순을 지속시키려는 폭력이 아니라 그 모순을 없애려는 폭력은 야만스러운 폭력과 다르다. 폭력과 대항 폭력은 몸통이 붙어 있지만 머리가 떨어져 있는 샴쌍둥이와 같다. 어느 한쪽이 사라지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해야 한다. 약자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93쪽

"참된 철학 운동이란 몇몇 소수의 지식인 집단 사이에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는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상식'보다 우월하며 과학적 정합성을 갖는 사상 형식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조차 '순진한' 대중과의 연관성을 결코 잃지 않고 또 바로 그 속에서 실로 자신이 탐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의 원천을 발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그람시)-115쪽

똘레랑스는 공적인 토론에서 원칙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 원칙은 상대방의 의견을 냉정하게 듣고 정직하게 진술할 것, 반대자에게 불리한 일을 과장하지 말고 그들에게 유리한 일을 감추지 말 것이다. 좋은 얘기다. 하지만 이런 원칙은 현실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특히 극단주의자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잘 지키지 않는다. 그들은 토론 자체를 거부하거나 설사 토론을 하더라도 자기들보다 약한 사람의 의견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방을 무시하면서 '무식하다', '교양없다', '부도덕하다' 같은 딱지를 붙인다. 밀은 이런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진리와 정의를 위하려면 우세한 편에서 욕설의 남용을 억제하는 것이 반대 의견을 가진 편의 욕설 남용을 억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116쪽

우리는 기득권 세력이 허위 의식을 만들기 시작할 때, 또는 그것을 체계적으로 퍼뜨리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즉 허위 의식을 기르는 말과 이미지를 쓰려 할 때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그들의 선전을 가만히 놔둔다면 그들은 압도적인 돈과 힘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킬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며 적당히 조절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전을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을 차별해야 한다. -120쪽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모두가 동등해야 한다고 주장만 하는 것은 허위 의식을 심어줄 뿐이다. 오히려 동등함이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올바르다.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한 차별은 정당하다. 차별하는 똘레랑스는 똘레랑스를 실천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121-122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닐세. '정의'란 각자에게 걸맞는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을 말하네. 각자는 거울이 비추어주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지. 그러므로 정의란 각자에게 자기자신을 되돌려주는 것을 뜻하지. 죽음을 주고, 비참한 고통을 주고, 착취하고,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고 잘난 체했던 이들에겐 그에 상응하는 불행과 고통을 주어 그들이 새로이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고, 생의 활력을 주고, 일을 주고, 저항하게 도와주고, 형제가 되었던 사람은 그에 마즌 대가로 얼굴과 가슴을 환하게 밝혀주고 그가 걸어갈 길을 밝혀줄 빛을 얻게 되는 것이지." (안토니오 할아버지)-135-136쪽

우리는 그 존엄을 잊지 말고 기억하며 존엄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존엄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 속에 품어야 힘을 가진다. 결탁이 강자들의 추태라면 만남은 약자들의 희망이다. 존엄하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존엄을 추구하는 것이고, 존엄을 위해 죽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 영역에서, 당신은 당신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일상 속에서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때로 힘들어 쓰러질지라도 다시 일어서서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존엄은 그 길의 끝에 놓여있는 선물이 아니라 길 위에 뿌려지는 바로 그 땀이다.-138쪽

각주98) 조정환은 똘레랑스가 중도를 지향한다고 비판한다. "똘레랑스는 두 개의 앵똘레랑스 극단 사이에 놓여 있다. 그것은 중간의 지대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양극단을 배제하는 중도, 중용의 태도를 지향한다. 이 태도에서 양쪽 극단의 질적 차이는 무시된다. 똘레랑스는 오직 앵똘레랑스와의 차이를 통해서만 정의될 뿐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마찬가지로 동일화를 향한 강한 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고 다름을 확인하고 다름을 견디는 태도이지 다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태도는 아니다." (조정환, <'똘레랑스'의 윤리 정치학 비판>,[모색] 3호, 122쪽)-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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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읽어볼 만한 구절 : 35절 불관용자에 대한 관용
    from 자유를 찾아서 2007-10-22 21:14 
      "지금부터는 과연 정의가 불관용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어떤 조건 아래서 그러한지를 고찰해보기로 하자."   "몇 가지 문제가 구분되어야 한다. 첫째, 불관용하는 종파가 자기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둘째, 어떤 조건 아래에서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을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언제 그들이 관용을
 
 
 
왜 똘레랑스인가
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옮김 / 상형문자 / 2000년 12월
품절


<옮긴이 서문>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오류와 무지로 몰아가는 자연적 성향이 지체없이 진리를 이기게 된다." (바나주 드 보발) -13쪽

<대담>

사시에 - 똘레랑스한다는 것, 그것은 견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워진 부담을 견디는 것처럼 말입니다. 추상적 의미로서 똘레랑스 한다는 것은,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생각을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의 의견이나 생각을 바꿀 수도 있지만 그대로 용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똘레랑스는 의도적인 자세입니다. 또한 용인이되 의도적인 용인이라는 점에서, 무관심이나 포기와 다른 것입니다. 앵똘레랑스로 말하자면, 그것은 "네 생각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따라서 네 생각을 파괴하고 네가 쓴 책을 불태우고, 나아가 너를 없애겠다."는 것이지요.-16-17쪽

사시에 - 대화를 위해서는 상대방이 용인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먼저 용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환대'의 사상이 있습니다. 화합되지 않는 사람을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최소한의 '접촉'을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들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인공적이지만, 똘레랑스란 그런 것 입니다. 그것은 항상 적대하던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모험입니다. 물음은, 그만큼 위험을 무릅쓸 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령 중동의 예를 봅시다. 중동 평화를 위한 첫번째 조건은 접촉입니다. 벽이 가로막혀 있다면 서로 보지 못합니다. 보지 못하면 항상 가장 나쁜 쪽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서로 볼 때에는 사람들이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똘레랑스의 시작은 서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음을 의식하면서부터입니다.-20-21쪽

<한국어판 서문>

"그러나 만일 존재의 저 깊은 곳에서 인간이 자유롭다면, 다시말해, 자발성과 무상성의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 부분이 말하도록 놔두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 자체이며 새롭고 뜻밖인 우리의 희망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위하여 이 똘레랑스는 유일하며, 유달리 엄격하면서 복합적인 하나의 한계를 규정한다. 곧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똘레랑스는 나의 자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도 인정할 때에만 실천될 수 있다. 그리하여, 똘레랑스는 무관심이나 단념과 정반대가 된다. 똘레랑스는 하나의 윤리이며, 각 개인이 보다 우월한 원칙을 위하여 자신의 이해관계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덕목이다. 똘레랑스는 투쟁에서의 무기이며, 성숙된 덕목이다." (필리프 사시에)-25쪽

<여기서부터 본문>

'견디다, 참다'를 뜻하는 라틴어 tolerare 에서 온 똘레랑스라는 말은 16세기 초에 처음 등장했다. 그 뒤 5세기 동안 이말의 정의는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처음에 똘레랑스는 종교에 대한 군주의 구체적인 태도를 가리켰다. 오늘날처럼 남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개인적인 정신자세를 가리킨 것이 아니었다. 종교개혁 시기, 기독교적 진리의 단일성이 산산조각나고 국가 권력이 확립될 무렵, 신앙의 다양성에 직면한 국가 권력이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가 문제로 제기 되었다. 군주는 그의 신민들에게 진리에 동참하도록 강제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놔둘 것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했던 것이다. 당시의 똘레랑스는 공적이 소관 사항으로서, 종교의 진리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탄압하지 않는 정치와 그런 정치를 실행하는 군주의 개인적 태도를 가리켰다. ... 중략 ... 그리하여 18세기 말에 이르면 똘레랑스는 국가의 처신을 계속 지칭함과 동시에 오늘의 "인간 관계의 바람직한 방식"으로서의 개인적 태도로도 지칭하게 되었다.-29-30쪽

행위를 삼가는 것으로서의 똘레랑스는 결국 행위로서의 똘레랑스 이전의 단계, 즉 정신의 행사로서 생각하기를 삼가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30쪽

볼테르는 앵똘레랑스를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정신적 자세로 보았다. 앵똘레랑스를 폭력적 행동 이전에 가장 분명하게 내면화된 것으로 본 사람은 틀림없이 루소였다. "나는 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모든 사람을 앵똘레랑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31쪽

에라스무스는 언제나 승리하기를 바라는 우리들의 열정을 야심에 결부시키면서, 진리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고 자기애를 버리라고 호소했다. 대체로 인간은 잘못된 견해와 싸우기보다는 자기와 반대되는 견해와 싸운다. 카스텔리옹은 "흔히 우리들과 의견이 같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단으로 간주한다"고 기록했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사면을 허용한 앙부아즈 칙령(1563)을 지지했던 어느 팸플릿은 훨씬 더 직설적으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갖는 사람들한테서만 죄와 악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파성"을 지적하였다. 몽테뉴는 진리를 지킨다고 열의를 보이는 사람들의 "열렬한 자기애"와 "오만"을 비난했다. 그는 앵똘레랑이란 "자기의 견해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그 견해를 위해서는 공공의 평화를 무너뜨리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악을 가져오고 관습의 무시무시한 타락을 가져오는 것도 [...] 심지어는 국가의 교체까지도 주저하지 않게"된 사람이라고 말했다.-45-46쪽

로크에게 그 이유는 분명한 것이었다. 즉,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견해에 동의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자부심과 자만심에서 온다는 것이다. 루소는 다음과 같이 써서 로크의 뒤를 따랐다. "인간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절대로 박해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박해의 원인은 바로 자존심과 오만이다." -46-47쪽

루소는 인간에게, 특히 일반 평민에게, 너그러운 자세를 취할 것을 호소했다. 왜냐하면, 평민은 스스로 '숭고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을 지니고 있으면 그 진리는 절대적으로 지켜져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는 조금이라도 숙고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명백하게 보이는 사실이기 때문에, "무신론의 철학자는 악의적이거나 맹목적 자만심을 가진 논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도시에서 추방해야 마땅하다. 명백한 것 앞에서 잘못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70쪽

인간이 믿는 진리의 대부분은 가능성에 불과하므로 각자의 무지에 대하여 서로 이해해야 한다고 로크는 결론 내렸다. <백과사전>의 <똘레랑스> 항목에서도 이렇게 추론하였다. 즉, "대립관계가 없는 분명한 진리란 결코 없으며, 인간의 이성은 정밀하고 확정된 척도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의 이성을 잣대로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없고 또 누군가를 자신의 소신에 따르도록 주장할 권리도 없다." -71쪽

로크는 사법관의 종교 문제 개입권을 부정했다. 종교 문제가 세속의 영역 밖에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사법관도 "[최상의 선]에 도달하기 위해 이용해야 할 길에 관해 확실하고도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해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진리'란 없다. 루소는 이점을 반복해서 말했다. 종교적인 앵똘레랑스는 종교에 관한 진리가 너무나 애매모호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73쪽

크렐이나 스피노자는 앵똘레랑스가 견해의 다양성이라는 자연적 질서에 반대된다고 판단하였다. "인간은 전혀 동일한 정신유형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견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79쪽

스피노자는 사상을 탄압하는 법이 평화 대신에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그 법이 '사물의 질서'(당연지사)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인간은 그 자신에 집착하듯이 자신의 견해에 집착한다는 것과 사상이란 본래 다양한 것임에 따라, 그 사상을 좌지우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폭력과 무질서만 가져올 뿐이다.-81-82쪽

똘레랑스는 세계 질서가 더 이상 이중인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순간부터 그 타당성을 잃는다. 하늘늘 믿지 않는 자는 지금 이 땅에서 모든 것을 기대하고 모든 것을 요구해서는 안되는가? 사고가 물질의 단순한 발현으로 이해되거나, 혹은 가장 내밀한 사유가 단지 외부적 영향의 결과에 불과할 때에, 두 세계가 서로 모르는 사이라고 주장하는 똘레랑스는 부질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똘레랑스의 옹호자들은 똘레랑스가 상호간의 무관심 - 이미 부질없는 근거가 된 - 이 아니라, 최상의 목적 - 이 목적이 천상적이든 세속적이든 - 을 달성케 하는 도구임을 입증하도록 권고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똘레랑스는 '사물의 질서'(당연지사)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지 않고 유용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101쪽

똘레랑스의 지지자들은 "가장 정당한 전쟁보다는 가장 부당한 평화를" 선택해야 하며 무질서는 잘못의 지속보다 더 큰 죄악이라고 반박하였다. -116쪽

스피노자와 바일은 똘레랑스가 보다 깊이 있게 각자의 사고와 행동을 이성에 따르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두려움과 모든 증오로부터 해방된 인간은 폭력, "분노,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내면의 질서를 마음 속에 세울 수 있다. 견해의 자유는 아무 것이나 할 수 있는 면허장이 아니다. (교황의 회칙 <미라리 보스>가 주장하게 되듯이) 견해의 자유는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사회 질서를 이성에 맡김으로써 그 질서를 강화시키자는 것이다.-137쪽

루소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19세기 표현의 자유 옹호자들은 16세기 기독교도의 통일 지지자들과 적어도 하나의 확신을 공유하였다. 즉, 인간은 똑같이 생각할 때만 진정으로 단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사회 질서는 모든 사람을 하나의 진리에 재집결시키는 데에 있다. 비종교적 이상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을 집결시키는 진리에 도달케 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똘레랑스는 비종교적 이상에 속하는 하나의 기본 요소가 된다. "만일 진리가 보편적이고 우리 모두가 동일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여러 사상 사이의 자유로운 상호침투는 우리로 하여금 생각과 마음을 통하여 조금씩 서로에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 [...] 확신은 적절하면서 친밀한 방식으로 밝혀진 진리에 우리의 사고를 일치시키며, 확신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마음 속 깊이, 그리고 활기찬 방식으로 단결시킨다." -138-139쪽

"개인들이 그들의 자유를 어떻게 활용할지 우리가 모르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에게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게 아주 중요하다. [...] 자유를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이 자유를 모든 사람들에게 허용함으로써만 자유를 활용할 미지의 사람에게도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에크, <자유의 구성>) -142쪽

그레구아르와 루소에게 있어서 차이란 차이 그대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진리가 승리함에 따라 차이를 없애자는 것인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유익'하려면 더욱 절대적이다. 오늘날도 계속 상대론의 영향을 받은 외형상의 똘레랑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목소리들은 언론의 자유가 절대로 필요한 까닭은 모든 주장들이 가치가 있다거나 모든 것이 불확정적이라거나 또는 진리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 아니라 찾아내야 할 하나의 진리가 존재하기 때문임을 상기시킨다. 마르쿠제에게 "똘레랑스는 목표의 진리이다." 배링턴 무어는 "과학적이기를 바라는 모든 참된 똘레랑스 개념은 하나의 이념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데 사용되는 수단들의 개선과 발전을 추구한다." 라고 썼다. 그러므로, 똘레랑스는 진리로 이끄는 단계로써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진리는 똘레랑스의 "유일한 참조점이자 계류지점"이다. -148쪽

똘레랑이란 우선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정신에 대한 강제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149쪽

사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지식은 서로 마찰하면서 서로 비교되고 보충된다. 이제 개인 혼자서 한 시대의 모든 학문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빛'의 교환 개념이 중요성을 갖게 되었고 지적인 전투라는 비유 옆에 자유 거래라는 비유가 아주 넓은 의미의 '교제'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들의 부싯돌은 마찰함으로써 빛이 난다" (볼테르)-167쪽

모를레에 따르면, 토론은 사물을 다른 견지에서 보게 하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견해를 수정, 보완시키는 사상을 탄생시킨다. "검토하고 토의하고 공격하고 방어하면서 우리는 사상과 견해의 충격에서 빛이 탄생하는 것을 본다" 그 점에서 잘못된 사상에게도 자유가 필요하다. 오류의 변태를 감내하고 그 변태를 단계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오류, 체계적인 오류를 거쳐야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의견이 자유로운 순간부터, 즉 참된 의견이 잘못된 의견과 똑같은 자유를 누릴 때부터는, 유일하고 같은 목표인 진리와 행복에 대한 자연적 성향이 인간의 내심에서 "작용하도록 놔두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적이고 가장 총명한 의견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당한 대의를 옹호하려는 학식 있는 사람을 항상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168쪽

"인간 정신의 불완전한 상태 안에서 진리의 이해관계는 다양한 의견을 요구한다." (존 스튜어트 밀)-170쪽

"인간의 권리, 따라서 똘레랑스는 모든 인간 안에 있으며 인간이 되게 하는 자유 속에 뿌리박고 있다. 이 자유는 우리가 어원학적 의미로서는 그 놀라운 성격을 말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모든 사물은 물리적 법칙이 강요하기 때문이거나, [...] 또한 살아 있는 세계에서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것에서 다양한 종들 간에 힘의 분쟁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다. [...] 가장 강한 자가 가장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 세계는 예외적인 세계이다. 왜냐하면 이 세계만이 물리적 인과관계 법칙이나 원칙상으로 가장 강한 자의 지배를 통해 [...] 지배당하지 않고 각자 인간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느 에르쉬)-178쪽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그 첫번째 권리가 자유인 인간의 영원불멸의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으므로, 강제는 오직 자유의 행사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때 그것을 피할 목적으로써만 행사될 수 있다." (로크,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1789)) -180쪽

"인간에게 강제로 믿게 하지는 못할 것인 바,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대로 믿거나 이해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봉신부)-186쪽

양심의 자유는 인간의 복종 가능성으로 규정된다. 존 롤즈가 오늘날 내세우는 것도 이 내면의 강제에 보내야 될 존중이다. 그는 어떠한 유용성의 원칙도 도덕적 의무감을 "절대적으로 구속하는" 성질과 경쟁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똘레랑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자기 자신과 마주한 의무 -도덕 - 가 각자 그것에 공존히 복종하도록 놔두어야 할 만큼 충분히 진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똘레랑스는 인간을 그 자신의 내면의 확신에 복종하게 놔두는 것이다. -196쪽

인간은 외부의 모든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 그에게는 오직 내면의 법(양심)으로부터 받을 명령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피히테)-196쪽

스스로 결정하기 위하여 인간은 천성적으로 이성의 모든 수단을 행사하기 때문에 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칸트는 그 점에서 사고의 스승이다. 즉, 자유는 이성의 행사이며, 이성은 도덕법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개인의 견해나 행위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를 그 자신에게 맡겨지게 놔두는 것은, 그의 자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인 이성의 행사와 합류하는 데 따른다. 모든 인간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선을 향해 나아간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197쪽

칸트는, 자유란 "이성이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법 이외에는 그 어떤 법에도 복종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자유롭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자는 모든 이성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자유의 반대인 "동물적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감각과 열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기 때문이다.-198쪽

츠베탄토도로프로 말하면, 그는 정당한 제약에 관한 아주 오래 된 기준들과 거의 동일한 기준을 재발견하였다. "무제한인 똘레랑스의 권리는 약자들을 해치고 강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강간범들에 대한 똘레랑스는 여성들에게는 앵똘레랑스를 의미한다. 만일 호랑이가 다른 동물과 한울 안에 있는 것을 똘레랑스한다면, 그것은 후자를 전자를 위해 희생시킬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체력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약자는 무제한적인 똘레랑스의 희생자이다. 약자를 공격하는 자들에 대한 앵똘레랑스는 약자들의 권리이지 강자들의 권리가 아니다." 자유의 원칙이 고발당할 만큼 극단적 한계에 이르러서, 우리는 자유 자체의 이름으로 절대적 똘레랑스의 원칙에 조종을 울려야만 한다. 마르쿠제, 폴랭, 료타르나 토도로프는 각자 그들 방식대로 라코르데르의 불굴의 문구인,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탄압하는 것은 자유이고 자유롭게 하는 것은 법이다."를 다시금 진술하였다.-236쪽

헬베티우스는 앵똘레랑스를 폭행이나 남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 침해라는 강력한 의미로 보았다.

오늘날의 앵똘레랑스는 순전히 정신 자세를 말하는 것이어서, 앵똘레랑스에 대한 우리의 앵똘레랑스는 다른 모습을 제공한다. 요컨대 불균등하게 안심시키는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의 앵똘레랑스는 지적인 '항의'에 지나지 않고 틀림없이 매체의 힘을 빌리기 때문에 스스로를 진리 자체로서, 약하기만 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다고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그것은 의도와 단념을 탐색하기 위해 정당화되고 있다. 즉, "무관심에 대해서는 앵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앵똘레랑스에 앵똘레랑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앵똘레랑스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앵똘레랑이 되어야 한다." 느긋하게 앉아있는 인간은 싸우는 똘레랑스의 견해 덕분에 '덕목으로서의 앵똘레랑스'가 그것의 참된 이름의 몫을 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을 발견하는게 분명한가?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성을 이루는 것은 다름아닌 "똘레랑스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정신이다.-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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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7-09-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가 많은 걸 보니 무척 괜찮은 책인가 보네요 ^^

마늘빵 2007-09-22 20:04   좋아요 0 | URL
음, 생각만큼은 아녀요. 좀 어수선하달까요. 잘 안들어와요. 어수선한건 대충 술술 넘기고 읽어볼만합니다. :)